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57화 (57/153)

#57.

“이걸 꼭 지금 해야 해?”

“당장 하라잖아. 이게 내일까지 남아있다간 우리 모두 경을 칠 거라고.”

불퉁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이어 퍽, 퍽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땅을 파헤치는 소리였다.

“야간근무 서다 말고 이게 뭔 일이래.”

“그러니까 말이야. 근무지를 거기로 옮기는 게 아니었어. 궁이 수시로 발칵발칵 뒤집히는데 심장 떨려서 어디 살겠어?”

“황태후 폐하께서 노발대발 난리였다며? 황실을 우롱한 대역죄인을 당장 잡아들이라고 호통을 쳐서 정원사가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잖아.”

“아휴 꽃이 무슨 죄야.”

“근데 왜 이 꽃을 다 뽑으라고 난리가 난 거야?”

일행 중 하나가 삽질을 멈추고 물었다. 그에 함께 있던 병사가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했다.

“이 색, 청보라색이 옛날 대공가의 상징이었잖아.”

“하이고, 그게 언제 일인데…. 근데 황태후께서 대공가의 마지막 핏줄 아니었어?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꼴도 보기 싫어하는 건 무슨 조화야?”

“그 속을 우리가 어찌 알아? 모주의 궁전에서 그런 소리 했다간 큰일 나니까 입도 벙긋하지 말게.”

병사들은 대화를 중단하고 화단의 꽃을 뿌리째 파내는 데 열중했다. 차근차근 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공원에 있는 같은 종류의 꽃을 모조리 뽑아낼 모양이었다.

소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드루쉬아가 아시카의 손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밤이 깊어진 공원으로 나왔다.

“저게 무슨 일이죠?”

“황태후 폐하께서 대공가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질색을 한다더니, 사실인가 보군.”

“그런데 왜 하필 청보라 색인가요?”

드루쉬아는 땀에 젖은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어헤쳤다. 밤바람에도 채 식지 않는 열기를 누르며 아시카를 돌아보았다.

“건국신화와 연결된 가문들은 그 직계 혈족에게 이어지는 특징이 있어. 황족은 황금안을, 아크펠라 대공가는 청보라색 눈을 타고났지.”

“아아.”

황족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지만 아크펠라 대공가에 대해서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반역으로 멸문한 탓에 대부분의 기록을 폐기해버린 탓이다.

“가문의 특징을 타고 태어난 아이는 초대 신화 속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전설이 있었지.”

“그 얘기는 어디서 들었죠? 책에서도 그런 정보는 본 적이 없어요.”

공개되지 않은 정보 속에 숨어있는 단서.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당연하지. 이건 초대 건국신화와 관련된 가문에서만 내려오는 이야기야.”

“그럼 공작님은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겠네요? 책이 있는 건가요? 잠시라도 좋으니 빌려줄 수 있을까요?”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팔을 잡아 세웠다. 간절하기까지 한 눈빛에 드루쉬아는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르쉬아”

“네?”

“르쉬아라고 불러.”

“갑자기 그게 무슨….”

“당신이 만들어준 애칭이잖아. 적어도 둘이 있을 때는 이름을 부를 거야.”

약속한 적도 없는 다음을 이야기하는 남자. 아시카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건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시카의 손을 잡아끌었다. 실은 대답을 듣기 두려워서 아예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기로 했다.

남자의 큰 보폭을 따라가기 위해 아시카는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렇게 맘대로 하는 게 어딨어요?”

“할 거 다 하고 이제 와서 발 빼는 건 용납 못 해. 이야기는 나중에. 저기 당신을 애타게 찾는 기사의 걱정부터 덜어주라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잔느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많이 흘렀는지 어느덧 공원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등을 떠밀며 물러났다.

“마차를 보내주지. 정보를 얻고 싶다면 거절은 생각도 하지 마. 내 제안에 대한 답을 들고 온다면 더 좋고.”

“잠깐만요!”

“당신의 기사에게 말해. 난 약속을 지켰어.”

드루쉬아는 그녀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잔느가 가까워지는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공원 바깥쪽을 향해 달려가 버렸다.

아시카는 황망한 얼굴로 멀어지는 드루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한여름 밤이었다.

* * *

다음 날 아시카는 서고가 있는 별채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러나 서고 담당자를 채근해도, 그녀가 직접 발 벗고 찾아봐도 손에 남은 것은 새카만 먼지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저… 뭣 때문에 그러시는지….”

서고 담당자는 지은 죄도 없이 아시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황명으로 자료를 폐기했다 해도, 이그레인은 대공령을 관리하는 주축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기록이 하나도 없을 수 있어?”

“물론 관리 기록은 남아있지만, 그건 공작님의 집무실에서 별도로 관리 중입니다.”

“그거 말고. 공식기록이 아니라도 뭐든….”

난감해하는 담당자를 두고 아시카는 말을 멈췄다. 채근해봐야 없는 자료가 나오지는 않을 터.

이그레인은 유서깊은 공작가였다. 황명이 닿지 않는 어딘가 먼지 쌓인 구석에라도 남아있는 기록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일부러 누가 치우기라도 한 것처럼. 간신히 단서를 잡았는데 정작 찾을 수 있는 정보가 없다니.

