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그랑제는 거리는 귀족들이 주로 활동하는 곳으로 고가의 샵과 주요 상단의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아시카는 그랑제느 거리에 있는 상단 건물 몇 군데를 방문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딱히 목적이 있는 외출은 아니었다. 답답한 마음에 스스로를 환기시키고 싶었을 뿐.
해가 저물었어도 거리에는 한낮의 열기가 남아있었다. 거기다 오늘따라 거리에 사람이 많아서 잔느가 앞장서며 길을 터주었다.
“앗.”
“아이쿠, 아가씨 미안해요.”
덩치 큰 사내가 옆을 스쳐 가면서 어깨 장식에 아시카의 머리 망사가 걸려 뜯어지고 말았다.
“뭡니까?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조심성 없이.”
“잔느.”
정색하는 잔느를 아시카가 말렸다. 거리가 혼잡하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어쩌나. 머리 장식이 망가졌군요. 어떻게 배상이라도….”
“아니요. 괜찮아요.”
배상을 핑계로 사내가 거리를 좁혀왔다. 잔느가 바로 나서서 앞을 가로막았다.
“아가씨께서 괜찮답니다. 바쁘신 모양인데 갈길 서두르셔야겠습니다.”
정중하지만 거부 의사가 분명한 잔느의 태도에 사내는 아쉬워하며 자리를 떠났다.
아시카는 너덜거리는 머리 장식을 손으로 더듬어 확인하더니 아예 빼버렸다. 검은 머리칼이 어깨 위로 출렁 쏟아진다.
“아가씨.”
잔느의 놀란 시선에도 아시카는 개의치 않았다. 늘어진 머리칼을 슥슥 걷어 올리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둥글게 말아 묶었다. 손수건만으로도 요령 좋게 머리칼을 정리하는 걸 보고 잔느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렇게 묶는 법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으응?”
장신구가 변변치 않은 가난한 평민 아가씨들이나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아시카는 순간 손을 멈추고 굳었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뿐,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대답했다.
“하녀들이 하는 걸 눈여겨봤어. 쉬워 보이길래.”
‘굳이 그런 걸 눈여겨보실 이유가 없을 텐데.’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잔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정작 천연덕스럽게 대답한 아시카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기억을 더듬어 봤다.
‘본적 없는데.’
자신도 모르게 기억하게 된 사소한 습관. 근래 들어 이렇게 달라진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가 변했어.’
이제야 확연히 느껴졌다. 단지 악몽이나 환각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으로 그녀의 어딘가가 달라지고 있었다. 그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었고.
아시카의 얼굴이 심각해지자 잔느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모양입니다.”
“그러게 오늘 유난히 사람이 많아.”
“오늘부터 로디안 정원에서 여름꽃 축제가 있다더니 그것 때문인 모양입니다.”
“로디안? 식물원이 있다는 공원 말이야?”
“네. 식물도 많고 호젓한 장소가 많아 데이트하는 연인들이 많은 곳이죠. 가본 적 없으십니까?”
“그러는 잔느는 가봤어?”
“네, 물론입니다.”
연인들이 찾는 명소 중 하나인 만큼 결혼 전 한두 번쯤은 꼭 가게 되는 곳이 로디안 정원이었다.
“잠깐 들렀다 갈까요?”
“꽃구경을?”
공개 정원만큼 크지는 않아도 공작저의 정원 또한 아름답다. 정원사 부즈리가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철마다 새롭게 피는 꽃들이 정원 곳곳을 채웠다.
“공작가의 정원과는 또 다를 겁니다.”
아시카의 의문을 알아차리고 잔느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공기 중에 은은하게 꽃향기가 감돌았다. 향기의 진원지는 아마도 로디안 정원인 모양이다. 기분을 환기하고 싶어 나온 외출이었다.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 부탁할게.”
“마차를 불러올까요?”
“아니야. 걷는 게 좋아.”
악몽 속에서 제대로 걷지 못했던 충격이 컸던 탓일까. 아시카는 가능한 한 제 몸을 움직이고 스스로 하려고 애썼다. 의식하지 못한 변화 중 하나였다.
“복장을 제대로 갖춰야만 들여보내기 때문에 어설픈 부랑자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주로 귀족과 부유층이 드나드는 곳이라 치안도 확실합니다.”
잔느가 말 한대로 로디안 정원 입구에서 관리인들이 복장과 신분을 확인했다. 날이 어둑한데도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높이 솟은 철제 울타리 너머에는 촘촘히 세워진 가로등 불이 환하게 길을 밝혔다.
아시카의 신분을 확인한 관리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것을 보고 잔느가 얼굴을 구겼다. 조용히 하라는 입 모양과 사나운 기세에 상대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태양을 상징하는 원형의 황금빛 꽃을 중심으로 바깥쪽으로 부채처럼 펼쳐진 화단이 넓게 이어졌다. 북쪽 울타리 근처에 있는 여러 채의 건물은 식물원이었다.
“밤에는 식물원의 문을 닫기 때문에 아쉽지만 오늘은 보기 어렵겠습니다.”
