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지금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은 잔느만이 아니었다. 아시카는 아까부터 요란하게 뛰는 심장을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만나면 빈정거리거나 으르렁거리거나 싸우는 기사들을 말리거나, 아니면 서로 지지 않기 위해 팽팽하게 줄다리기하던 두 사람이 난생처음으로 평화롭게 같은 방향을 보며 걷고 있었다. 그것도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이 넘쳐나는 꽃밭 한가운데서.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어색해.’
평소의 심술궂은 태도는 어디다 던져버렸는지. 언제나 먼저 시비를 걸던 남자가 침묵하고 있으니 먼저 꺼낼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간 별일은 없었고?”
정중하게 건네 오는 질문에 아시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남자, 뭐 잘못 먹었어?’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을 보고 드루쉬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안부 인사를 한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이야? 내가 아무리 성질이 고약해도 생명의 은인을 홀대할 만큼 무례하지는 않아.”
“아, 그랬죠.”
생명의 은인. 기꺼워야 할 한마디가 가슴에 날아든 가시처럼 심장을 콕콕 찌른다. 팽팽하게 부풀었던 가슴에서 푸쉬쉭 바람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제아무리 이그레인을 미워하던 탈리온이라도 한 수 접어주고 반길 수밖에 없는 크나큰 은혜.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았으니 더욱 그러하겠지.
‘뭘 기대한 거야.’
설레던 마음이 가라앉고 실망스러운 마음은 뾰족한 핀잔이 되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 설마 제집에 첩자라도 심어두신 건가요?”
“남 말 할 일이 아니야. 내 집에 있는 눈과 귀를 내가 모를 줄 알고? 자매라고 했던가.”
“아!”
“내보내지는 않았어. 본채에서 별채로 위치만 바꿨지.”
짙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어 볼 듯 선명하다.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다 알고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눈동자였다.
아시카의 시선이 슬그머니 그를 비껴갔다. 그동안 서로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탐색해왔던 건 사실이니까.
아시카는 선뜻 입을 열기 어려웠다. 왜 저를 찾아왔는지 이유도 묻지 않았다. 이유를 알고 나면 만남의 시간도 그만큼 줄어들 것 같아서. 어쩐 일인지 드루쉬아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말없이 어색한 걸음만 옮기는 중이었다. 답답하리만치 느린 산책 끝에 아시카와 드루쉬아는 원형의 화원 바깥쪽에 다다라 있었다.
환하게 불을 밝힌 가로등 아래, 원형의 화원 가장자리를 에워싼 독특한 색이 눈에 띄었다. 잎사귀 하나 없이 올라온 꽃대에 청보라빛 꽃송이가 나붓하게 고개를 늘이고 있었다.
“백합 종류 같은데, 색이 특이한 꽃이네요.”
어색한 침묵을 깨트리며 아시카가 입을 열었다.
“수도의 유명한 정원사가 품종을 개량한 꽃이라더군. 색이 독특해서 이 꽃을 본 따 부토니에를 만들어 선물한다고 해.”
“꽃이라고 하기에는 색이 차요.”
오묘한 청보라빛이 어디선가 본 듯도 싶었다. 아시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드루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낯이 익은 색인데…. 아, 그 보석.”
“네?”
“지금도 하고 있나? 그 깨진 보석 팬던트 말이야.”
드루쉬아가 그녀의 목 언저리로 시선을 옮겼다. 얇은 백금줄이 하얀 목선을 따라 가슴 앞섶에 숨겨져 있었다.
“그 목걸이,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왜요?”
그의 시선이 가슴골로 향하자 아시카는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가슴을 가렸다. 반사적인 행동에 드루쉬아의 시선이 짙어졌다.
“그렇게 방어적으로 굴면 더 이상해지는 거 알아?”
“뭐, 뭐가요?”
하얀 손으로 가린 가슴 굴곡이 소담스럽다. 여름이라 목선이 깊이 파인 드레스 탓에 예쁘게 뻗은 쇄골과 그 아래 하얀 피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그의 한 손 가득 차던 말캉한 가슴살이 있을 테지.
“그….”
젠장, 소리 없이 욕설을 뱉었다. 드루쉬아는 마른 침을 삼키며 간신히 시선을 거두었다.
“본적이 있어. 그 목걸이에 있는 보석 말이야.”
“정말요? 어디서요?”
조금 전까지 조심스럽던 태도가 일시에 사라졌다. 아시카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에게 한발 다가갔다.
“그게 레이디 이그레인에게 중요한가?”
“뜸 들이지 말고 말해줘요. 어디서 봤어요? 혹시 소유품 중에 있는 보석인가요? 제게 보여주실 수 있어요?”
같은 보석을 찾으려고 수도의 보석상을 모조리 뒤졌다. 하지만 끝내 닮은 원석조차 찾지 못했다.
반색하는 얼굴을 보고 드루쉬아의 눈이 반짝였다.
“중요한 모양이네. 나에게도 못지않게 중요해서 함부로 말해주기는 곤란한데.”
실물을 본 적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분명 꿈속에서 보았다. 꿈이 맞다면 황궁 어딘가에 있는 탈리온의 초상화에 그 보석이 있을 것이다.
“왜요? 위험한 곳에 있나요? 알면 누가 다치기라도 해요? 아니면.”
“원하는 답을 주면 레이디 이그레인은 내게 뭘 줄 수 있는데?”
“무슨….”
