#59.
진작부터 궁금했다. 이그레인과 직접 관련도 없고 당장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발 벗고 나서는 걸까.
“왜, 말하기 곤란한 건가?”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아무래도 오늘은 이 문서를 볼 시간도 없을 것 같아요. 누구 때문에 말이죠.”
그를 흘겨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드루쉬아는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알았을 텐데도 끈질기게 아시카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건 다음에 다시 보여주세요. 분명 약속한 거니까. 대신 오늘은 당신이 알고 있는 얘기를 더 들려줘요.”
‘다음에’라는 한마디에 드루쉬아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진작부터 그럴 계산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뭐가 궁금한데?”
“초대 건국신화에 나오는 가문은 셋으로 알고 있어요. 황실과 탈리온, 그리고 아크펠라. 황실은 황금안, 아크펠라 대공가는 청보라빛 눈이라면 탈리온은 뭔가요?”
탈리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런 특징이 있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티가 나지 않으니까. 안다고 해도 구분하기가 어렵지.”
“무슨 말이죠?”
드루쉬아는 의자에 기대앉은 채 손으로 턱을 쓸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아시카를 바라보며 조금은 망설이는 것도 같았다.
‘말을 해줘도 될까?’
대쪽같이 바른 품성을 지녔으니 비밀을 지켜달라고 하면 지켜줄 터였다.
‘내 비밀을 이 여자에게 공유한다, 라.’
별것도 아닌데 그 사소한 행위에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로의 거리를 좁히는 그런 의미가 있는 행위.
드루쉬아는 아시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이건 내 조부님만 알고 계신 비밀인데 그래도 알고 싶어?”
물어오는 목소리가 은근하다.
탈리온의 비밀이자 드루쉬아의 비밀. 그걸 알게 되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그 걸음을 내딛겠느냐고, 드루쉬아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아시카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알고 싶어요.”
“무르기 없어.”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드루쉬아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내밀었다. 갑자기 확 좁혀진 거리에 아시카는 당황했다.
“뭐 하는 거예요?”
“잘 봐.”
“뭐를요?”
“내 눈.”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의문에도 말없이 시선을 맞췄다.
깊은 바다처럼 짙푸른 눈동자. 차다고 생각했던 그 눈동자는 언제부턴가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었다. 먹이를 쫓는 사냥꾼의 눈처럼 집요하고도 욕망 어린 시선으로.
정면으로 마주한 시선이 버거워서 아시카의 얼굴에 홧홧한 열기가 올랐다.
“뭘 보라는 건지…. 아!”
“차이가 느껴져?”
푸른색의 홍채가 크고 짙어서 색이 번진 것처럼 착시가 일어난 줄 알았다.
“흰자위가 흰색이 아니에요? 세상에!”
희미하게 보이는 푸른 테두리는 홍채에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옅어졌다.
신기한 마음에 아시카는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그의 눈가를 매만졌다. 놀랐는지 눈가의 근육이 움찔한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피하지 않았다.
“황족이나 아크펠라와 달리 거의 티가 나지 않아. 알고 있다 해도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
“황족에게서 황금안이 태어나지 않는 이유가 혈족으로 이어지는 힘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근데 그 힘이 뭔지는 알려진 게 없더라고요.”
“알려진 게 없는 게 아니라 기록을 지워 버린 거지. 이제는 사라져버렸다고 말하면 황실의 권위가 실추되니까. 그래 봐야 전설일 뿐이지만.”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바로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손을 뻗으면 안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제국의 역사 속에는 두 번의 기적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어. 현재 제국의 영토에서 반 이상이 사막과 황무지였다는 전설을 들은 적 있나?”
아시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가 신경 쓰여 슬쩍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드루쉬아는 자신의 의자를 조금 더 당겨 거리를 좁혔다. 그의 기다란 다리가 아시카의 허벅지 바깥쪽에 은근히 스쳤다.
