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50화 (50/153)

#50.






‘그냥 꿈을 꾸는 게 아니라면?’



세 번의 환각과 깨어져 버린 세 개의 보석.



황궁에서 발견했던 첫 번째 보석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지만 분명 본 기억이 있었다. 유독 크고 선명했던 청보라빛의 그것을.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환각을 경험한 직후 펜던트의 보석이 깨진 것을 확인했다. 이것이 단지 우연일까.



처음에는 자신이 미쳐가는 줄 알았다. 저도 모르는 새 어떤 약에 중독된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그래서 혈족의 계보를 샅샅이 찾아본 것이다.





‘어쩌면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일지도 몰라.’



보석에 뭔가 힘이 있다면? 그녀가 직접 겪은 그것이 꿈이나 환각이 아니었다면?







「누군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일지도 몰라요.」







이븐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 울린다.



“레이디 이그레인?”



하얗게 질린 얼굴이 완전히 얼어붙어 반응하지 않았다. 드루쉬아는 목걸이 든 손을 내리고 재차 그녀를 불렀다.



“아시카?”



그녀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본능을 좇아갔다. 더는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과 함께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간신히 표정을 수습하고 드루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쯤은 생각에 잠긴 채, 반쯤은 차게 굳어진 채로.



“목걸이, 돌려줘요.”



드루쉬아는 더 고집부리지 못하고 아시카에게 목걸이를 건넸다. 차륵, 소리를 내며 하얀 손 위로 목걸이가 쏟아졌다. 아시카는 재빨리 손을 거둬 돌돌 말고 있는 이불 속으로 목걸이를 숨겨버렸다.



말없이 등 돌리는 아시카를 보면서 문득 드루쉬아의 머릿속에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저 보석,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그러나 아련한 기억은 시트를 온몸에 감고 가는 여자의 뒷모습에 홀려 밀려나고 말았다.





* * *



드루쉬아에게 아시카는 쉽지 않은 여자였다. 그런데도 늘 가슴 한구석에 못 박혀 마음 쓰이게 했던 여자.



그가 알기로 아시카는 한 번도 추문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남자라고는 지난 2년간 약혼자 한 명이 고작이었는데 그나마도 유명무실한 관계였다. 그녀에게 남자가 없었다는 건 자신이 직접 확인했지 않은가.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아시카의 삶이 이해되었다. 불과 여덟 살의 나이에 가문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했을 테니까.



드루쉬아나 아시카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쪽 공작 가문의 유일한 직계 자손이자 후계자로서 숨 쉴 틈 없이 살아왔을 지난 14년. 으르렁대면서도 끝끝내 미워할 수 없는, 오히려 아픈 손가락처럼 서로를 가슴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던 그런 관계.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긴장이 마침내 깨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불쾌하지 않았고 오히려 희열에 가까운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연애경험도 남자 경험도 없었던 여자가 스스로 그의 품에 안겼지 않은가. 그래서 날이 밝은 뒤 아시카가 어떻게 반응할지 몹시 궁금했다.





‘수줍어하거나 당황할 줄 알았더니.’



그가 예측한 어떤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여상한 얼굴로 ‘배고파요.’, ‘옷 좀 줘요’라고 요구사항을 전달할 뿐.





‘내가 잘못 알고 있었어. 이렇게 뻔뻔한 여자였다니.’



그런 생각에 테이블 너머 아시카의 얼굴을 보았다.



“뭘 그렇게 빤히 봐요? 배고프지 않아요? 아니면 제가 기절해있는 동안 공작님께선 식사를 한 건가요?”



“설마. 그 상황에서 혼자 식사를 할 만큼 내가 파렴치한으로 보이나?”



“아니요. 그럴 리가요.”



단호한 대답에 오히려 드루쉬아가 민망해졌다.





‘날 싫어했던 게 아니었나?’



