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51화 (51/153)

#51.

아시카는 달리 대꾸할 말이 없다는 게 억울해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게 조건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잊었어요? 공작님은 탈리온이고 저는 이그레인이에요. 세상 여자가 모조리 씨가 말랐다 해도 이그레인은 아니라고 외치던 분이 제게 왜 이러세요?”

“아, 그랬지.”

분명 그가 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그래서 뭐가 어떤데, 하는 표정이었다.

“그거야 당신과 자기 전에 했던 생각이었지. 이렇게 잘 맞을 줄 누가 알았겠어?”

“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드루쉬아의 태도가 너무 뻔뻔해서 아시카는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기에는 낯뜨겁지 않아요?”

“나는 실리주의자야. 필요와 조건이 바뀌었는데 그깟 말 한마디에 발목 잡힐 이유가 있어? 나도 여자를 원하는 신체 건강한 남자일 뿐이라고.”

그리고 눈앞에는 탐스러운 먹잇감이 놓여있었다. 맹수 앞에 통째로 바쳐진 사냥감처럼 손을 뻗으면 움켜쥘 수 있는 상대가. 그리고 반드시 그러고 싶은 여자가.

“탈리온의 기사와 가신들이 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요?”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 단지 화를 쏟아낼 대상이 필요한 것뿐이지.”

“결국 같은 말이잖아요.”

“그래서 더 하는 말이야.”

드루쉬아의 표정이 차게 가라앉았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아시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제 반목은 멈추는 것이 어떨까 해. 그 시작이 우리 둘이 될 수도 있겠지.”

급작스러운 생각이 아닌 듯 드루쉬아의 표정은 진지했다.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를 괴롭히는데 골몰하는 줄만 알았지 이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다.

“이미 오래전부터 양쪽 가문은 혼맥을 원해왔어. 서로의 필요에 맞는 일이기도 했고.”

“그 끝이 어땠는지도 기억하시겠네요.”

아시카의 조부 웨이브와 드루쉬아의 조고모 반느의 결혼. 그 때문에 웨이브의 정인과 아이가 죽고 반느 또한 목숨을 잃었다. 온갖 의문을 남기고 비극으로 끝나버린 결혼이었다.

“레이디 이그레인, 혹시 숨겨둔 정인이나 아이가 있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해요?”

“그래 그럴 리 없지.”

아시카의 질겁한 얼굴에 드루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건 없어. 알다시피 건강한 몸과 공작이라는 막대한 지위뿐이지.”

“이 제안이 정말 공작님 가문을 위한 일인가요? 개인의 욕심이 아니라?”

“어느 쪽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지?”

진심으로 드루쉬아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제 아시카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제국의 제일 검이자 방패인 탈리온. 그리고 가문을 위해 헌신하는 현재의 공작 드루쉬아. 아시카가 가문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고 훈련해 온 것처럼 그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뭐야. 이 태도는.’

“왜 그런 눈으로 보지? 내가 이런 놈인 거 이제 알았어?”

남들이 뭐라건 상관없었다.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놈이라고 욕해도 드루쉬아는 개의치 않았다.

부모를 잃고 홀로되었던 어린 시절, 유일한 혈육인 네오렌은 이민족과의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홀로 방치된 어린 소년은 맹수 우리에 던져졌다.

후계자를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다가와 호시탐탐 뜯어먹을 기회만 노리던 방계의 혈족들.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운 시간을 홀로 견뎌왔다.

가문이 중요하다 한들 그것이 누구를 위한 가문일까. 조부인 네오렌을 제외한 피붙이가 모두 죽었다. 그러니 홀로 남은 아이에게 가문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나.

드루쉬아에게는 가문보다 권력이 중요했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가신들보다 저를 위해 헌신하는 기사들이 더욱 중요했다.

그러니 타인의 시선 따윈 애당초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그보다는 제 욕심이 더 중요했다. 물론 거기에는 자신의 위치를 견고하게 지탱해 줄 힘과 권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였다. 이그레인을 적대하는 것보다 제 손에 넣는 것이 막대한 이득이라는 걸 드루쉬아는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실리와 상관없는 감정적인 문제들뿐, 계산은 진작에 끝나 있었다.