“처음 왕국이 세워질 때 신의 축복을 받아 사막과 황무지에서 물이 솟고 나무가 자라게 됐다고 하지. 그곳이 현재 제국의 수도인 트렐린과 그 주변 지역이야. 그리고 300여 년 뒤 또 한 번 같은 기적이 행해져서 그 곱절의 황무지가 초지로 변했다고 해. 이후 황실에서는 황금안의 명맥이 뚝 끊겨버렸어.”
“소모되는 힘이라는 건가요?”
“그 부분이 명확하지가 않아. 원래는 신의 축복과 함께 받은 신물이 있다고 전해지거든. 그런데 황실의 신물이 그 무렵 즈음 사라졌어.”
아리송한 대답에 아시카의 미간이 좁아졌다. 슬며시 다가온 손끝이 그녀의 이마를 쿡 찔렀다.
“예쁜 이마에 주름지잖아.”
“집중 좀 해주시죠?”
은근슬쩍 가까워지려는 시도는 칼같이 거절당했다. 드루쉬아는 손을 거두면서 ‘안 통하네’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신물과 혈족의 힘, 그래서 어느 쪽이라는 건가요? 탈리온 역시 개국공신이니까 알지 않아요?”
“가문에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의 축복을 받은 혈족에게는 신물을 다룰 수 있는 힘도 전해진다는 말이 있어. 나처럼 가문의 특징을 지니고 태어난 경우가 해당하지. 근데 우리 가문의 신물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황실이 빼앗다시피 가져가서 본적이 없어.”
거기에는 탈리온과 황실의 미묘한 긴장 관계와 그로 인한 불편한 과거사가 있었다. 선대 황제가 적대했던 것은 아크펠라 대공가뿐이 아니었다.
차이가 있다면 탈리온은 정치에 뜻이 없는 전형적인 무신 가문이었고 아크펠라는 공국으로 불릴 만큼 독자적인 세력이 강했다는 것이다. 신물을 잃고 황금안조차 태어나지 않는 황가에 비해 아크펠라의 힘은 오래도록 강력하게 유지되어왔다. 그것이 황제의 눈 밖에 난 가장 큰 이유였다.
40여 년 전, 아크펠라 대공가의 반역에 하마터면 탈리온까지 휩쓸릴 뻔했다. 황제는 말도 안 되는 증거를 내밀며 탈리온에게 죄를 덮고 싶다면 신물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당시의 탈리온 공작은 저항 없이 신물을 넘겼다.
그런데 황제에게 넘어간 신물은 정작 아무 힘도 없었던 모양이다. 탈리온이 별 아쉬움 없이 신물을 넘긴 것도 그래서였고.
황제는 대노했으나 탈리온에게 이유를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이후 빼앗긴 신물은 황실 창고 어딘가에 처박힌 채 방치되었다는 후문이 있었다.
아시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뭔지도 모르는 건가요?”
“본적은 없지만 들은 적은 있어.”
아시카는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까맣게 빛나는 것이 좋아서 드루쉬아는 일부러 더 뜸을 들였다.
“보석이라더군. 청보라색 원석에 가까운.”
“청보라색이요?”
아시카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녀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드루쉬아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하지만 청보라색 보석은 원래도 흔하잖아. 당신 목걸이도 청보라색이고. 그 종류는 대부분 보석보다는 예쁜 원석에 가깝지.”
드루쉬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아시카는 수긍할 수 없었다. 수도의 어느 보석상을 뒤져도 비슷한 원석을 찾지 못했는데 드루쉬아는 너무 쉽게 본적이 있다고 말했다.
문득 아시카는 이상한 점을 느꼈다.
“탈리온의 신물을 본 적이 없다면서요. 그런데 제 것과 닮아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아.”
지난번에 드루쉬아가 했던 말이었다. 꿈속에서 봤다는 말이었는데 사실대로 말하자니 이제껏 자신이 해온 이야기에 신뢰가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꿈에서 봤다고, 그걸 가지고 거래 운운했다는 걸 알면 기겁하겠어.’
실제로 본 것이 아니니 확실한 것도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탈리온의 신물과 아시카의 목걸이가 같은 보석일 리는 없지 않은가.
‘아니, 같을 수도 있지. 신물이 사실은 별것 아닌 돌멩이였을 수도 있고.’
