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드루, 세상에!”
샤프리는 뛰어들다시피 드루쉬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바로 뒤에는 마이헬러 후작가의 주치의인 노아가 따라 들어왔다.
“괜찮은 거야? 정신이 하나도 없지? 새벽에 난리가 났었다며 다친 데는 없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질문에는 상대에 대한 염려가 가득했다. 그러나 샤프리를 바라보는 드루쉬아 시선은 서늘했다.
“난 괜찮아. 그간 마이헬러의 주치의가 애썼다지?”
“공작가 주치의가 치료를 못 한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굳이 너까지 남아있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여기는 시중드는 하녀도 없어서 불편했겠어.”
“약혼자가 쓰러졌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걱정돼서 혼자 돌아갈 수도 없었다고.”
“명칭은 바로 하지. 전 약혼자라고 말이야.”
“드루! 내가 얼마나 애태웠는데 지금 그 얘기를 해야 해?”
앙칼진 목소리가 발끈했다. 애거나이트도 놀라서 드루쉬아를 돌아보았다.
‘파혼? 두 분이 언제 파혼하셨어?’
최측근인 칼프만 언질을 들었을 뿐 아무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탈리온의 기사들과 저택의 사용인 모두 샤프리를 약혼녀로서 극진히 대접했다.
샤프리의 반박에도 드루쉬아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차가웠다.
“그러니까 하루빨리 정리해야지. 파혼서를 미뤘더니 너만 난처해질 뻔했잖아. 내가 죽기라도 했어 봐. 뒷말에 시달리느라 넌 오도 가도 못 했을걸?”
“그런 말이 어딨어. 황태후 폐하께서 약속하신 물건은 어쩌려고 그래!”
“그래, 그게 문제야 샤프리. 네가 내 목줄을 잡으려고 던져준 미끼 말이야. 난 그거 중요하게 생각 안 해. 최소한 조부님 의견은 들어보려고 했는데, 이젠 생각이 달라졌어.”
황태후가 결혼 선물로 내주겠다던 가문의 신물.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황실에 빼앗겼고 없이도 잘 살아왔다. 조부 네오렌조차 그 물건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에 파혼서 작성을 미뤘다. 그랬더니 샤프리는 약혼녀의 지위와 그간의 친분을 빌미 삼아 공작저에 눌러앉았다.
약혼 기간을 포함해 14년 동안 한 번도 그녀를 탈리온 저택에 머물게 한 적이 없다는 걸 샤프리도 알고 있건만. 저를 돕기 위해서였다지만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가문의 신물을 돌려받기 위해 제 인생을 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가치가 없다고, 드루쉬아는 그렇게 판단했다.
창백해진 샤프리를 외면하고 드루쉬아는 뒤따라 들어온 노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마이헬러가의 주치의라고?”
“예. 노아라고 합니다.”
유독 창백한 피부에 제국인이 아닌 듯한 생김새. 드루쉬아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내가 후작가와 퍽 인연이 깊은데, 왜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공작님께서 후작저에 방문하신 적이 거의 없잖습니까. 그리고 저는 후작저를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고요.”
드루쉬아의 날 선 질문에도 상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내 목숨을 붙여놓느라 무척 애먹었다고 들었네. 어떻게 가능했는지 설명해줄 수 있겠나?”
“필요하시면 치료 과정을 문서로 만들어 공작가의 주치의에게 넘기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군.”
“갑자기 의식이 돌아와서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정중한 어조 속에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드러났다. 순간 노아의 눈동자에 스쳐 간 번뜩임을 드루쉬아는 놓치지 않았다.
“아니. 그동안 수고해준 거로 충분해. 나머지는 내 주치의에게 맡기도록 하지.”
“그럼 피 검사만이라도 한번 할 수 있게 허락해주시면….”
“거절한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군.”
노아가 물러나지 않자 드루쉬아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노아는 재빨리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기사들에게 지시해서 두 사람을 마이헬러 본가까지 호위하고, 칼프에게는 준비해놨던 파혼서를 오늘 내로 전달하라고 해. 반드시 마이헬러 후작 본인에게 전하라는 당부도 잊지 마.”
“드루!”
“샤프리, 일단은 돌아가. 보다시피 여기 상황이 좋지 않아.”
“파혼서만이라도 미뤄줘. 그냥 서류 작업이잖아.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샤프리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거짓이 아닌 정말로 애원하다시피 매달릴 기세였다.
‘분명 가볍게 시작한 약혼이었는데.’
