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45화 (45/153)

#45.

“우리가 그렇게 좋은 사이는 아니잖아요. 제대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예의를 지키시죠.”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 알몸으로 뒤엉켜 할 거 다 해봤는데 그 이상이라고 봐야지.”

“르쉬아!”

아시카는 입술을 질끈 말아 물었다. 너무 골몰하며 생각했더니 혼자 부르던 이름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르쉬아, 라.”

드루쉬아는 가만히 저의 이름을 곱씹어보았다. 혀에 감기는 느낌이 좋아서 달콤한 느낌마저 드는 애칭이었다. 저도 모르게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음에 드는군. 그럼 나도 이제 아시카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아니 공작님, 그게 아니라.”

“사람 헷갈리게 왜 자꾸 이랬다저랬다 해?”

“실수예요. 이건 그냥….”

할 말이 없다.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으르렁대놓고 혼자 그의 애칭을 만들어 불렀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설명할까.

“르쉬아라고 부르는 거, 난 괜찮은데.”

아시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상해. 왜 이러는 거야?’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더니 뭔가 이상해졌다. 까칠한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는데 그 속에 박혀 있던 가시가 쏙 빠져버렸다. 심지어 다정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하는 건 혼자만의 착각일까.

매달리듯 저를 잡고 있는 드루쉬아라니.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태도와 본 적 없는 시선이었다. 그 이상한 환상 속을 제외하고는.

“공작님, 아직 회복이 덜 돼서 그런가 봐요.”

아시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자 드루쉬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설명해드릴게요. 제발 놔주세요.”

‘제발’이라고 사정까지 하는데 마음이 약해졌다. 그녀의 손목을 쥔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진다. 연약한 살결을 쓸면서 느릿하게 떨어져 나가는 손길이 어쩐지 아쉬워 보였다.

손이 자유로워지는 순간 아시카는 재빨리 물러났다. 도망치듯 거리를 벌리는 그녀를 보고 드루쉬아의 잘생긴 이마가 구겨졌다.

“꼭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도망가는군.”

“저는 진지하게 얘기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왜? 거리가 가까우면 그게 안 되나? 내가 신경이 쓰여?”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당황한 아시카의 얼굴이 붉어졌다 창백해졌다 다시 달아오르기를 반복했다.

평정을 잃어버린 여자의 모습은 드루쉬아가 봐왔던 그 여느 때와도 달랐다. 가면 같았던 차가운 외피를 벗어던지고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느낌이었다.

‘저것이 본래의 성격이겠군.’

그것이 기꺼워서 자꾸만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시카는 다시 휘말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땀에 젖은 손목을 매만졌다.

“그래서 내 침실로 뛰어든 이유는?”

“과정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씀드릴게요. 공작님께서 중독된 것은 보통 독이 아니라 연금술사의 약이라는 걸 확인했어요.”

“연금술사의 약?”

예상치 못한 대답에 드루쉬아는 눈을 크게 떴다. 제국 내에는 연금술사가 희귀하기 때문에 무척이나 생소하게 들렸다.

“‘인형의 사술’이라고 해요. 죽지는 않지만 제 의지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로 만드는 약이라고 들었어요.”

드루쉬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제가 아는 연금술사에게 확인했고, 거기서 약을 받아왔어요. 총 세 개의 약인데.”

아시카는 품속에서 약병 세 개를 꺼내 보였다.

“두 병은 드셨는데, 나머지 한 병이 남아있어요. 깨어난 뒤 하루 안에 마셔야 하고, 이것까지 마셔야만 몸의 기능을 온전히 회복한다고 했어요.”

“그 약.”

의식이 회복되기 직전 꿈결처럼 스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대가 직접 나에게 먹였나?”

아시카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꼭 다무는 것이 대답을 대신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쓰디쓴 약의 맛보다 입속으로 파고들던 말캉한 감각이 선명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그것이 싫지 않아서 드루쉬아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하튼, 지금 급한 건 나머지 세 번째 약을 드셔야 한다는 거예요.”

아시카는 마지막 약병을 내밀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제가 못 미덥더라도 이 약까지는 먹어야 해요.”

침착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드루쉬아의 머릿속이 점점 맑아지면서 강한 의문이 떠올랐다.

“왜?”

“왜라뇨?”

“나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지?”

조금 전보다 날 선 시선이 아시카에게 향했다. 한 번 의심을 품게 되자 줄줄이 따라오는 그간의 의문들.

두 사람은 서로를 적대해왔다. 협의 테이블에서 아시카가 많은 부분 양보해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적인 업무였다. 그 외에는 철저히 서로를 무시해왔다.

그런 아시카의 태도가 황궁 연회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드루쉬아 역시 거기에 휩쓸려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질러버렸고.

“내 의문은 이거야. 내가 중독됐든 말든, 왜 이그레인이 발 벗고 나섰냐는 거지.”