전설이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과거의 탈리온 공작이 신물을 미련 없이 황실에 내준 것도, 네오렌이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유도 이해될 법하다.
드루쉬아는 망상에 가까운 신비로운 힘 따윈 믿지 않았다. 현실적인 가치가 없는 가문의 유산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다.
“음, 여하튼 알아. 약간 피막에 둘러싸인 것 같기도 하고.”
빛의 방향에 따라 미미하게 드러나는 차이였다. 들어서 알고 있든 기록에 적힌 걸 봤든 드루쉬아의 설명은 틀리지 않았다.
아시카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닮은 보석에 대한 정보는 드루쉬아가 말한 탈리온의 신물뿐. 청보라 색이라고 해서 다 같지는 않다고, 이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종류라고 차마 사실을 말하지는 못했다.
“그 신물을 보유한 가문이 어디 어디인가요?”
“당연히 초대 개국공신 가문이지. 황실과 탈리온,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멸문해버린 아크펠라 대공성에 있었다고 해.”
아시카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대공성에 있던 신물은 어떻게 됐나요?”
“그게 좀 모호해. 선황제께서 탈리온의 신물을 뺏어간 걸 보면 대공성의 것도 가져갔겠지. 군대를 선두에서 이끈 것이 선황제 폐하니까. 근데 그걸 손에 넣었다는 말이 없었어. 어쩌면 그것도 쓸모가 없어서 황실 창고에 팽개쳐뒀을지도 모르고.”
멸문한 가문에서 종적이 묘연해진 마지막 신물. 아시카는 놀란 나머지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아크펠라 대공가에는 당시 세 명의 직계 자손이 있었다. 정처 소생의 장녀와 후처 소생의 남매. 둘째는 황후가 되었고 셋째인 아들은 후계자로 내정되었다가 사고로 죽었다. 남은 것은 정처 소생의 장녀 하나.
대공성이 폐허가 되던 날, 그녀 또한 거기서 죽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시기가 어떻게 되더라?’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아시카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대공성이 함락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아시카의 부친이 태어난 것은 그 난리가 난 이듬해였다고 들었다.
‘아버지의 동생이…, 어린 숙부가 몇 년 뒤 조모와 함께 살해당했고.’
홀로 살아남은 아시카의 아버지 란체는 이그레인에 정식으로 입적되었다. 실제 나이보다 두 살을 더 올려서 기록하는 바람에 어릴 때 체구가 작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왜 굳이 나이를 거짓으로 기록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시카는 어렸고 그게 뭘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웨이브는 란체에게 평생 모친에 대해 입에 올리지 못하게 했다. 란체는 종종 아시카를 안아주며 누구와도 추억을 나눌 수 없는 모친을 그리워하곤 했다.
「내 어머니의 유품이란다. 이것을 내게 주실 때 절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하셨지. 아버지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쿵, 하고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쿵, 쿵, 북소리처럼 울리는 소리에 온몸이 함께 울리는 느낌이었다.
아시카의 손이 저도 모르게 가슴 언저리로 올라갔다. 옷 속에 숨겨진 목걸이를 혹시 드루쉬아가 다시 보게 될까 봐.
알아차리면 어쩌나. 자신의 동요를, 이 목걸이의 진짜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시야가 아득해질 만큼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감추려 한들 감춰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시카는 온몸으로 충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얗게 핏기가 사라진 얼굴, 숨조차 쉬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 어깨가 들썩일 만큼 심장이 뛰었다.
“아시카.”
대답해야 하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데 입술만 달싹일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시카, 뭐가 문제지? 왜 그래?”
드루쉬아는 이상을 느끼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바로 가까이 다가와 있는 그의 목소리가 아시카에게는 멀게만 느껴졌다.
아무런 신분 기록도 남지 않은 웨이브의 정인. 아시카의 조모이자 부친을 사생아로 태어나게 한 정체불명의 여자. 그 조모가 절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면서 부친에게 남겨준 유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엄청난 진실이 아시카의 머리를 후려쳤다.
‘나는 반역도의 핏줄일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