문득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 약혼이 애당초 샤프리의 의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만약 그렇다면 이 약혼은 더더욱 빨리 정리해야 한다.
“샤프리, 이대로 물러가지 않으면 나도 더는 예의를 지키지 않을 거야.”
샤프리는 절망적인 얼굴이 되었다. 황태후의 힘을 빌려 그의 목줄을 잡으려던 순간 두 사람의 신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샤프리는 드루쉬아의 울타리 밖으로 튕겨 나오고야 말았다.
“애거나이트. 두 사람을 배웅해.”
냉랭하기까지 한 목소리. 드루쉬아는 두 번 다시 샤프리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을 터였다.
배웅을 위해 앞에 선 애거나이트의 태도는 정중하지만 위압적이었다. 샤프리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애써 돌리며 노아와 함께 침실을 나섰다.
“후.”
드루쉬아는 긴 숨을 토해냈다. 오래도록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깨어난 지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사이 벌어진 일들로 머릿속이 팽팽 돌 지경이었다.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바닥에 발을 뻗었다.
‘아까보다는 힘이 들어가는군.’
확실히 약이 효과가 있다. 깨어난 직후에는 앉아있기도 버거웠는데 지금은 몸의 감각이 돌아오는 느낌이 확연했다.
드루쉬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옆방으로 이어진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한 여자의 이미지였다. 제 공간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여자 말이다.
“헉.”
달칵, 문이 열리고 문 뒤에 붙어 있던 아시카가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드루쉬아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화드득 놀라는 모습이 귀를 쫑긋 세운 새끼사슴 같달까.
“이제 상황이 이해가 됐나? 내가 아무리 여자에게 눈이 뒤집혔대도 약혼녀를 두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지는 않아. 파혼은 진작에 결정된 일이었어.”
파혼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이 실리는 느낌이었다.
“내게 더 이상 약혼녀 따윈 없어.”
그나마도 진짜 약혼이 아니었으니 처음부터 지금까지 드루쉬아는 내내 혼자였던 셈이다.
아시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샤프리가 소리치던 것과 야박할 정도로 단호한 드루쉬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정말 냉정하구나, 이 남자.’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그레인에게만 해당하는 줄 알았다.
“왜 내가 너무하다는 표정이야?”
할 말은 많았지만 아시카는 애써 삼켰다. 자신이 뭐라고 이 남자의 약혼에 대해 왈가왈부한단 말인가. 그러나 드루쉬아는 못내 궁금한 모양이었다.
“할 말 있으면 해봐. 그렇게 참지 말고.”
“오래된 친우라고 들었는데… 너무 매정하지 않아요?”
“황실의 힘을 빌려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하는 사람이 친우인가? 그렇게 생각해?”
“아….”
아까 언뜻 들었던 황태후 이야기가 떠올랐다. 원래 남녀 사이는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법. 드루쉬아가 이렇게까지 냉랭해진 데는 나름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요.”
“했는데?”
“공작님이 깨어나기 직전에 레이디 마이헬러가 여기 왔었어요.”
“무슨 말이지?”
“숨어 있느라 보지는 못했지만 공작님을 확인하고 바로 다시 나갔어요.”
드루쉬아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저택에 침입자가 나타나서 난리가 났는데 혼자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그렇지않아도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던 참이었다. 아시카가 전해준 사소한 이야기가 상황을 더욱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드루쉬아는 당장 방을 뛰쳐나갈 것처럼 긴장해있는 아시카를 시선으로 빠르게 훑었다.
“바로 시중 들 사람을 보내주도록 하지. 방에서 쉬고 있어.”
“그냥 보내줘요. 피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겪어봐서 알 텐데? 내가 말 몇 마디로 결정을 번복한 일이 있던가?”
이제 혈색을 되찾은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평소처럼 뻔뻔하고 오만한 태도 그대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이 남자를 언제 한번 이겨본 적이나 있었나.
‘자업자득이야. 자업자득. 내가 내 무덤을 팠지. 하….’
아시카의 얼굴이 미미하게 구겨지는 것을 보면서 드루쉬아는 눈앞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문이 닫히는 찰나 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는 것을 보고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 이 뻔뻔한 남자 같으니.”
차마 소리를 지르지는 못하고 억눌린 화를 뱉었다. 하지만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나일도 없는데 어떻게 도망가.’
어쩐지 가능할 것 같지 않아서 한숨이 나온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서 있을 기력도 없어서 가까이 있는 침대가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뒤, 방으로 찾아온 소녀를 보고 아시카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너….”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이스나 남작 부인의 살롱에서 아시카를 천막으로 안내했던 하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