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탈리온의 사람이었구나.’
그렇게 대놓고 가문의 사람을 그녀에게 보내다니.
“나 기억해?”
“물론입니다. 공작님께서 레이디를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도와드렸었죠.”
“미아라고 했지? 못 보던 얼굴인데 영지에서 온 거니?”
“네. 전대 공작님 아래 있다가 얼마 전에 수도로 불려왔어요. 내년 성인식 때 공작님께 기사서임을 받을 예정입니다.”
미아는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씩씩하게 말했다. 밝게 대답하는 소녀에게서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애거나이트하고는 완전히 극과 극이잖아.’
탈리온의 기사와 가신들 모두 이그레인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을까.
‘왜 나를 싫어하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씻고 옷을 갈아입으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이 저택에는 레이디가 없어서 여성용 드레스가 없답니다. 하인이 구하러 나갔으니까 씻고 나오실 때쯤엔 새 옷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그간 탈리온 저택에 드나드는 여자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 사소한 사실을 깨닫고 불편했던 아시카의 마음이 스르륵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식사는 이따가 방으로 가져올 거고요, 욕실에는 따뜻한 물을 준비해뒀어요.”
‘일단은 쉬고 나서 생각하자.’
아시카도 지금은 쉬고 싶은 마음이 컸다. 긴장이 풀리면서 당장 이 자리에서 기절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무심결에 욕실로 들어서는데 미아가 따라 들어왔다.
“씻는 건 돕지 않아도 돼.”
“레이디는 혼자서 씻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제가 서툴기는 하지만 혼자보다는 나으실 거예요.”
“아니, 정말 괜찮아. 자리를 비워줄래?”
요즘 들어 부쩍 누군가 시중을 들어주는 것이 불편했다. 하물며 낯선 이의 손이 닿는 것은 더욱 꺼려졌다.
“그럼 전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을게요.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세요.”
미아는 생글생글 미소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너무 웃어도 부담스럽네.’
이그레인과 탈리온이다. 적대하지만 않아도 감사할 판인데 과한 호의는 그것대로 편치 않았다.
공작부인의 침실이라더니 딸린 욕실 또한 크기가 상당했다. 은은한 신주 색에 사람 서너 명이 들어가도 좋을 법한 커다란 욕조에는 계절에 맞게 적당히 따뜻한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세상에 이런 날이 다 있네.’
탈리온의 저택에서 느긋하게 몸을 씻는 날을 상상이나 해 봤을까.
‘아니지. 여유 부릴 때가 아냐.’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드루쉬아를 상대하는 건 언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까. 몸을 씻으면서 아시카는 말랑해졌던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식사에 초대받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저녁까지는 그녀를 홀로 두었다. 덕분에 아시카는 종일 침실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그 사이 드루쉬아는 밀린 보고를 받고 샤프리와 노아가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어땠는지 그간의 행적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조부에게 몸이 회복되었다고 연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름 남짓 만에 눈을 뜬 첫날, 드루쉬아는 눈코 뜰 새 없이 업무를 처리해갔다. 그렇게 해서 드루쉬아가 다시 아시카를 마주하게 된 것은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 * *
자신의 침실도 아닌 공작부인의 침실에서 드루쉬아를 맞이하는 난감함이란. 아시카가 당혹감을 채 지우기도 전에 드루쉬아는 테이블 위에 종이와 펜, 잉크병을 내려놓았다.
“이게 뭔가요?”
“그대가 써야 할 서신.”
“무슨 서신이요?”
이해할 수 없는 요구에 아시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당분간 저택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통보를 해야 하지 않겠어?”
어이없는 요구에 아시카는 잠시 말을 잃었다. 요구하는 이의 태도가 당당해서 더욱 기가 막혔다.
“그런 억지가 어딨어요?”
“억지라니.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사실관계가 확인될 때까지는 보내줄 수 없다고.”
“제가 돌아가지 않으면 조부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기어이 기사들이 충돌하는 걸 봐야겠어요?”
“그거야 그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때 얘기지. 추측건대 레이디 이그레인이 여기 있다는 걸 이그레인 쪽에서는 아무도 모를걸? 안 그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드루쉬아의 말이 틀리지 않아서 아시카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러니까 기다리는 사람들 걱정시키지 말고 서신을 보내두라는 말이야.”
“얼마 전에도 별장에 다녀왔어요. 또 자리를 비우면 조부님께서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이그레인 공작께서는 저택에 계시는 경우가 거의 없잖아.”
“제 일을 무한정 미룰 수는 없다고요. 제가 관리하는 상단만 해도 몇 개인 줄 아세요?”
“쥴마난이라고 했던가? 능력 있는 보좌관이라면 주인의 공석을 채워주겠지. 나를 봐. 보름 이상 자리를 비웠어도 문제없었잖아. 그 정도도 감당하지 못할 거면 보좌관 자리 내려놔야지.”
가감 없는 독설에 아시카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더 대꾸할 말을 찾으려 해도 드루쉬아는 그녀의 항의를 하나하나 반박하며 틈을 주지 않았다.
잘 정돈된 짧은 머리칼과 혈색을 되찾은 잘생긴 얼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느긋하게 다리를 뻗은 모습은 언제나처럼 얄미웠다.
“진짜 이러기예요?”
“거듭 말하지만, 번복은 없어.”
툭 뱉는 말속에는 언뜻 즐거운 기색마저 어렸다.
억지라는 걸 아는데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그만큼 물렁한 탓이다. 그렇다고 간신히 깨어난 남자를 상대로 사생결단을 내도록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몸에 다른 이상은 없는지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필요해. 문제가 생기면 바로 이븐에게 찾아가야 하니까.’
결국은 그에 대한 걱정으로 생각이 마무리되었다.