“식물원에 뭐가 있는데 문을 닫아?”
“수입산 선인장이 많습니다. 내부가 어둡다 보니 다칠 위험이 있어서 일찍 문을 닫습니다.”
“선인장을?”
아시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선인장이 왜 특별관리 대상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투박한 선인장이 꽃을 피우면 굉장히 화려합니다. 어느 귀한 화초보다 이채롭고 매력적이죠. 선인장꽃이 필 때면 사람들이 몰려서 한참 줄을 서야 식물원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돕니다.”
“흠.”
본적이 없으니 상상도 되지 않았다.
잔느는 슬쩍 미소짓고는 설명을 이어갔다.
“길이 나선형으로 이어져서 이대로 화단을 따라 걸어가면 정원의 바깥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가장 바깥쪽에 경계처럼 에워싼 정원수를 지나면 벤치와 파고라가 곳곳에 있습니다. 나무가 울창해서 그늘이 짙고 은밀한 공간도 많습니다.”
“왜 이렇게 잘 알아?”
“공원이잖습니까. 너도나도 다 오는 곳인걸요.”
특히 연인 사이의 남녀들이 많이 오는 곳. 그런 곳에 호위 기사를 동반하고 온 아시카를 잔느는 아까보다 더욱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일단 크다는 건 알겠네. 그러긴 한데….”
“레이디 이그레인.”
아시카의 대답은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의해 뚝 끊겼다.
순간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아시카가 놀라 굳어있는 걸 확인하고 상대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레이디 이그레인, 여기서 다시 보게 되는군.”
성량이 풍부한 저음의 목소리가 유독 달게 귀에 감긴다. 아시카는 그제야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르쉬…, 탈리온 공작님?”
거기에는 일주일 내내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남자가 서 있었다.
조끼나 외투도 걸치지 않았다. 장식 없는 셔츠와 긴바지는 집무실에서 일하다 말고 뛰쳐나온 사람처럼 간편한 차림이었다. 밤이라 더위가 가셨는데도 드루쉬아는 땀이 배어난 얼굴을 슥 문지르고 목깃을 풀어헤쳤다.
아시카는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우연일까? 아니면….’
일주일 만의 외출이었다. 지난번 구빈원에서 마주쳤던 걸 기억하며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니 그건 기대였다. 어쩌면 드루쉬아가 저를 쫓아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래, 원래도 집요한 남자였지.’
매몰차게 거절했는데도 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못 이기는 척 끌려가고픈 얄팍한 이기심이 든다.
밤처럼 까만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진 것을 보고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꽃축제에 호위 기사와 데이트라. 삭막하다고 해야 할지 낭만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혼자 꽃구경 온 누구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드루쉬아의 어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습관적으로 빈정거리는 태도에 아시카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잔느, 여기는 복장을 갖춰 입어야 들여보낸다고 하지 않았어?”
“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잔느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격식을 갖춘 복장보다 앞서는 것이 신분이 아니던가.
“복장? 무슨 공원에 들어오는데 그런 걸 따져?”
드루쉬아는 되지도 않는 소리라며 핀잔했다. 제국의 4대 공작가 중 하나인 탈리온이다. 감히 누가 그 앞을 막을 수 있겠는가.
‘신분이 깡패네.’
잔느는 티 나지 않게 혀를 찼다.
“공작님께선 어쩐 일로 동행도 없이 여길 찾으셨나요?”
“그 전에.”
아시카의 질문을 흘리며 드루쉬아가 잔느를 보았다.
“레이디 이그레인과 할 얘기가 있어. 호위는 잠시 물러줬으면 좋겠군.”
잔느의 표정이 굳어졌다. 감히 나서지는 못했지만 못마땅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평소처럼 제 주인이 무례한 상대에게 반박해주기를 기대하며.
그러나 아시카의 입에서 흘러나온 지시는 기대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잔느, 공원 입구에서 기다려.”
“아가씨, 말도 안 됩니다!”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설마 아시카가 진짜로 저를 보낼 줄은 몰랐다. 그런 잔느에게 드루쉬아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내가 책임지고 모셔다드리지. 설마 내가 못 미더워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거야….”
못 미덥다 뿐인가. 절대 안 된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잔느는 제 생각을 입 밖으로 뱉지 못했다.
“괜찮아, 잔느.”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달리 아시카의 얼굴이 살짝 달아 올라있었다.
‘뭐지?’
오로지 느낌만으로 알 수 있는 미묘한 분위기와 둘 사이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은 방향이 달랐다.
‘설마?’
“잔느.”
아시카가 잔느의 대답을 재촉했다. 잔느는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더는 방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잔느가 한발 물러났다.
드루쉬아가 먼저 앞장서며 아시카를 돌아보았다. 왜 따라오지 않느냐는 무언의 재촉.
아시카는 그와의 간격을 유지하며 걸음을 옮겼다. 다섯 걸음 정도의 거리는 동행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탈리온과 이그레인이 나란히 걸어가는 걸 보게 되다니.’
잔느는 다소 황망한 얼굴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