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아름드리 정원수 아래의 그늘조차 후끈한 열기를 피해가지 못하는 여름이었다. 저택의 창문을 모두 열어두었는데도 바람 한 점 불지 않아서 더위를 피할 길이 없었다.
따가운 햇살에 열이 오르는데도 아시카는 창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덥다는 생각조차 잊었다.
탈리온 저택을 나온 지 벌써 일주일. 이제는 털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강렬하게 남은 감각이 끈질기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처음에는 환각에 빠져 벌어진 사고일 뿐이라며 애써 덮었지만 이제는 그런 노력도 통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각인시키며 정신없이 몰아붙이던 남자가 머릿속을 온통 점령했다.
‘심란해….’
매일 밤 꿈속에서조차 드루쉬아의 목소리가 그녀를 부르고 또 불러댄다.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없이 그리운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동틀 무렵 눈물에 흥건히 젖은 채 깨어나는 것은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보고 싶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감정이 제 것인지 꿈속의 착각인지 이제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생각나는 것은 한 가지뿐.
‘만나고 싶어.’
아시카는 커튼에 얼굴을 묻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지워내고자 애썼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뭉글뭉글 올라오는 감정의 크기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르쉬아는 어쩌고 있을까. 매몰차게 거절하고 나왔으니 자존심이 상했겠지.’
그 남자가 어디 가서 여자에게 차일 만한 인물이던가. 아마 해묵은 미움까지 더해져서 분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겠다고 여지라도 남겼으면….’
그러나 아시카는 대번에 머리를 저었다.
‘터무니없지. 조부님이 아시는 날엔 집안이 발칵 뒤집힐 거야.’
사실은 가신들의 반발보다 더욱 두려운 것이 조부 웨이브였다. 웨이브가 얼마나 탈리온을 싫어하는지 아시카만큼 잘 아는 이도 없었다.
‘탈리온의 이름조차 입에 못 올리게 하실 정돈데.’
길길이 날뛰는 탈리온의 기사나 양쪽 가문의 가신들보다 더 격렬하게 이 관계를 반대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웨이브였다.
다른 사람의 반대는 무시할 수 있어도 웨이브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아시카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자 그녀의 인생에 대한 전권을 쥐고 있는 이그레인 공작이었으므로.
드루쉬아에 대한 마음이 착각이든 일시적인 유혹이든 접어야 한다. 그 사실을 곱씹을 때마다 심장에 묵직한 둔통이 일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상념은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멈췄다. 아시카는 서둘러 표정을 수습하고 넝쿨로 엮어 만든 여름용 의자에 앉았다.
“아가씨, 접니다.”
“들어와.”
“말씀하신 대로 세부 품목을 확인한 서류입니다.”
아시카는 언제나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쥴마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았다. 문득 서류를 살피던 아시카의 고개가 갸웃했다.
“그쪽에서 요구한 품목이 이게 맞아?”
“네. 현재 저희 쪽에서 유통하는 물량의 1할 이내로 책정해주면 된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선택권을 줬는데 의외입니다.”
“향신료와 비단, 보석 같은 고가의 품목을 놔두고 밀과 소금, 기름, 포도주…. 이건 대부분 생필품 쪽인데.”
아시카는 이븐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분을 내줄 수 있는 품목을 알리고 협의하고자 했다. 그런데 요구사항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사치품일수록 유통 지역에 제한이 있고 생필품은 제국 전역에 들어가니까요. 멀리 내다보면 그게 유리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생각보다 자금이 부족했던지요.”
사치품은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위험부담이 있기는 하다. 그래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트샵에 있는 고가품만 봐도 돈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던데.”
“저, 그런데 아가씨.”
“응?”
“거기 시클레어 자작부인과는 어떻게 아시는 사이입니까?”
“자작부인? 이븐이 결혼한 부인이었단 말이야?”
아시카는 놀란 얼굴로 서류를 내렸다.
“모르셨습니까? 20년 전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죽었다더군요.”
“20년? 그럼 이븐의 나이가 몇 살이라는 거야?”
“아마 서른 중반쯤 되는 것 같습니다. 아이가 없어서 작위는 친척에게 넘어갔고 쫓겨나다시피 고향을 떠났다고 들었습니다. ”
이븐의 과거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지나치게 평범해서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고향에서 쫓겨난 지 20년이라고.’