아시카가 마지못해 펜을 들자 드루쉬아가 잉크병을 슥 밀어주었다. 검은 눈동자가 획 치켜 올라가며 그를 노려보았다. 짙푸른 눈동자에 웃음기가 어리고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아, 얄미워.’
차라리 상대를 말자. 그런 생각으로 아시카는 빠르게 펜을 놀렸다.
사각사각 종이 위에 검은 선이 빠르고 유려하게 흘러간다. 드루쉬아는 그녀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형태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저렇게 글을 쓰는구나, 하는 표정으로.
유려한 문장이 종이를 채우고 서명이 마무리될 때까지 드루쉬아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시선이 따가워서 아시카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무슨 희귀동물도 아니고 그만 쳐다보시죠.”
“옷이 잘 맞아서 다행이야.”
아시카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미아가 가져온 옷은 실내복과 침실용 가운뿐이었다. 계절에 맞게 얇은 재질의 실내복은 속옷을 입고 있어도 몸의 곡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 그러고 보니까 옷차림이.’
펜을 내려놓으며 황급히 가운 앞을 바짝 여몄다. 외간 남자를 마주하기에는 민망한 차림새였는데 그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뭘 새삼 내외해? 그 옷 속이 어떤지도 이미 다 봤는걸.”
“탈리온 공작님.”
한껏 목소리를 낮췄지만 당혹감을 숨기지는 못했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에 짙푸른 시선이 못 박힌다.
“난 다른 쪽이 더 좋던데. 애칭까지 만들어놓고 왜 안 불러?”
“저, 피곤해요. 이만 쉬고 싶어요.”
“아직 얘기 안 끝났어.”
드루쉬아는 아시카가 작성한 서신을 확인하며 마지막 용건을 꺼냈다.
“밖에는 알려지지 않은 모양인데. 환자가 한 명 더 있어.”
“환자요? 누구요?”
드루쉬아가 쓰러졌다는 소문만 요란했지 또 다른 희생자가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아시카는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내 기사 중 하나야. 나는 상처를 통해 중독되었고 킨빌은 아마도 피부를 통해 중독된 모양이야. 맨손으로 밧줄을 잡았거든.”
접촉과 마찰만으로 피부에 흡수되는 강력한 성분이었다.
“의식을 찾은 지는 꽤 됐는데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어. 치료가 가능할까?”
“가능할 거예요. 아마도. 저를 내보내준다면….”
아차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시카의 시선이 드루쉬아의 손에 있는 서신으로 향했다.
“그 서신, 이리 내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그보다 빨리 서신을 접어 품속으로 넣어버렸다.
“이런, 누구 맘대로.”
“세상에 이런 거래가 어딨어요!”
아시카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이 얘기를 먼저 꺼냈다면 아시카는 저택에서 나가는 조건으로 약을 제공했을 터다. 그러나 영악한 남자는 그녀가 발 뺄 수 없도록 모든 준비를 마치고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돕지 않겠다고? 죄 없는 기사가 제 몸 하나 운신하지 못하고 언제 죽을지도 모를 상태야. 외면할 셈인가?”
“이…!”
화가 나는데 화를 내지는 못하겠고, 아시카는 분한 얼굴을 하며 발을 굴렀다.
‘아무리 화가 나도 나 몰라라 하지는 못할 테지.’
그 천성을 이용하는 자신이 퍽 얄밉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도와줘. 레이디 이그레인.”
드루쉬아는 진중한 목소리로 도움을 구했다. 뻔뻔하고 얄밉지만 자신의 기사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은 진심이다. 아시카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다 한숨을 폭 내쉬었다.
“대신 나일을 내보내 줘요. 그 사람만이 할 수 있어요.”
“나일 그놈을? 내 쪽에서 심부름꾼을 보내면 안 되나?”
“아쉬운 건 내가 아니에요, 탈리온 공작님.”
아직 나일에 대해서도 캐물을 것이 많았다. 드루쉬아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놈 정체가 뭐지? 기사는 아닌 것 같고. 왜 멀쩡한 기사들을 놔두고 그런 놈하고 다니는 건가?”
“신원 확실한 귀족이고 이그레인 가문의 일원으로 들어온 사람이에요.”
“귀족? 어느 가문인데?”
“지금 저를 죄인으로 심문하는 건가요!”
아시카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이제는 정말로 화가 난 얼굴이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표정과 단단히 굳어진 입매. 언제나처럼 시린 벽을 세우고 그 너머로 사라지려 한다.
드루쉬아는 아차 싶었다. 제 뜻대로 끌려와 주길래 저도 모르게 몰아붙였다. 이 여자는 감정을 드러낼 때보다 드러내지 않을 때가 더 무섭다는 걸 잠시 잊었다.
“죄인이라니 당치 않아. 침입자들 중에 살아서 도망친 놈들이 있어. 혹시 레이디 이그레인이나 나일을 알아보고 피해가 갈까 봐 보호하려던 거야. 나일에 대한 건 뜻대로 하지.”
아시카는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명백한 거부였다.
그녀가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동안 드루쉬아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따갑다 못해 뜨겁기까지 한 시선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드루쉬아는 아시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소파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렸다.
고요한 방안에 내려앉은 침묵이 조금씩 압박해오면서 팽팽하게 당겨진다. 묘한 긴장감이 둘 사이의 간격을 밀도 있게 좁히는 느낌이었다.
탁, 하고 드루쉬아의 손이 손잡이를 내리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긴장감은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쉬어.”
거칠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드루쉬아는 짧은 한마디만을 남기고 그녀의 방에서 물러났다. 그래 봐야 얇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지만.
드루쉬아가 옆방으로 사라지자 아시카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언제, 누가 먼저 상대를 휘어잡을지 치열하게 눈치싸움을 하는 것처럼. 결국에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집어삼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