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49화 (49/153)

#49.

“왜 그래, 악몽을 꾸었어?”

“흑… 르쉬아, 당신이… 당신이….”

드루쉬아는 기묘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토닥토닥, 아시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왜? 죽기라도 했어?”

흐느끼던 아시카가 울음을 터뜨렸다. 서러운 듯, 두려운 듯,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흐윽… 르쉬아.”

애절한 목소리가 그의 심장을 사정없이 흔들어댄다.

대체 무슨 꿈을 이리도 실감 나게 꾼단 말인가. 마치 조금 전 죽음을 겪고 온 사람처럼 검은 눈동자는 격하게 흔들렸고, 그녀의 흐느낌은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절망적이었다.

“괜찮아. 꿈이야. 악몽일 뿐이라고.”

드루쉬아는 안심하라고 속삭이며 재차 그녀를 다독였다.

“르쉬아…, 르쉬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여행자처럼, 죽음 앞에서 신을 부르는 사람처럼 아시카는 절박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얼굴을 더듬고 살아있는 그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몸을 더듬었다.

“아아… 르쉬아….”

“아시카…, 흡.”

드루쉬아가 당황한 찰나,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이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입술을 포갰다. 축축하게 젖은 뺨과 눈물에 젖은 입술이 짭짤하다.

아시카는 매달리듯 그의 입맞춤을 갈구했다. 짧은 망설임 끝에 드루쉬아는 거부하지 않고 그녀의 요구에 응했다.

입속으로 파고든 혀가 얽히고 타액을 집어삼키며 서로의 입술을 짓눌렀다. 뜨거운 피가 돌며 지난 며칠 동안 억눌러왔던 욕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얇은 침의 아래 느껴지는 적나라한 몸의 굴곡. 커다란 손이 거침없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윽….”

바르르 떠는 여체가 그의 욕구에 불을 당겼다. 드루쉬아는 얇은 침의를 그대로 걷어 올려 벗겨버렸다. 몽롱하게 뜬 검은 눈동자가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하…. 그런 눈으로 보면….”

그를 미치게 만드는 눈동자. 드루쉬아는 아직 젖어있는 눈가를 혀로 쓸며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

“아시카…. 하아. 이대로는….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어버렸다. 이미 날아가 버린 이성에 더는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절박하게 매달리는 여자를 안아줘야 한다고, 그녀의 손길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그런 강렬한 유혹만이 남아있을 뿐.

드루쉬아는 그녀의 입술을 단숨에 집어삼키며 천천히 제 몸을 밀어붙였다.

뜨거운 호흡이 어딘가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답답해서 팔다리를 움직여보려 했지만 어딘가에 갇힌 듯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희고 매끄러운 피부였다. 그녀의 입술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맨살이었다.

조금 고개를 들자 단단하게 근육 잡힌 가슴과 일자로 쭉 뻗은 쇄골이 보였고, 강인한 사내의 목선을 지나 까칠하게 수염이 올라온 아래턱이 보였다. 날카롭고 잘생긴 턱이었다. 도톰하게 올라온 붉은 입술은 탐스러울 만큼 반질거렸다.

‘누구….’

불현듯 정신이 든 아시카가 몸을 빼려고 하자 그녀를 옭아매던 힘이 더욱 강하게 조여왔다. 더불어 아랫도리 깊숙한 곳에서 정체 모를 부피감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꿈틀거렸다. 가만히 있는데도 야릇한 감각이 퍼져나가 절로 신음이 흘렀다.

고개를 숙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의 아랫도리에 제 것이 아닌 무언가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깜짝 놀라 몸에 힘이 들어가자 아래쪽도 조여들었다.

“흑.”

“크윽… 아침부터 그렇게 조여 대면….”

굵직한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그러면서도 뭉근하게 퍼지는 저릿한 느낌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무슨, 누가….”

모로 누워있던 몸이 똑바로 위치를 잡으면서 덩치 큰 사내가 아시카의 몸 위에 올라탔다. 사내가 상체를 일으키자 위압적으로 느껴질 만큼 단단하게 근육 잡힌 몸이 그늘을 만들었다.

아시카는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잃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아예 반응할 본능조차 사라진다고 했던가. 온몸으로 저를 짓누르고 있는 사내가 드루쉬아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그가 완벽한 나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아시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얼굴 아래로 떨어졌다.

단단하게 각진 어깨와 잘 짜인 가슴근육, 군살 하나 없이 조각조각 근육으로 갈라진 아랫배, 잘 빠진 치골과 그사이 아랫부분에 금빛으로 무성한 음모.

그보다 더 아래 제 몸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야릇한 감각의 진원지가 있었다. 현실을 인지하기에는 지나치게 충격적이었고 외면하기에는 그녀의 정신이 너무나 또렷했다.