무슨 일이 벌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긴 시간이었다.
‘그래, 그 여자도 사연이 있겠지.’
미진한 구석이 있지만 아시카는 그렇게 수긍했다.
“그나저나 쥴마는 그런 정보를 어디서 다 구해오는 거야?”
“아가씨께서 상대하는 사람들이 귀족만은 아니잖습니까. 문제가 없도록 최대한 빨리 정보를 확인하는 것 또한 제 일입니다.”
쥴마는 이븐을 만나기 전 그녀의 이름을 귀족의 계보도에서 확인하고 수도에서 관련자를 수배해 최소한의 정보를 얻어냈다.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내 보좌관의 재능이 특출나나 봐.”
다시 서류에 시선을 옮기며 아시카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아가씨, 제 능력을 높이 사신다면 부탁이….”
“안돼.”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러십니까?”
“나일을 떼 달라는 거잖아.”
아시카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답했다. 쥴마는 인상을 구기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표정을 관리했다.
“제가 왜 그러는지 아시잖습니까? 그놈…, 아니 나일은 제 일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기본적인 서류업무조차 아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말했잖아. 쥴마가 나일을 데리고 있는 건 표면상 지위가 필요해서야. 진짜로 일을 시키지는 마.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사고 칠 만한 놈이라는 건 아시는군요?”
“음, 그렇다기보다는.”
워낙 제멋대로라서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랄까. 필요해서 곁에 두고 있지만 그녀가 통제할 수 있는 부류는 아니었다.
“잘 구슬리면 협조적인 사람이야. 찾아보면 쓸만한 구석이 있을 거야.”
쥴마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계획 없이 일을 벌이는 분이 아니었는데.’
아시카는 대책 없는 문제를 보좌관에서 슬쩍 떠밀고 외면하는 쪽을 택했다. 대화가 더 이어지기 전에 하녀가 집무실을 찾아왔다.
“아가씨,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아, 그래.”
아시카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하녀가 건네는 얇은 후드 망토를 건네받았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겁니다. 외출하기에는 늦지 않았습니까?”
“그랑제느 거리에 잠시 다녀오려고.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꼬박 일주일만의 외출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해가 지는 시간을 택했다.
멀어지는 아시카를 바라보며 쥴마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이 남아있었다.
* * *
벽체가 없는 마차는 삼면이 개방되어 있어서 거리의 소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아시카는 길게 드리워진 차양 아래, 마차 안쪽으로 깊숙이 몸을 밀어 넣었다.
맞은편에 앉은 잔느는 마차의 진동에도 석상처럼 반듯한 자세를 유지했다. 충직한 호위 기사의 표정이 내내 굳어있는 것이 아시카는 편치 않았다.
“언제까지 화내고 있을 거야?”
“화라니요. 저는 그저 주인의 뜻대로 복종하는 기사일 뿐이지 않습니까.”
“말도 없이 집을 비워서 미안하다니까.”
잔느는 가만히 아시카를 바라보았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잔느의 눈에 아시카는 온실 안의 화초였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위험이라고는 발끝에도 닿지 못하게 보호받아온 귀족의 레이디.
아시카도 그걸 당연하게 여겨왔기에 정해진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견고했던 틀이 깨지고 있었다. 다름 아닌 아시카 본인에 의해서. 위험하다고 느껴질 만큼 급작스럽고도 극단적인 변화였다.
아시카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알아. 잔느가 리온과 레아만큼이나 날 염려하고 있다는 거. 걱정시켜서 미안해.”
리온과 레아는 잔느의 두 아이였다. 여섯 살, 네 살 된 두 아이와 동급이라는 건 억울하지만 그만큼 아시카를 아낀다는 말이었다.
“나일은 통제가 되지 않는 놈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주인이 다룰 수 없는 도구는 쓸모가 없습니다.”
잔느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아시카는 벌써 몇 번이나 가문의 기사들을 떼놓고 나일과 단둘이 움직였다. 아시카가 호위 기사보다 나일을 가까이하는 건 분명 위험한 일이었다.
“신분은 확실하잖아. 쥴마가 확인해줬어.”
“차라리 단장님 휘하에 들이십시오. 그편이 낫습니다.”
“잔느, 가문의 기사단을 움직이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잔느가 입을 닫았다.