서고 담당자가 아시카의 눈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시면 팜레드 거리에 있는 책방에 사람을 보내보시는 건 어떨까요?”

“책방?”

아시카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개인 도서관도 아닌데 그런 게 남아있겠어?”

“제가 말하는 곳은 책을 파는 서점이 아니라 필사를 전문으로 하는 곳입니다. 높으신 분들이 관심 가질 만한 곳이 아니라서 수백 년째 내려오는 장서들이 보존되어 있기도 합니다.”

맥빠져있던 까만 눈동자에 빛이 반짝였다.

“팜레드 거리에 그런 곳이 있다고?”

“네, 그런데….”

“아가씨, 또 여기 계십니까?”

“아, 쥴마.”

아시카는 한참 헤집어놓은 책더미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쥴마는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아시카를 보며 심란한 얼굴이 되었다.

“무슨 일이야?”

“탈리온 공작저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하?”

로디안 정원에서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돌아온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 하루를 못 참고 또 서신을 보내다니.

건네받은 서신을 펼치자 익숙하고도 유려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 익일 오전 10시.

간결한 메모 한 줄. 그러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이어지는 시간차에서 그의 조급함을 읽을 수 있었다.

‘미쳤어.’

대체 어쩌자고 이러는 걸까. 그간의 해묵은 감정 따윈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양,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드루쉬아는 그녀가 알던 남자가 아니었다.

“회신은 어떻게 할까요?”

“아니, 회신은… 나중에. 나중에 생각해볼게.”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절하겠다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드루쉬아가 또 어떻게 반응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보다 쥴마. 나하고 외출 좀 해야겠어.”

“어디로 가십니까?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팜레드 거리. 필사를 전문으로 하는 책방이 있다며? 찾아야 할 자료가 있어.”

쥴마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의 시선이 서고 담당자에게로 옮겨가자 마찬가지로 난감한 표정의 담당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리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투박하게 지어진 목조건물과 황토색 벽돌로 지어진 단층 건물이 뒤섞여 있는 거리. 상가 거리를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많이 오가지 않는 한적한 거리가 나왔다.

“요즘 팜레드 거리에 자주 나오신다고 들었습니다.”

무심하게 흘리는 쥴마의 말속에는 그간의 의문이 담겨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아시카는 유연하게 대답을 회피하며 멈춰선 마차에서 몸을 일으켰다. 쥴마가 안내하기 전에 아시카는 이미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갈만한 곳은 아닙니다. 찾으시는 걸 말씀해주시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럴 거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말리려는 쥴마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점점 더 고집스러워지는 아시카를 보며 쥴마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쥴마도 예전에는 다녔을 거 아냐. 그래봤자 책방인데 어때서.”

책은 고급 물품이었고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평민 자제들은 책을 사는 대신 직접 필사를 하거나 책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필경사에게 일을 의뢰했다.

“그게….”

쥴마는 고개를 저었다.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겪는 것이 나을 테지. 그런 심정으로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비좁은 골목길을 가로지르는 동안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간간이 아시카에게 머물렀다. 간소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나붓한 걸음걸이가 유독 눈에 띄었던 탓이다.

별생각 없이 뒤따르던 아시카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마침내 쥴마가 새카맣게 삭아버린 목조건물 앞에 멈춰 섰을 때, 아시카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책방… 이라고 하지 않았어?”

책은 고가의 물건인 만큼 취급하는 상점도 대부분 중심가에 있었다. 이렇게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건물이 아니라.

“오래된 만큼 수도에서 보유한 서적이 가장 많습니다. 아카데미 수학생들에게는 유명한 곳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쥴마는 망설임 없이 상점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답답한 먼지 냄새와 진한 잉크 냄새가 코끝에 훅 끼쳤다.

“세상에….”

아시카는 탄성이 나오는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빼곡한 책장으로 가득 찬 내부.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십수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각사각 펜을 놀리는 중이었다. 방문객이 있는데도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쥴마는 숨을 죽이고 미로처럼 켜켜이 놓인 책장들 속에서 능숙하게 길을 찾아갔다.

“이쪽 구역이 사람들이 찾지 않는 가장 오래된 고서들을 모아놓은 곳입니다.”

숨을 죽인 탓에 가까이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아시카는 아득한 얼굴로 말을 꺼낸 쥴마를 보고 그가 가리키는 책장 한쪽을 확인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거기는 책장에도 들어가지 않는 책들을 쌓아놓은 곳이었다. 켜켜이 쌓아서 천장까지 닿아있는 책의 탑. 무너지지 않는 것이 경이로울 만큼 높은 탑이었다.

“저기서… 책을 찾는다고?”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뽀얗게 쌓인 먼지는 둘째치고 무너지면 깔려 죽는 건 아닐까.

“혼자서는 못합니다. 도움을 받으셔야 해요. 정 혼자 찾길 원하시면 차라리 신전 도서관으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맞다. 신전에도 도서관이 있었지?”

“대신 신전은 신분증명을 해야만 하지.”

엉뚱한 곳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쉬아?”

아시카와 쥴마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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