햇살을 받아 더욱 투명하게 빛을 내는 푸른 눈동자가 아시카를 내려다보았다.

“왜 놀란 얼굴이지? 어젯밤에는 그렇게 매달리더니 왜 혼자 충격받은 표정이야?”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 기분이 상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건 꿈이 아니야. 우린 밤새도록 사랑을 나눴어. 시트가 다 젖을 정도로.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아래가 느껴지지 않아?”

“그, 그만…!”

세상에나. 드루쉬아가 조목조목 집어주는 대로 아랫도리에서 축축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생생하다. 아시카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뻐끔거렸다.

반응이 돌아오자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어때 느껴져?”

그가 슬쩍 허리를 비틀자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것이 아시카의 몸속에서 움찔거렸다. 야릇한 감각이 아랫도리를 가득 채운다.

“흐으….”

아시카는 신음이 새어 나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신음이라니, 신음이라니!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경악에 찬 눈동자를 마주하고 드루쉬아는 엄중하게 말했다.

“지난번에도 당신이 먼저 시작해놓고 내빼버렸지. 내가 그렇게 쉬운 남자로 보였다면 천만의 말씀이야. 제멋대로 내 품에 날아들었다고 제멋대로 도망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포기해. 이번에는 그런 식으로 도망치지는 못할 거야.”

드루쉬아는 아시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삐딱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웃음이 더욱 진해진다.

“흐윽…자… 잠깐, 만, 공작님. 이건 뭔가 오해가….”

“왜 이렇게 부끄러워해? 우리의 첫날밤은 진작에 지나갔잖아. 지난번에, 당신이 미치도록 나를 집어삼키고 내빼버린 그 날.”

“오해예요. 오해. 내가… 설명을… 흐아악!”

둘 다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아닌데도 묘하게 대화가 이어졌다.

“아니라고… 요. 그건 실수… 꺄아악!”

“실수? 실수라고? 그걸 지금 실수라고 말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시도는 무산되었다. 드루쉬아는 온몸으로 그녀를 짓누르며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 아직 대화할 게 많이 남아 있잖아. 이….”

그는 진득한 시선으로 아시카를 내려다보았다.

“몸의 대화 말이야.”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에서 잔인해 보일 만큼 집요한 욕망이 어렸다. 아시카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믿기지 않아 망연한 얼굴이 되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 위로 슬쩍 스쳐 간다. 얼빠진 표정조차 기꺼워 못 견디겠다는 양. 드루쉬아는 살갑게 웃으며 느릿하게 허리를 추어올렸다.

당황한 아시카의 입술에서는 거부의 말 대신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지난밤 내내 그녀를 잠식했던 감각이 또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모든 의문과 생각을 날려버리는 강렬하고도 중독적인 감각이.

* * *

방안이 온통 진한 밤꽃향기로 가득했다. 비릿한 향기에 질식할 것 같은데도 드루쉬아의 태도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반쯤은 넋이 나간 채 아시카의 입술이 달싹이고 드루쉬아의 시선이 온통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긴장한 것도 같고 기대하는 것도 같았다. 마침내 기대하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배고파요.”

“아.”

드루쉬아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벌렸다. 문득 창밖으로 어둑해진 하늘이 보였다. 태양은 이미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벌써 이렇게 됐나?’

종일 한 끼도 먹지 않고 침대에서 뒹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런데도 숨이 죽지 않은 본능은 제 의지를 가진 양 꿈틀거린다.

그에 반응하며 움찔거리는 여자는 완전히 탈진해 있었다. 끝 모를 욕망은 이제 한 수 접어야 할 때. 발갛게 달아오른 아시카의 눈가를 보며 드루쉬아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크흠, 음. 기다려.”

그의 체력은 하루가 아니라 사나흘이라도 감당할 수 있겠지만 아시카는 진작부터 맥을 못 췄다.

드루쉬아는 떨어지고 싶지 않은 본능을 애써 누르며 아시카를 놓아주었다. 대충 옷을 걸쳐 입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미아와 시종을 불렀다.

아시카는 방문 너머에서 드루쉬아가 식사와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지시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몇 번 마실 걸 가져다줬었지.’

그녀를 괴롭히던 중간중간 마실 것을 가져다준 것은 드루쉬아였다. 물과 달콤한 음료. 기절할 것 같은 상황에서 달달한 걸 마시고 정신을 차리면 그새 또 덮쳤다.

드루쉬아에게 중독의 후유증이 남았으면 어쩌나 염려했는데 더 이상의 걱정은 필요 없었다. 어찌나 회복이 빠른지 아팠던 드루쉬아보다 그녀가 당장 쓰러질 지경이었다.

아시카는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했다.

‘꿈인 줄 알았는데.’

