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어째 이 남자의 얼굴은 어제보다 더욱 윤기가 흘렀다. 밝은 금색의 머리칼 탓일까. 어둑한 실내에서조차 빛이 나는 느낌이었다.
드루쉬아는 빼곡한 책장을 슥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거기다 신전 도서관은 개인에게 함부로 개방하지 않아. 열람할 때마다 확인이 필요하지. 뭘 찾는지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셈인가.”
“여긴, 어떻게….”
“안녕하십니까, 탈리온 공작님.”
“경우에 따라서는 안녕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지.”
쥴마의 냉한 인사를 드루쉬아는 빈정거리는 어조로 받아쳤다.
아시카는 열 오르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이 남자는 그녀의 곁에 있는 사람들만 보면 못 잡아 먹어 안달을 할까.
쥴마의 인상이 구겨지는 걸 보며 아시카가 가만히 손짓했다. 자리를 비워달라는 의미였다.
잠시 망설이던 쥴마는 가볍게 고갯짓하고 물러났다.
통로가 비좁은 탓에 드루쉬아의 건장한 체구가 앞을 꽉 막아버린 느낌이었다. 쥴마는 몸을 모로 비껴가며 간신히 그를 피해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아주 재밌어. 제국의 소공작이 먼지 소복한 책방 거리를 들쑤시고 다니는 몰골이라니.”
“언제부터 본 거예요?”
“아마도 처음부터?”
“이제 대놓고 저를 쫓아 오시는군요.”
“그러라고 서신을 거절한 게 아닌가?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잖아.”
“아니, 누가….”
거절한 건 아니었다. 회신을 받아가야 한다는 심부름꾼을 빈손으로 돌려보내긴 했지만.
드루쉬아는 성큼 걸음을 옮겨 아시카에게로 다가갔다. 책장 몇 개만 넘어가면 사람들이 있지만, 그 몇 개의 책장들이 견고한 벽이 되었다. 먼지 쌓인 책방이 순식간에 은밀한 공간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아시카는 뒷걸음질 치려다 멈춰 섰다. 제 뒤에 있는 것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흉기 같은 탑이라는 걸 기억해낸 탓이다.
이미 충분히 가까워졌는데도 드루쉬아는 더욱 거리를 좁혔다. 한 뼘까지 가까워진 거리에서 고개를 숙여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왜 쉬운 길을 두고 고생을 자처하지?”
심장을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가 숨결과 함께 귓가에 닿았다. 아시카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생각할 시간을….”
“생각할 시간을 주면 또 도망치려고 할 테지. 내가 당신을 모르겠어?”
요리조리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는 것이 훤하다. 그러니 틈을 주지 않으려고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 아닌가.
“그대가 찾는 것은 건국부터 시작된 아주아주 오래된 정보이고, 건국신화와 관련된 가문은 제국에서 단 셋뿐이지. 하나는 황실, 하나는 멸문한 아크펠라 대공가. 나머지 하나는 탈리온. 그런 정보를 이런 데서 찾을 수 있겠어?”
저를 이용하라고, 이렇게 대놓고 내어주는데도 망설이는 여자가 이해되지 않았다. 정작 그렇게 끈질기게 밀어붙이는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면서.
“저는….”
눈을 떴을 때 짙푸른 눈동자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내가 여기서 입을 맞추면 어떻게 될까?”
아시카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커지는 것을 보면서, 드루쉬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촉, 하고 젖은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진다. 쿵, 쿵. 아시카의 심장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또다시 촉, 하고 달라붙은 입술이 조금 전보다는 느리게 머물다 떨어졌다. 아니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입술에서 나온 혀끝이 느리게 아시카의 입술을 핥았다.
달뜬 숨이 새었다. 아슬아슬 입술과 틈새를 미끄러지는 혀끝이 달고도 아쉬워서. 가빠오는 숨만큼 아시카의 어깨가 작게 오르내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닿았으면.
그러나 드루쉬아는 그 이상 밀고 들어오지 않았다. 탐욕적으로 달려들었던 어제와는 사뭇 다르게, 그녀의 입술 언저리를 혀끝으로 문지르고 가볍게 입을 맞출 뿐.
“…이럴 거면서.”