호의적이면서도 어려워하지 않는 태도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드루쉬아 역시 몹시 허기가 졌다. 그런데도 잘 먹고 있는 아시카를 보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는 기분이었다.



붉은 입술에 잘게 잘린 고기 조각이 들어가고 오물거리다가 와인을 입에 머금는다. 붉은 와인이 입술을 촉촉이 적시고 잘 구워진 줄기채소를 입에 넣고 또 오물거린다.





‘예쁘게도 먹는군.’



챙, 조르륵.



주석 주전자가 와인잔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드루쉬아는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시중드는 사람이 없다 보니 자칫 술을 쏟을 뻔했다.



언제부턴가 드루쉬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와인만 들이켜고 있었다. 뒤늦게 자신이 반쯤 넋이 나간 걸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식사를 마친 뒤, 아시카는 디저트로 준비된 달콤한 푸딩까지 말끔히 먹어치웠다.





‘하, 이제야 살 것 같아.’



아시카는 눈알을 데구르륵 굴리며 자신의 머리가 온전히 돌아가는지 되짚어 보았다. 지나치게 말짱해서 그녀가 착각했던 행동들이 명쾌하게 정리가 되었다.





‘확실히 지금은 제정신이야.’



이제는 상황을 수습해야 할 차례다.





‘얼굴에 구멍 뚫리겠네.’



저에게 못 박힌 따가운 시선을 한시바삐 치워버리고 싶었다. 비장하게 결심을 하고 타는 듯한 목을 축이기 위해 물을 들이켰다.



“잘하면 임신했을 수도 있겠어, 레이디 이그레인.”



“푸흡, 콜록.”



아시카는 냅킨으로 입을 틀어막고 격하게 기침을 토했다.



그냥 실수였다고, 조용히 각자 갈 길을 가자고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드루쉬아는 면전에 대고 강수를 날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대놓고, 콜록.”



“남녀 사이에 일이 벌어졌는데 당연한 가정이 아닌가?”



드루쉬아는 그 문제를 조심하지 않았다. 그래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아래를 제 것으로 채워 넣는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을 만큼 쾌감을 느꼈다. 저도 알지 못했던 감정이 그를 부추겼고 지금도 그 점에서는 후회하지 않았다.



“하아… 이것 보세요, 공작님. 물론 우리가 선을 넘은 건 사실이지만, 그 한 번으로 덥석 애가 생기지는 않아요.”



아시카는 이미 그 문제에 대해 빠르게 계산을 끝낸 터였다.



“한 번이라고? 내가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그걸 한 번으로 쳐버리면 곤란하잖아.”



“물론, 한번은 아니었죠, 횟수로 치면야 온종일… 아니, 지금 공작님이 저랑 몇 번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아시카는 들고 있던 냅킨을 움켜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아시카와 달리 드루쉬아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 있었다.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시카는 숨을 가다듬고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이 남자, 날 놀리는 거야.’



자꾸 허를 찌르는 것이 역시나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려들지 말자. 저 남자에게 말려들면 안 돼.’



드루쉬아는 은근히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아시카가 흥미로웠다. 그녀가 먹는 것만 보고 있어도 즐거웠고, 이렇게 말을 섞고 있는 것도 즐거웠다.





‘그동안 저 여자를 괴롭혔던 게 싫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였었나?’



퍽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아시카를 상대로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어느새 홀려있는 자신이 있었다.



“공작님, 빠르고 간단하게 요점만 정리할게요.”



아시카의 입에서 공작님 소리가 나오자 드루쉬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서로 한 번씩 치고받은 것으로 빚을 정리하죠.”



“뭐?”



“그렇잖아요. 시작은 제가 한 게 맞아요. 인정해요. 하지만 오늘 일은 아무리 봐도 공작님 쪽에서 그런 거니까. 서로 공평하게 한 번씩… 저지른 거라고요.”