현실인 듯 생생한 꿈과 꿈인 듯 아련한 현실이 뒤죽박죽돼서 벌어진 어이없는 사고. 그러나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실수라고 말할 단계는 진작에 넘어섰다.

‘한 번이라야 실수지, 이건 뭐….’

아시카는 양 손가락을 세워 자신의 머리칼을 할퀴었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박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아아, 어떻게 해. 뭐라고 변명하냐고.’

달칵, 문이 열리고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시카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머리칼을 쥐어뜯던 손을 가만히 내렸다. 푸른 눈동자가 이상한 걸 다 본다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옷… 좀 줘요.”

언제나처럼 단정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내면은 마구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어떻게 방안에 속옷 한 장 남겨두지 않을 수 있어? 도망도 못 가게 홀랑 벗겨놓고 종일… 내 옷, 내 속옷, 이 변태 같으니!’

“입던 건 엉망이 돼서 치워버렸어. 새것으로 준비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보다 우리 할 얘기가 많지 않아?”

드루쉬아의 시선이 아시카를 위아래로 훑었다. 입가에는 왠지 모를 흡족한 미소를 띤 채.

아시카는 그의 얼굴을 슬쩍 보고는 눈알을 데구르륵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가진 거라고는 얇은 담요 하나가 전부. 최대한 우아한 몸놀림으로 담요를 끌어당겨 목과 팔, 몸통까지 돌돌 말아 감췄다. 누에고치처럼 얼굴을 제외한 모든 피부를 가리고 양발을 침대 아래로 슥 내밀었다.

드루쉬아는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찬찬히 지켜보았다. 야릇한 빛이 감도는 진득한 시선과 잔뜩 올라간 채 실룩거리는 입꼬리. 이 상황이 즐거운 것은 드루쉬아뿐이었다.

아시카는 부러 그를 외면하고 발을 바닥에 내디뎠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눈앞이 핑그르르 돈다.

‘하, 요즘 승마를 게을리했더니!’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드루쉬아가 순식간에 다가와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읏차. 건강하다고 들었는데, 이거 체력이 영….”

짓궂게 놀리려던 드루쉬아는 핏기가 싹 빠져나간 아시카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닫았다. 너무 창백해서 당장 기절할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이렇게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저라는 걸 깨닫고 놀릴 마음이 쑥 들어갔다.

“음, 아무래도 식사를 먼저 하고 씻는 게 좋지 않을까?”

“아뇨. 씻고 싶어요. 씻는 게 먼저예요.”

“미아를 불러줄까?”

“아뇨!”

이 민망한 상황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탈리온의 기사가 될 아이라니.

“미아가 서툴러서 불편하다면 다른 하녀를 불러줄 수도 있어.”

아시카는 빙글빙글 웃고 있는 드루쉬아를 노려보았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 거야?’

그녀를 적대하는 기사들이 우글거리는 탈리온의 저택이다. 누군가 둘의 관계를 알아차리고 소문이라도 내면 수도가 발칵 뒤집힐만한 추문이 될 터였다.

‘하, 내가 말을 말지.’

신경전을 벌일 만큼의 체력도 남지 않았다. 아시카는 진득하게 달라붙는 시선을 피해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데 차륵, 하는 작은 소음이 들렸다.

“음?”

그녀가 밟고 지나간 바닥으로 드루쉬아가 허리를 숙여 뭔가를 들어 올렸다.

“목걸이?”

“아!”

아시카는 제 목이 허전한 걸 느끼고 황급히 손을 내밀었다.

“내 거에요. 이리 내요.”

드루쉬아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외면하고 목걸이를 살폈다. 그렇지않아도 내내 궁금하던 참이었다.

“목걸이가 특이해.”

잘 모르는 드루쉬아가 보기에도 고위 귀족이 사용하기에는 투박한 디자인이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한시도 몸에서 떼놓지 않나 봐?”

“알 거 없잖아요. 돌려주세요.”

아시카는 당황했다. 알몸을 보였으니 목걸이 또한 당연히 봤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손을 피해 목걸이를 높이 들어 올리며 갸웃했다.“그때도 궁금했는데, 보석들이 쉽게 깨지는 걸 보면 진짜는 아니잖아? 왜 이런 걸 하고 다녀?”

“무슨 소리예요? 보석들이 깨졌다고요?”

“몰랐어? 지난번에도 깨져 있었는데.”

드루쉬아의 말대로 청보라빛 작은 보석 두 개에 거미줄처럼 미세한 균열이 가득했다.

‘왜 두 개야? 하나만 깨졌었는데?’

내내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았지만 딱히 목걸이를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터다.

“지난번에도 깨져 있었다고요? 두 개가?”

지난번이라면 이상한 환각을 경험한 직후였다.

‘아!’

불현듯 다가온 깨달음.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꽂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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