싫다는 내침도 단호한 거절도 못 할 거면서. 사실은 너도 원하고 있는 게 아니냐면서. 조금 전보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아시카는 어느새 감고 있던 눈을 다시 떴다. 그녀의 시선이 조금 전까지 저를 희롱하다 멀어진 입술에 닿았다.
“더 생각할 필요가 있나? 지금 대답해주지?”
대답. 그가 원하는 대답. 드루쉬아가 끈질기게 채근하는 대답.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기만 한다. 건국신화니 대공령이니 하는 생각은 아시카의 머릿속에서 진작에 날아가 버렸다. 입안이 마르고 초조한 숨결이 새어 나왔다.
드루쉬아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립고 소리 내어 이름을 부르고픈 사람. 시작점이 어디였든지,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니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처음부터 무의미한 고민이었다.
“…약속, 지켜요.”
간신히 흘러나온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렸다. 그 속에 담긴 것은 두려움이 아닌 긴장된 설렘. 그리고 기대감.
작은 웃음소리가 아시카의 귓가에 흘러들었다. 촉, 하고 따뜻한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떨어진다. 기꺼워서 못 견디겠다는 양, 그러나 터져 나오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드루쉬아는 간신히 아시카에게서 물러나며 못 박았다.
“내일 오전 10시. 마차를 보내지.”
끝끝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야 마는 남자였다. 드루쉬아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돌리며 재차 아시카를 돌아보았다.
마침내 그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아시카는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제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아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열이 오른다. 심장을 데우고 몸을 들뜨게 하는 기분 좋은 열기였다.
* * *
숲이 바람에 흔들리며 솨아아 솨아아 시원한 소리를 내었다. 수도에 있는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한적한 장소. 바람에 나부끼는 하얀 커튼조차 평화로워서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품에 가둬두고 버둥거리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끝나기만 하면 도망가려고 하지. 자꾸 이러면 곱절로 괴롭히는 수가 있어.”
“땀에 젖었잖아요. 씻고 싶어요.”
젖은 피부가 쩍쩍 달라붙어 이렇게 붙어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아무리 바람이 시원한 산장이라도 지금은 여름이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그 조금만 더 소리를 언제부터 했는지 기억은 해요?”
지친 핀잔에도 엉덩이에 달라붙은 남자의 몸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르쉬아.”
“으응.”
여전히 드루쉬아는 대답뿐이었다.
“진짜….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점심 무렵에 도착했는데 벌써 붉은 노을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실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몸 단장을 하고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긴장과 설레는 마음으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우연히 벌어지는 사고가 아닌 제 의지로 시작하는 관계.
긴장되었던 마음은 별장에 도착해 드루쉬아를 만나는 순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가 아예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주한 순간부터 시작되어 끝도 없이 이어진 서로에 대한 탐닉. 본능만 남은 짐승처럼 뒹굴다가 저물어가는 노을을 보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가 끄떡도 하지 않자 가슴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팔을 찰싹 내리쳤다.
“하아, 매정하군.”
끝끝내 그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시카를 보고 드루쉬아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서두르는 그녀와 달리 드루쉬아는 알몸으로 침대에 늘어진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시카의 하얀 나신에 붉은빛이 스며드는 광경이 아름다워서 넋을 놓았다.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아시카는 재빨리 시트로 몸을 가리고 산산이 흩어진 자신의 옷을 하나하나 찾아냈다.
침대 옆에 떨어진 속옷, 소파에 내던져진 슬립,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진 드레스 등. 그러나 바로 입을 수는 없었다.
“그 자료, 어디 있어요?”
“안 떼먹으니까 씻고 식사부터 하지.”
“자료가 먼저예요. 씻고 나올 테니까 준비해줘요.”
아시카는 확실하게 의사를 못 박고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진짜 매정하네.”
그녀가 버려두고 간 그의 중심은 아직도 숨이 죽지 않았다. 손으로 슥 훑어내리자 미끈거리는 체액이 묻어난다.
“후…. 목적에 충실한 건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아.”