“아하, 하.”

아시카는 진심으로 드루쉬아가 존경스러워졌다. 본래도 계산적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철저할 줄이야.

“그래서 대답은?”

답을 재촉하는 시선이 은근하다. 단 두 번의 밤이 각인시켜놓은 은밀하고도 깊은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을 넘어서는 기묘한 열기.

‘왜 일이 이렇게 되는 거야.’

분명 싫지 않았다. 아니, 드루쉬아가 내보이는 감정이 설령 욕망일 뿐이라 해도 좋았다. 아시카의 마음은 진작부터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드루쉬아의 곁에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제 심장을 빼앗긴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런 아시카에게 내밀어진 달콤한 유혹.

드루쉬아를 만나고 싶다. 가까이서 그를 보고 애칭을 부르며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이면서. 그렇게 이 감정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앞을 가로막는다.

‘우리가 꿈속에서처럼 가까워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것은 꿈이 아니게 되었다. 과정은 다르지만 결국 두 사람은 이렇게 엮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꿈들도 무시할 수 없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아시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속절없이 끌려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숨을 몰아쉬며 독하게 냉정을 되찾았다.

드루쉬아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아시카의 얼굴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너무 솔직한 얼굴이라 갈등하는 마음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뭘 고민하지? 겁도 없이 먼저 나를 유혹해놓고?’

이제 와서 망설이는 아시카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무슨 대답을 하려고.’

마침내 생각을 정리하고 아시카가 입을 열었을 때, 드루쉬아는 긴장한 나머지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제안, 못들은 걸로 할게요. 공작님과 저는 맞지 않아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맥이 탁 풀리면서 드루쉬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시선에 아시카의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남자의 얼굴이 무시무시하다. 침묵으로 상대를 압박하려는 거라면 대단히 효과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화…났나 봐.’

그렇다고 이미 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아시카는 짓눌린 침묵 속에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었다.

“제 대답을 무를 생각은 없어요. 내주신 옷과 장신구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로 돌려드릴게요.”

아시카는 정리를 끝냈다. 마음속에는 질척한 감정이 넘쳐나지만 한 방울도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토독, 톡, 톡.

길게 뻗은 드루쉬아의 손가락이 느리게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아시카는 한번 입을 다물면 절대 다시 열지 않는다. 짧은 시간이지만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성격을 면밀하게 파악했다. 무른 구석이 있지만 단호할 때는 가차 없는 여자.

‘몰아붙인다고 될 문제가 아니야.’

드루쉬아는 물러나야 할 때를 알았다. 그래서 화제를 바꾼다는 것이.

“근데 무슨 악몽을 그렇게 심하게 꾸나? 자주 그래?”

아시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버리는 모습에 오히려 드루쉬아가 놀라고 말았다. 그가 당황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시카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그러기를 얼마간, 얼어있던 검은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하얗게 탈색된 얼굴에는 눈곱만큼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데 두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요동쳤다.

“캐묻는 건 아니고, 그대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드루쉬아는 더듬더듬 말을 뱉었다.

그의 시선 끝에서 딱딱하게 굳어진 작은 입술이 억지로 잡아뗀 것처럼 열렸다. 입이 열리고도 목소리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녀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몸뚱이를 빌린 것처럼 억지스럽다.

“이제 더는, 제가 여기에 머물 이유가 없겠죠? 실례를 무릅쓰고 시가지까지만 마차를 빌리도록 할게요.”

아시카는 고개를 떨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늘 끝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차게 얼어붙었다. 조금 전까지 당황하고 발끈하며 그에게 휘둘리던 여자가 아니라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도도하고 단호한 레이디 이그레인으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원점이구나.

테이블 모서리를 쥔 커다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그러나 드루쉬아의 파란 눈동자는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고 뜨겁게 타올랐다.

* * *

창문이 없는 방은 차고 어두웠다. 벽에 걸린 등은 하나밖에 없었고 방의 절반이 창살에 가로막혀 있었다.

그 너머에 있는 남자가 불안한 얼굴로 몸을 움직였다. 칼에 찔린 옆구리를 움켜쥐고 저를 노려보는 시선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움찔거렸다.

