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52화 (52/153)

#52.

“문 열어, 빨리!”

남자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문손잡이를 흔들었다. 낡은 오두막에서 그 소리는 제법 크게 진동했다. 깊이 잠들었던 사람들은 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간신히 잠에서 깨었다.

“새벽부터 뭔 일이야. 어이쿠, 이게 누구야?”

“들어가, 빨리 들어가라고!”

남자는 문이 열리자마자 상대를 안으로 밀어 넣으며 따라 들어갔다.

잠에서 깬 사람들이 이쪽저쪽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지고 누군가 등잔에 불을 붙였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잠들었다가 막 깨어난 참이었다.

남자는 밝아진 내부를 훑어보았다.

“다들 어디 갔어? 나랑 같이 간 녀석들은?”

“그야 같이 간 네가 알지, 우리가 어찌 알아?”

“안 돌아왔어? 누구 소식 전해준 사람은?”

남자는 파리한 낯빛으로 재차 되물었다. 이제 오두막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일어나 남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일주일 전에 자네랑 나간 게 다야. 그렇지않아도 왜 이렇게 소식이 없나 다들 궁금해했어.”

맥이 쭉 빠진 남자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말이… 사실이었어.”

잡힌 동료는 독에 죽었고, 그날 저택에서 빠져나간 동료는 의뢰자에게 당한 것이 분명하다. 이 일에 동원된 일곱 명 중 살아 돌아온 것은 남자뿐이었다.

“악독한 것들….”

남자는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니, 이 사람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놀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의 채근에도 남자는 입을 열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 슬픔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쿵, 콰당.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낡은 잠금쇠가 거친 발길질 한 번에 맥없이 떨어져 나가 버린 것이다.

“흐억.”

“뉘, 뉘시오!”

놀란 사람들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울고 있던 남자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러났다.

“여긴 뭐야?”

“저, 저 사람!”

남자가 희게 질린 얼굴로 애거나이트를 가리켰다. 탈리온 저택에 있던 내내 그를 심문했던 사람이니 몰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겁에 질린 남자보다 애거나이트는 더 놀란 얼굴이었다.

중심가에서 한참 떨어져 폐건물이 모여있는 외곽지역. 사람이 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이었다. 창문 틈 사이사이를 모조리 천으로 막아 등잔 빛조차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 은신처였다.

“애거나이트, 안의 상황은?”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애거나이트의 정신을 환기했다.

“위험은 없어 보입니다.”

애거나이트가 문 옆으로 비켜서자 이어 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무슨….”

안으로 들어선 드루쉬아 역시 애거나이트와 마찬가지로 말을 잃었다.

포로에게서 쓸만한 정보를 얻지 못하자 드루쉬아는 처벌하는 대신 놓아주는 쪽을 택했다. 잡힌 남자가 어수룩해 보였던 탓이다. 차라리 뒤를 쫓아 연결점을 찾는 것이 나을 거란 판단이었다.

그런데 막상 남자가 도망쳐서 찾아간 장소는 상상도 못 할 곳이었다. 악당의 은신처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낡고 허름한 장소와 겁에 질린 사람들.

“여기는 탈리온의 기사들이 에워싸고 있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러니 지금 상황을 누가 설명할 텐가?”

탈리온이라는 말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탈리온 공작가?”

“혹시….”

“공작님? 탈리온 공작님이 아닙니까?”

가장 구석진 곳에 있던 젊은 청년 하나가 달려 나왔다.

“맞군요. 이 보게들, 탈리온 공작님이셔!”

상황이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드루쉬아는 미간을 한껏 좁혔고 애거나이트는 검을 쥐려던 손을 내렸다.

“나를 아는가?”

“몇 년 전 대공령에 오셨을 때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훤칠한 키와 밝은 금발, 수려한 외모를 지닌 드루쉬아는 기사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다.

“대공령? 자네가 대공령에서 왔다는 말인가?”

“저뿐만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대공령에서 왔습니다.”

상대의 대답에 드루쉬아의 눈이 확 커졌다. 청년은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읍소했다.

“공작님,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저희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대공령 밖으로 나왔다가 꼼짝없이 발이 묶였습니다.”

“설명해라.”

드루쉬아는 상대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머뭇거리던 청년은 겁에 질려있는 동료들을 슬쩍 보고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대공령에는 오래전부터 타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병이 있었습니다. 치료법을 찾을 수 없어서 병에 걸린 이들만 따로 모여 살았지요.”

그건 드루쉬아도 알고 있는 정보였다. 이번에 구빈원에서 치료받다가 도망친 이들이 그 마을 출신이었다.

“원래 이 병은 전염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환자가 늘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병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전염되고 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만,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환자가 늘고 있습니다.”

드루쉬아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청년은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절박하게 말을 이어갔다.

“분명히 병이 번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구빈원에도 대공령 출신이 아닌 외지인이 같은 병으로 치료받으러 온 걸 봤습니다.”

“자네, 구빈원에도 있었나?”

청년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드루쉬아의 표정을 확인하곤 다시 납작 엎드렸다.

“실은… 여기 있는 사람들 반이 구빈원에서 도망친 이들입니다.”