아시카는 우아하게 손을 내밀어 그를 가리키고 자신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내가 덮쳤지만, 다음에는 당신이 덮쳤잖아.’라는 의미였다.



드루쉬아의 낯빛이 서늘하게 굳어졌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나를 유혹했어. 그런데 이렇게 말 몇 마디로 정리해버리겠다고?”



“처음부터 제 의도가 아니었어요. 그날 일은 술에 취해서 저지른 실수라고요.”



“겨우 와인 반병에? 설마 내가 누군지도 못 알아봤다는 거짓말을 하려는 건가?”



“그, 그래요. 낮에 받은 충격도 있었고, 그날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하! 정말로 그래? 내가 누군지 몰랐다고?”



드루쉬아는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이며 아시카를 노려보았다.



술에 취해 저지른 하룻밤의 실수. 그럼 그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몸서리가 쳐질 만큼 불쾌한 감정이 솟구쳤다.



“당신의 옷을 벗기고 입을 맞추고 당신의 다리를 벌리던 사내가 누군지 몰랐다고? 내 것을 아래에 박고 좋아서 소리 질러댔던 주제에 내가 누군지 몰랐다고? 정말 그래?”



“그, 그만요!”



아시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적나라한 설명에 침대에서 뒹굴었던 기억이 휘몰아쳐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분명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어.”



내내 ‘르쉬아’라고 속삭이던 달콤한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쾌감에 젖어 숨을 헐떡이면서도 끊임없이 그를 불러대던 목소리를.



“대범하게 나를 유혹해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양 도망가는 건 곤란해. 하룻밤 놀이 상대를 찾은 거라면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나는 이그레인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릴 마음이 없거든.”



아시카는 입술을 질끈 말아 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요. 복잡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최대한 빠르게 정리해드리는 건데.”



신체 건강한 성인 남녀가 저지른 일이다. 둘 사이의 긴장감이 순식간에 서로에 대한 욕망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벌어진 상황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중요한 건 이유를 따져 묻기보다 한시바삐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누가 정리해달라고 했나?”



“네?”



만약 사실이 알려지면 대외적으로 큰 추문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드루쉬아도 조용히 처리하길 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협조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니까 말인데, 당분간 이 관계를 유지하는 건 어때?”



“미쳤어요!”



아시카는 버럭 소리를 질러놓고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허물없어진 스스로의 태도에 놀란 탓이다.



드루쉬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반응에 그의 얼굴도 어이가 없어 보였다.



“그걸 굳이, 미쳤다고 표현할 거까지야.”



느긋하게 앉아있던 드루쉬아가 몸을 들썩이더니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몹시 기분이 상한 얼굴이었다.



“솔직히 따져보자고. 내 나이가 이제 겨우 스물여섯이야. 이 나이에 공작의 지위를 갖고 있지. 미혼에다 잘 생겼지, 돈 많지, 거기다 잠자리는 이미 겪어봐서 알잖아? 이런 남자와 만나는 게 미친 짓인가?”



“입이 상당히 뻔뻔하시네요. 보통은 낯 뜨거워서라도 그렇게 자기 자랑을 줄줄이 입에 올리기는 쉽지 않잖아요?”



“이런 남자가 만나자는데 미쳤다고 말하기도 쉽지 않아.”



물론 드루쉬아는 충분히 그렇게 말할 만한 위치에 있었다. 자신감이 넘쳐 흘러야 마땅한 인물이기는 했다.



“당장 답을 내릴 게 아니라, 일단 서로 두고 보는 게 어때? 잠자리 파트너가 이렇게 잘 맞기도 흔치 않아. 아니면 나 말고 그 새 다른 놈이라도 생겼어?”



입은 웃고 있지만 눈매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아시카는 기막혀하면서도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가렸다.



“무슨 말이에요? 그런 거 없어요.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오호라, 그럼 처음이나 지금이나 나뿐이라는 거네?”



드루쉬아는 흡족한 얼굴로 입매를 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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