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드루쉬아가 깨어난 다음 날, 지하에 가둬두었던 침입자 셋 중 둘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내부자 색출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독에 당했습니다.”
애거나이트는 보고하면서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방법은?”
“저녁때 제공된 식사에서 독이 발견되었습니다.”
“하.”
상황을 파악할 틈도 주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꼬리를 잘라버리다니. 그나마 아직 살아있는 한 명은 부상으로 의식이 없는 탓에 목숨을 부지했다.
“그리고 사용인 셋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탁실 하녀와 허드렛일꾼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식사를 날랐던 하녀도 사라졌는데, 저택 후문 근처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그 외에 주목할만한 피해가 있나?”
“현재까지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침실 앞까지 숨어든 걸 보면 각하를 노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애거나이트도 말을 꺼내면서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드루쉬아는 집무실 의자에 지친 몸을 기댔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보고를 곱씹었다.
‘나를 노린 것 치고는 지나치게 빈약해.’
아무리 드루쉬아가 의식이 없다 해도 탈리온 공작가였다. 급습한 숫자가 터무니없이 적었다. 암습보다는 뭔가를 찾기 위해, 혹은 뭔가를 하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웠다는 쪽이 더 타당했다.
‘대체 그게 뭘까.’
그가 의식이 없을 때를 노려 얻으려고 한 무엇. 큰 충돌을 피하고 짧은 시간 안에 얻을 수 있는 어떤 것. 어느 모로 생각해도 답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남은 한 놈에게 주치의를 붙여. 반드시 살려야 해.”
이렇게 말끔히 뒷정리할 정도면 잡힌 놈 역시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지금으로선 남아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당분간 저택은 최소 인원으로 유지하고 조부님께 연락해서 영지 쪽에서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해.”
기사들과 오랫동안 탈리온을 섬겨온 이들을 제외하고 공작저에 근무하는 사용인 대부분을 교체하기로 했다. 그중에서 연결된 가문이 확실하고 무해 하다고 판단되는 사용인들은 본채업무에서 제외하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칼프, 회신은 받아 왔나?”
“네. 여기 마이헬러 후작의 인장이 찍힌 회신입니다.”
드루쉬아가 깨어나자마자 칼프에게 가장 우선으로 처리하라고 지시 내린 일이었다. 마이헬러 후작가에 파혼을 통보하는 것.
서류를 받아들고 드루쉬아는 빠르게 내용을 확인했다.
“다른 언급은 없었고?”
“이미 예상했던 모양입니다. 후작께선 각하의 안부를 여쭙고 쾌차를 바란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셨습니다.”
황태후까지 움직여가며 질질 끈 것 치곤 포기가 빠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매달리다 양쪽 가문의 관계마저 악화될까 봐 한발 물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마이헬러 가문의 주치의에 대해 알아보도록 지시했습니다.”
“이그레인 주변에 대한 정보는?”
“그건 아직입니다.”
우선순위로 해야 할 일들이 넘쳐나서 이그레인은 잊고 있었다. 시원치 않은 대답에 드루쉬아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그것도 지급으로 처리해.”
“지금으로서는 레이디 이그레인과 자객들 사이에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시카가 드루쉬아를 살린 것은 사실이었다.
“나일이라는 놈은 아직도 입을 안 열어?”
그 질문에 안색이 변한 것은 애거나이트였다. 입을 안 열어서 문제가 아니라 실은 그 반대여서 골치가 아팠다.
“저, 각하.”
“왜? 감당이 안 돼?”
“이런 말 죄송스럽습니다만, 그놈 정말 보통이 아닙니다. 아주 그냥….”
생각만 해도 열이 뻗치는지 애거나이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는 별채의 객실에 넣었더니 시트에서 냄새가 난다고 갈아 달라, 씻을 수 있게 욕조를 채워달라, 혼자서는 못하니 시중들 사람을 보내라, 왜 손님 대접이 이따위냐 등등. 얼마나 달달 볶아대는지 하인들이 질색을 한다고 들었다.
혼쭐을 내려고 쫓아갔다가 어찌나 속을 긁어대던지. 너 따위는 세 합이면 찜쪄먹을 수 있다는 말에 머리끝까지 열이 뻗쳐서 검을 뽑을뻔했다.
“거기 휘말리는 네가 잘못이지. 아니면 칼프가 맡아보는 건 어때?”
드루쉬아의 제안에 애거나이트와 칼프 모두 입을 다물고 슬쩍 시선을 피했다. 칼프 역시 진작에 나일을 만나보았다. 그러나 나일은 한마디로 상황을 평정했다.
「아, 탈리온 공작의 양철 인형. 난 대화는 사람하고만 해.」
그리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고 한다.
“하, 하.”
정말 짜증 나는 놈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그놈에 대한 정보는 이그레인을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만, 확실한 건 검을 다루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쪽 기사들이 밀리는데 그놈이 나서서 도왔다지? 그놈 검에 피 한 방울 안 묻혔다고 들었어.”
“네.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구해줬답니다.”
진검을 들고 사생결단을 내는 싸움에서는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더 어렵다.
‘귀족 출신인데 기사보다 더 검을 잘 다룬다, 라….’
그러면서도 기사가 아니라는 것에 의심이 들었다.
“내일 그놈을 풀어줄 거야. 몸이 빠르고 가벼운 녀석으로 뒤를 쫓게 해.”
“혹시 레이디 이그레인도 내보내는 겁니까?”
“아니.”