드루쉬아는 아직 젖어있는 자신의 손을 슬며시 내려 시야에서 치워버렸다. 조금 전까지 닿아 있던 체온이 사라지자 이제야 온전히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그건….”

달라진 분위기가 확연해서 아시카는 주춤했다. 조금 전까지 저를 잡고 놓아주지 않던 남자가 차게 식는 모습에 왠지 속이 쓰리다.

“공작님께서 제 파혼을 도와줬으니까, 그 신세를 갚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 하고 드루쉬아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간 둘 사이에 벌어졌던 일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 때문에 저만치 밀어버린 기억이었는데, 꽤 그럴싸한 핑계가 되었다.

“그랬단 말이지.”

아시카는 다시 약병을 내밀었다.

“이제 그만 털고 일어나요. 당신이 이러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요.”

조곤조곤 내뱉는 이야기 너머 같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일어나요. 당신이 이러고 있으니까 무서워.」

아마도 그것은 환청이 아니었나 보다. 드루쉬아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약병을 건네받았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뚜렷한 이목구비에 생동감이 더해진다. 그러나 여심을 홀리는 미소에서 왠지 모를 위협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시카의 가슴속에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저 미소는 협의 테이블에서 그녀를 한껏 쥐어짜기 직전에 짓던 미소가 아닌가.

드루쉬아는 순순히 약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아시카와 시선을 맞추고 단숨에 약을 들이켰다. 약을 삼키는 모습을 끝까지 확인하고 아시카는 긴 숨을 토해냈다.

‘이제 됐어.’

그를 구했다. 그가 온전한 모습으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드루쉬아가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시카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할 일을 마쳤으니 이제 그녀는 퇴장해야 할 때였다.

“탈리온 공작님, 빠른 시일 안에 회복되기를 바랄게요.”

아시카의 인사에도 드루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침대 옆에 있는 설렁줄을 당길 뿐.

“부르셨습니까?”

얼마 뒤 시종이 아닌 애거나이트가 나타났다. 내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레이디 이그레인을 옆방으로 모시고 미아를 불러와. 시중은 미아가 전담하도록 해.”

“네?”

“공작님, 그게 무슨….”

아시카와 애거나이트 둘 다 당황했다.

“그럼 내가 저택의 침입자를 확인도 안 하고 곱게 보내줄 줄 알았나?”

“말했잖아요. 저는 공작님을 돕기 위해 온 거라고. 제가 드린 약도 모두 드셨잖아요.”

“그것과 현재 상황은 별개야. 내 저택에 다수의 침입자가 있었고 하필 같은 날 그대가 나타났어. 이런데도 나에게 의심하지 말라는 소리가 나와?”

타당한 의심이지만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렇게 못 미더우면 내가 준 약은 왜 먹었는데!“

그렇게 소리치고 싶지만 단단한 드루쉬아의 얼굴에서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 태도가 무슨 손바닥 뒤집듯이 획획 바뀌어?’

상대가 환자라는 생각에 방심했다. 그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절박했던 나머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잊고 있었다.

애거나이트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 옆방으로 모시라는 말입니까?”

바로 옆방은 공작부인의 방이었다. 사용하는 이가 없어 오래도록 비어있었을 뿐 아무나 들일 곳은 아니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차가운 목소리에 애거나이트는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하녀를 불러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미아는 레이디의 시중 같은 건 들 줄 모릅니다.”

“아니, 미아여야 해. 시중과 감시 둘 다 해야 하니까.”

“하.”

아시카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미쳤어. 진짜로 날 감금하려고?’

무턱대고 탈리온 저택에 들어온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물론 그것도 드루쉬아가 깨어났기에 할 수 있는 후회였지만.

“차라리 약속을 정하고 나중에 만나서 얘기해요. 조사가 필요하면 협조할게요. 탈리온의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서.”

“번복은 없어.”

“약혼녀가…. 레이디 마이헬러가 여기 있는데 저를 공작님 옆방에 가둔다는 게 말이 되나요?”

“아, 약혼녀.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였어?”

드루쉬아는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아까보다 혈색이 좋아지고 있는데 반대로 그의 표정은 점점 꼬여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저는….”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문밖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목소리에 중단되었다.

“드루가 깨어났다며! 내가 만나겠다잖아!”

“공작님의 명령입니다. 방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드루의 약혼녀야. 당장 비켜!”

아시카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진심으로 그녀는 샤프리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대체 어떤 표정으로 이 남자의 약혼녀를 봐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드루쉬아는 소란이 일어난 문 쪽을 보더니 애거나이트에게 손짓했다.

“레이디 이그레인을 옆방으로 들여보내.”

단호한 지시에 애거나이트가 마지못해 아시카의 앞에 섰다. 밖에서 들릴까 봐 아시카는 반박할 수도 없었다.

들키느니 차라리 공작부인의 방에 숨는 편이 낫다. 침실 안쪽에는 공작부인의 방과 연결된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아시카가 옆방으로 들어가고 드루쉬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침실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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