드루쉬아의 입가에 어린 미소를 보고 아시카는 입을 닫았다.
‘또, 또! 뭐 하나 쉽게 넘어가 주는 법이 없지.’
매 순간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는 남자였다.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는 데도 드루쉬아의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몽글몽글 풀어져 버렸다.
드루쉬아는 그런 아시카가 신기했다.
‘확실히 허술해졌어.’
온몸을 꽁꽁 싸매고 철두철미하게 벽을 세우던 태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변했어. 아니 이게 본래의 모습이겠지.’
아시카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윽하다. 순간순간 솔직하게 돌아오는 반응이 좋아서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드루쉬아가 기분이 좋아질수록 아시카의 기분은 곤두박질쳤다.
“생명의 은인이라면서요. 이렇게 박대하는 법이 어딨어요?”
“은혜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갚도록 하지. 하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잖아.”
“아, 정말.”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어찌나 얄미운지. 아시카는 입술을 말아 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여기까지 쫓아온 이유가 뭐죠? 질질 끌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요.”
“아아, 그게.”
반가운 나머지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만나러 온 이유조차 잊었다.
“그게 말이야, 간단하지가 않은데.”
“간단하지 않은 게 뭔데요?”
아시카의 재촉에도 드루쉬아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지난 일주일 내내 고민했지만 누구에게도 묻지 못했다.
‘이 얘기를 해도 될까.’
막상 아시카의 얼굴을 보니 말을 꺼내기가 더욱 어려웠다. 드루쉬아의 입술이 달싹이다 끝내 말을 뱉지 못했다.
‘네 목소리가 들려.’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할 소리였다. 그러나 농담이나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들어본 적도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기억에 남아있었다.
「르쉬아, 사랑해.」
귀에 익은 목소리와 간질거릴 만큼 다정한 속삭임.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으로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했다. 어이없는 꿈이 깨고 생각나는 건 오로지 한 사람뿐이었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말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로 도저히 이 여자가 할 리 없는 말을 뱉었다.
“뭐 하나만….”
말을 꺼내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묻는 것조차 말이 되지 않는다. 이제 겨우 두 번 밤을 보냈을 뿐인 사이였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미쳤다고 하겠지.’
제게 보이는 일말의 호감조차 날려버릴지도 모른다.
“약을 만들어줬다는 연금술사, 믿을만한 사람인가?”
의심할 건 그것밖에 없었다. 분명 몸은 회복되었는데 머릿속 어딘가가 이상해졌다.
나일이 탈리온 저택을 나갔을 때 뒤를 밟았지만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놓쳤다고 들었다. 어찌나 약삭빠른지 기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왜요? 부작용이 있나요? 어디가 아파요?”
뾰족했던 시선이 한풀 꺾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시카의 얼굴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아니, 아픈 건 아닌데 약제사가 누군지 모르니까 하는 말이야.”
“이상한 증상이 있다면 바로 말해줘요. 약을 지어준 사람은 믿을 만해도, 희귀한 약이라서 탈이 날 수도 있잖아요.”
이븐을 믿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드루쉬아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그래서 조사는 잘 되고 있나요? 범인이 누군지는 찾았어요?”
“아니, 아직.”
의심스러운 상대는 있지만 동기나 과정이 불분명했다.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말인데, 저택을 침입했던 놈들 중 일부가 대공령 출신이야.”
“네?”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하는데 거짓말 같지는 않아. 혹시 이 문제에 관해 이그레인 공작에게 들은 바가 없나?”
“아.”
아시카는 고개를 저었다. 대공령에 관한 한 웨이브는 아시카에게 부여된 권한 이외의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대략 사정을 알고 있는 드루쉬아에게도 답답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대공령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가 필요해. 그래서 말인데….”
문득 두 사람에게 쏠린 시선이 느껴졌다.
어색하게 떨어진 거리와 다소 심각해 보이는 얼굴. 공원의 연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에 지나가던 이들이 연신 흘금거렸다.
아시카는 두 사람이 있는 장소가 공원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다음을 약속하기에는 기약이 없지 않나? 내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잖아.”
아시카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저기….”
“뭐?”
“저쪽으로….”
공원 한복판에서 어디로 가자는 건지.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태도에 드루쉬아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아시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더니 사뿐한 걸음으로 드루쉬아에게 다가갔다. 살며시 내민 손이 걷어 올린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저쪽으로 가자고요.”
드루쉬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의 옷소매에 달랑달랑 매달린 손끝이 톡, 톡 힘을 주어 당긴다. 미약한 힘이지만 확실한 의사표시를 해오는 접촉이었다.
쿡,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입가를 나머지 한 손으로 가렸다.
드루쉬아가 성큼 걸음을 옮기자 아시카는 그의 소매 끝을 잡고 천천히 앞장서 걸었다. 슬쩍슬쩍 주변을 살피며 걸어간 곳은 식물원 건물 뒤편이었다.
“설마 여기에 들어가자고?”
“저녁때는 문을 닫아서 아무도 찾지 않는다고 해요.”
“허.”
식물원 앞에는 해가 진 뒤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 표지와 문에 걸려있는 빗장이 전부였다.
아시카는 체구가 작아 존재감이 덜했지만 드루쉬아는 큰 키와 체격, 거기다 도드라지는 외모 때문에 어디를 가도 눈에 띄었다.
‘차라라 이편이 낫긴 하다만. 의외로 무모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드루쉬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문에 걸린 빗장을 툭 쳐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