“나에게는 기사단을 움직일 권한이 없어. 나일이 콜테른 경 휘하에 들어가면 조부님의 통제를 받게 돼. 굳이 쥴마 옆에 둔 이유는 그래서야.”
아시카의 명령을 직접 받는 기사는 잔느와 리브론 같은 최측근 호위 기사 몇 명이 전부였다. 가족이라 해도 공작과 후계자의 위치는 천양지차.
그 속에서 아시카가 자신만의 인맥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 상대가 영 못 미덥고 제멋대로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물론 아시카와 나일은 주종의 관계나 상하 관계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해가 맞물려 서로에게 협조하는 것뿐.
잔느는 이 문제에 관해 아시카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아시카가 내보이는 부드러운 거절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디 다녀오신 건지 말씀해주세요. 만약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제가 모르는 동선이 있다면 곤란합니다.”
“잔느나 쥴마에게 내 모든 것을 공유할 수는 없어. 그래서 나일이 필요한 거고.”
쥴마는 알면서도 캐묻지 않았다. 그는 사적인 친분보다는 상하 관계가 우선이었고 잔느는 그 반대였다. 아시카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잔느도 한발 물러났다.
“위험한 일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야. 그럴 일 없어. 내가 얼마나 겁이 많은지 알잖아.”
그래서 처음 승마를 배울 때 어찌나 힘들었는지. 차마 싫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파랗게 질린 채 말 위에서 얼어붙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모든 두려움을 넘어서는 절박함이 있다는 걸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시카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잔느의 염려를 달랬다.
“하나만 약속해주십시오.”
잔느는 한층 풀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언제나 아가씨 자신이 우선입니다. 위험을 보면 피하시고 피할 수 없을 땐 숨으세요. 어떤 경우에도 싸우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할게.”
대답을 하면서도 잔느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아시카는 기사가 아니다. 위험에 맞서 싸우고 자시고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말간 아시카의 얼굴을 보며 잔느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위험한 짓을 하고 다니는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그래. 귀족 레이디가 남몰래 하고 다닐 큰일이 뭐가 있겠어. 기껏해야 비밀 연애 같은 거라면 모를…. 응?’
문득 잔느의 눈이 가늘어졌다. 매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아시카를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엉뚱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줄 알았는데 가장 위험한 상대가 누군 줄 아십니까?”
“으응?”
“여자 임신시키고 튀는 놈입니다.”
“크흡….”
헛숨을 들이켜다 그대로 살에 들리고 말았다.
“뭐…, 콜록. 갑자기 웬….”
아시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기침이 터져 나오는 입을 손수건으로 막고 손부채질을 해댔다.
“후우…. 무슨 그런…. 설령 그런 일이 있다 해도, 그게 한쪽만의 책임은 아니잖아?”
“물론 그렇지만 순진한 여자는 휘둘리기 쉽습니다. 나쁜 놈일수록 순진한 여자를 한눈에 알아보거든요. 그러니 오래도록 연애를 안 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남자를 많이 만나봐야 나쁜 놈을 걸러 낼 줄도 아는 법입니다. ”
“그… 그렇겠지.”
아시카는 민망한 얼굴을 돌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잔느의 시선이 날카로워서 차마 마주 보기도 어려웠다.
‘잔느는 연애하고 애도 낳고 다 해봤으니까.’
아마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일 테지. 따가운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면서 이마에 배어난 땀을 닦아냈다.
‘르쉬아를 나쁜 놈이라고 욕 많이 했던 것 같은데.’
협의 테이블에서 거의 모든 비용부담을 아시카에게 떠넘기고 툭하면 탈탈 털어먹지 않았나.
물론 이그레인 입장에서는 새 발의 피도 안되는 부담이라 싸우느니 그냥 받아들이는 쪽을 택하곤 했었다. 하지만 남녀관계에서는 어떨까.
‘다정다감한 남자였는데.’
꿈속에서 본 드루쉬아는 강인하고도 세상에 다시 없을 만큼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였다.
“아….”
심장에 싸르르한 통증이 일었다.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아니, 아니야. 그냥 좀.”
드루쉬아를 생각할 때마다 제 몸에서 보내오는 신호가 생소하다. 아시카는 가슴 언저리를 문지르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오늘따라 잔느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져서 탁 트인 마차조차 불편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아시카는 잔느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