짤막하고도 단호한 대답. 더는 묻지 말라는 분명한 의사를 드러냈다. 애거나이트는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이지만 꾹 눌러 참았다.
3층 전체에 사용인의 접근을 막으면서 아시카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로 취급됐다. 아시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루쉬아가 깨어날 때 방에 들어왔던 기사들과 미아, 그리고 칼프뿐이다.
여성용 드레스와 물품을 구해오라는 긴박한 명령에 사용인들은 잠시 당황했다. 3층에 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접근이 금지된 탓에 호기심만 무럭무럭 키워가는 중이었다.
* * *
서신을 가지고 나갔던 나일은 이틀 만에 공작저로 돌아왔다. 아시카를 두고는 나가지 않겠다며 다시 별채에 눌러앉았다.
애거나이트는 필사적으로 그를 내쫓으려 했지만 손님으로 대접하라는 드루쉬아의 명령에 따라 별채에 하인을 배정할 수밖에 없었다.
드루쉬아가 탈리온 저택 안팎의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 아시카는 공작부인의 침실에 갇혀 있었다. 드루쉬아와 함께 중독되었던 킨빌이 깨어나자 아시카를 잡아둘 구실이 더는 없어 보였다.
아시카를 가둬둔 첫날 이후 드루쉬아는 다시 대화를 시도했지만 거부당했다. 방에 들어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아서 무작정 밀고 들어갔더니 다음에는 식사를 거부했다.
그가 제멋대로 구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고 못 박으며 얼굴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했다. 그 서늘한 태도에 드루쉬아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나야 했다.
‘아직 중요한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는데.’
당장 닥친 일이 급해서 그날의 일을 묻지 못했다.
왜 그를 유혹했는지, 그렇게 열렬히 받아들이고 왜 도망쳐버렸는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 건지.
‘조금만 살살 할걸.’
아무리 후회해도 차게 식어버린 아시카의 태도는 풀어질 줄을 몰랐다. 작정하고 벽을 세우는 느낌이랄까.
‘그래, 이게 정상이지. 그동안이 이상했던 거야.’
알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진한 아쉬움이 올라온다.
물러터진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그를 걱정하던 모습. 넘쳐흐르는 진심이 선명하게 느껴져서 그녀가 무슨 꿍꿍이를 품고 다가왔는지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큰소리 한 번 치지 못하고 화를 삭이던 모습조차 밉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 반대였다. 아시카는 사랑스러웠다. 귀족적인 가면을 쓰고 있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가식 없는 태도와 다치기 쉬운 섬약한 본성을 지닌 그런 여자.
굳게 닫혀있는 문을 노려보며 드루쉬아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주치의의 충고에도 사흘째 제대로 자지 못했다.
원인은 다름 아닌 저 문 너머에 있었다. 내보내 달라고 무언의 시위라도 하는지, 작정하고 그를 외면하는 여자 때문이었다.
‘젠장, 뭐가 이렇게 어려워.’
이제 그만 돌아가도 된다는 말 한마디면 된다. 그런데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헤어지면 두 사람의 관계는 예전으로 돌아가게 될까. 끊임없이 경계하고 서로를 적대하던 예전으로. 당연한 일인데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왜일까.
침대에 앉아 아시카의 방문을 노려보던 드루쉬아는 어느새 문 앞에 서 있었다. 이미 밤이 깊은 시간, 문 너머에서 움직이던 기척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잠이 들었을 텐데.’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유혹과 짧은 망설임. 다른 사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얼굴 한 번만 확인하고 나오자고, 그리 생각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잘 관리된 문이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불이 꺼진 어둑한 방에서는 전에 없던 향기가 흘렀다. 아시카의 향기였다.
예민해진 감각으로 그녀의 향기를 느끼고 묻어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침대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잠들어있는 여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창가에 스며드는 달빛만으로도 아시카의 존재감은 확연했다.
‘아니지. 아무래도 이건 아니야.’
드루쉬아가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흐….”
잘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르작거리는 몸짓이 불편해 보였다.
‘악몽을 꾸는 건가?’
“끄으….”
아시카의 숨소리가 이상하다. 목이 졸린 듯 끅끅거리며 진땀을 흘렸다. 감겨있는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레이디 이그레인?”
아시카의 몸부림이 점점 심해졌다. 덜컥 겁이 나서 드루쉬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정신 차려, 아시카.”
“끄헉!”
아시카의 눈이 확 떠지며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아아아악!”
다급한 숨을 헐떡이며 아시카의 입에서 공포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왜 그래! 진정해, 진정하라고!”
가녀린 여자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친 몸부림이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다치게 할까 봐 드루쉬아는 양팔을 잡고 몸으로 아시카를 눌렀다.
강제로 몸을 제압당하자 아시카는 비명을 멈추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지가 경련을 일으키듯 벌벌 떨리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흐윽…, 르…쉬….”
“쉬이…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르쉬아… 르쉬….”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진다. 어째서 이렇게 애절한 기분이 드는 걸까.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어서 드루쉬아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 있어. 아시카. 그러니까 울지 마.”
아시카는 그제야 드루쉬아의 존재를 의식한 듯 경직되어있던 몸에서 힘을 풀었다. 몸부림을 멈추자 드루쉬아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흐릿한 검은 눈동자가 드루쉬아의 얼굴을 확인하고도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시카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을 더듬는 손끝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르쉬아?”
드루쉬아는 불안해하며 더듬는 손길을 내버려 두었다. 공포에 질렸던 두 눈에 반가움과 안도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