얼마 전만 해도 아시카는 그가 제안한 만남을 거절했었다. 워낙 차게 거절해서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다시 몸을 섞게 되었고 어영부영하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혼이 쏙 빠질 만큼 강렬한 정사에 스스로 냉정하다 여겼던 드루쉬아조차 이성을 잃었다. 철두철미하게 따져 묻고 행동하던 모습조차 아시카 앞에서는 송두리째 날아가고 말았다.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도 괜찮아.”
욕구에 충실하면서 양쪽 가문이 시끄러울 일도 없다. 지금처럼 밀회를 이어가다 필요할 때 혼맥을 제안해도 될 것이다.
정 아니다 싶으면 그때 관계를 정리해도 된다. 그럴 때가 온다면 아시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끔히 그를 잘라낼 터였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계산인데도 드루쉬아의 얼굴이 구겨졌다. 나른한 만족감에 젖어있다가 삽시간에 날카로운 얼음 조각에 찔리는 기분이었다. 후끈하게 달아올랐던 심장마저 차게 식는다.
머리와 가슴이 서로 다른 의지를 갖고 충돌하는 기묘한 느낌. 냉정을 되찾을수록 드루쉬아의 기분은 더욱 불쾌해졌다.
* * *
탈리온 저택의 서고에서 가져온 자료는 적지 않았다. 기사 둘이 날라온 책과 문서가 방안에 놓여있던 테이블의 반을 차지했다.
‘기사는 언제 온 거야.’
아시카는 서류보다 기사들이 더 신경 쓰였다. 산장에 도착할 때만 해도 관리인과 하녀 몇 명이 보였을 뿐이었다. 기사들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탈리온의 기사들이 아닌가요?”
“영지 출신이 아니고 입이 무거운 녀석들이지. 탈리온의 기사라고 해서 모두 이그레인을 싫어하지는 않아.”
아시카가 뭘 염려하는지 알기에 이곳에 오는 인원은 특별히 신경 써서 선발했다.
“내 쪽보다는 당신 호위기사가 더 걱정되지 않아?”
“잔느도 영지 출신이 아니에요.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콜테른 경의 소개로 공작가에 들어왔죠.”
그래서 잔느는 탈리온을 적대하지 않았다. 다만 양쪽 기사들이 충돌하는 문제로 부단장 시절에 하도 속을 썩어서 질색할 뿐.
기사들이 자료를 옮겨온 뒤 산장의 관리인이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져다주었다.
“오래 걸릴 텐데 뭐라도 좀 먹어.”
“한두 시간 내에 볼 수 있는 분량이 아닌데요.”아시카는 테이블 의자에 앉으면서 쌓여있는 자료를 들춰보았다. 문서에 정신이 팔려 드루쉬아가 밀어주는 접시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책이나 뭐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이건 뭐….”
“탈리온은 학자 가문이 아니라 기사의 가문이야. 이만큼 자료가 남아있는 것도 다행이지. 거기다 초대 가주께선 전쟁터를 전전하느라 남긴 기록이 별로 없어.”
드루쉬아가 가져온 것은 책이 아니라 초대부터 이어져 온 가문의 기록 일부였다. 하나로 정리된 문서가 아니라서 내용도 제각각이었다. 인물 계보도, 전장 기록 일지, 가주의 개인 일기나 편지 기록 같은 것들이었다.
온갖 서류를 다루는 아시카조차 암담하게 느껴질 정도로 중구난방인 문서들이었다. 한숨이 폭 나왔다.
“여기서 이걸 어느 세월에 다 확인해요?”
“가져다주는 것까지가 내 일이었어. 거기서 정보를 찾는 건 당신 몫이고.”
“이거, 빌려달라고 하면 안 되겠죠?”
“당연한 말을 해? 이걸 보여주는 건 여기서 나와 함께 있는 동안만이야.”
무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기록이었다. 딱히 기밀은 아니지만 외부로는 유출하지 않는 자료. 이걸 보여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아시카는 난감한 얼굴로 서류를 만지작거리다 드루쉬아를 돌아보았다.
“지난번에 해준 이야기, 그게 어느 서류에 있는지만이라도 알려줘요. 차라리 그편이 빠르겠어요.”
“그건 조부님께 들은 얘기야. 기록에 있긴 하겠지만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몰라.”
드루쉬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진짜로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근데 왜 갑자기 초대 건국신화의 정보를 확인하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