“누, 누구십니까?”

“네가 겁 없이 뛰어든 곳이 어딘지 알잖아. 그러니 내가 누구겠어?”

창살 밖에서 애거나이트는 팔짱을 끼고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시치미 뗄 걸 떼야지. 감히 공작저에 쳐들어와서 난리를 피운 게 누군데 딴소리야?”

“고, 공작저라뇨?”

“하, 이놈 보게?”

남자는 핼쑥해진 얼굴로 애거나이트의 시선을 피했다.

“네놈 동료들은 독을 먹고 이미 저세상으로 갔어. 버텨봐야 도와줄 사람도 없거든?”

“독이라뇨? 동료들이 왜….”

“잡혀 온 건 셋인데 남은 게 너 하나야. 누가 식사에 독을 타서 한 방에 갔지. 우리가 배후를 캐기도 전에 말이야. 이쯤 되면 알만하지 않아? 네 목숨도 바람 앞에 등불이라고. 네가 살 길은 빨리 실토하고 각하의 선처를 구하는 것밖에 없어.”

동료들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남자의 얼굴이 꺼멓게 죽었다.

“누구 사주를 받았어? 얼마나 대단한 놈이 시켰길래 겁도 없이 여길 쳐들어와? 감히 탈리온 공작저를.”

“모,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벼랑 끝에 내몰렸다는 걸 깨닫고 남자가 넙죽 엎드렸다. 찢어지게 아픈 옆구리의 통증이 문제가 아니었다. 기대와 다른 태도에 애거나이트의 얼굴이 구겨졌다.

“모르긴 뭘 몰라?”

“저희는 그저 사소한 의뢰를 받았을 뿐입니다. 의뢰자가 누군가의 집에 몰래 들어가야 하는데 동행해달라고요. 다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해서 따랐을 뿐입니다.”

누구의 집인지, 뭘 하려는 건지 말해주지 않았다. 커다란 짐마차에 실려 이동했고 비밀 통로 같은 곳을 지났다.

저택에 들어온 뒤에야 이곳이 탈리온 공작저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경악했던지. 그러나 그때는 이미 기사들이 검을 들고 달려들고 있었다. 그렇게 남자와 동료들은 황망하게 칼받이가 되었다.

남자는 엎드린 채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바닥에 놓인 손이 덜덜 떨려서 들어 올리지도 못했다.

“주치의가 애써 살려놨더니, 이건 뭐.”

애거나이트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쓸모없을 줄은 알았지만 설마 저희가 어디에 숨어들었는지조차 몰랐을 줄이야.

꼬박 이틀을 더 남자를 추궁했지만 알아낸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문을 한다거나 생명을 위협하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갇혀 있는 내내 불안에 떨어야 했다.

감히 공작 가문의 본가에 침입했다. 탈리온을 상대로 설마 그런 일이 가능한 줄도 몰랐다.

이제나저제나 불안해하던 사흘째, 남자는 저택의 지하가 아닌 지상에 있는 작은 건물로 옮겨졌다. 내내 그를 심문하던 애거나이트도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탓에 모두의 관심에서 밀려난 모양이었다.

남자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허름한 창고는 사용하지 않는 곳인지 모든 것이 낡아 있었다. 창고로 옮겨지고 이틀째, 숨죽이고 있던 남자는 살금살금 내부를 뒤졌다.

‘문이다!’

쌓여있는 잡동사니 뒤로 숨겨진 뒷문을 발견한 것은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었다.

달도 뜨지 않은 깊은 밤, 남자는 창고 주변이 고요해진 시간을 노렸다.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날만한 쪽문을 지나 본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정원 구석으로 향했다.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오래되어 색이 바랜 조각상과 울타리처럼 주변을 에워싼 정원수, 바닥에는 붉은빛이 도는 판석을 깔아놓은 장소였다.

‘찾았다!’

개중에 가장 바깥쪽 덤불에 가려있는 판석을 찾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 아래에는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구덩이의 벽 쪽에는 철제 손잡이 같은 것이 층층이 박혀있었다.

남자는 처음 들어왔던 그대로 통로를 이용해 저택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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