“하.”

“죄송합니다. 죄를 지었다는 걸 알지만 저희도 살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냥 죄가 아니라 황명을 어겼지.”

서늘한 어조에 청년은 차마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리 살고자 저지른 일이라도 황명을 어긴 죄는 크다. 꼼짝없이 처분만 기다리게 된 사람들이 슬금슬금 구석으로 몸을 물렸다. 그걸 바라보는 드루쉬아의 표정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같은 병에 걸렸다는 외지인은 어디 출신이었나?”

“그건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런데 외지인인지는 어찌 알아?”

“억양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옷차림이 허름한데도 평민처럼 보이지 않았고요. 허물없이 구빈원 사람들과 섞여 있는 걸 보고 모두 의아해했습니다.”

청년의 설명에 애거나이트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그놈 어떻게 생겼어?”

“아, 예. 20대 초반쯤 되는 청년이었는데, 회색 머리에 눈은 청회색이었고….”

“그 새끼, 구빈원에서 도망친 놈이었어?”

애거나이트가 버럭 내지른 고함에 청년이 놀라 움찔했다.

“각하,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하, 그놈이군.”

동선이 뻔한 아시카 옆에 뜬금없이 이상한 놈이 붙었다. 내내 이상하다 했더니 거기에 접점이 있었다. 구빈원 화재사건 때 이그레인의 마차를 타고 도망쳤다는 놈. 나일이라 불리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어쩐지 그 얘기만 나오면 피하는가 싶더니.’

그렇지않아도 수상쩍은 놈이었는데 알고 보니 더 수상하지 않은가.

‘그 여자 제정신이 아니군. 어쩌자고 그런 놈을.’

청년은 드루쉬아와 애거나이트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대공령은 수년째 가뭄이 들어 점점 더 척박해지고 있습니다. 환자가 늘면서 인심이 흉흉해지고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대공령을 빠져나와 주변 소도시로 흩어졌지요. 그리고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은 수도에서 왔다는 치료사의 말을 듣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그렇게 대공령을 이탈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무리를 만들었다. 개중에 몸이 날래고 검을 다룰 줄 아는 이들이 잡다한 일들을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꽤 많은 보수를 받고 정체불명의 의뢰를 맡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잠입하게 된 곳이 탈리온 공작저였다.

몰래 숨어지내고 있어서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들. 그런 이들을 탈리온 저택에 밀어 넣고,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은 재빨리 처리해 흔적을 지웠다. 누구도 캐묻지 못하리란 걸 알고 저지른 짓이었다.

드루쉬아는 말없이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대공령의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양쪽 가문에서 파견된 인원은 제한되어 있었고 드넓은 대공령 전체를 관리할 수는 없었던 탓이다.

특히 대공령 안쪽 마을까지는 살피지 못했다. 봉쇄가 풀려야만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대들은 황명을 어기고 대공령을 이탈했네. 그 죄가 얼마나 큰 줄 아는가?”

엄중한 어조에 방에 있던 사람들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황명을 거역하는 것은 반역에 준하는 죄. 대공령에 관한 한 황실은 더더욱 가혹하게 죄를 물었다.

드루쉬아의 입술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굳어진 얼굴로 결론을 내렸다.

“지금 바로 마차를 구해줄 테니, 기사들의 호위를 받아 대공령으로 돌아가라.”

“네?”

“공작님, 저희는….”

“또다시 탈주를 시도하는 자가 있다면 그 즉시 치안대로 보내버릴 테니 유념하고.”

덧붙여진 말을 듣고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드루쉬아는 그 말만을 남기고 건물을 나섰다.

“애거나이트.”

“네, 각하.”

“저택의 비밀 통로를 완전히 봉쇄할 때까지 안과 밖의 경비를 강화하도록 해.”

남자가 저택에 출입했던 비밀 통로는 수십 년도 더 전에 사용이 중단되었던 곳이다. 탈리온의 사람들마저 잊고 있던 장소를 이용해 보란 듯이 저택을 휘저었다.

‘이번 일을 주도한 건 탈리온에 대해 잘 아는 놈이야.’

어쩌면 생각보다 더 오래 탈리온을 주시해온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목적이 뭐였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명확한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네가 직접 인솔해서 한 명도 빠짐없이 대공령으로 돌려보내.”

지난번 탈리온의 기사에게 잡힌 도망자도 대공령으로 보냈다. 치안대로 보내봐야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방치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직접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기사들 몇 명을 차출해서 문제가 되는 마을부터 조사를 시작해. 그동안 미뤘던 처벌을 대신한다고 생각하고 임무를 수행하도록. ”

아시카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떠올리고 애거나이트는 수긍했다.

대놓고 황명을 어기는 일이었다. 도망자들 모두 치안대로 넘기고 법대로 처리해야 하지만 드루쉬아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반역죄로 내쳐진 채 보살핌을 받지 못해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었다.

‘멀쩡한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살겠다는 사람들을 잡아 족치는 황명이라.’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드루쉬아는 동터오는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40년은 너무 길지 않은가.”

반역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혹은 어딘가를 응징한다고 하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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