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르쉬아?”
“그 손을….”
애거나이트는 소리를 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당장 놓으라고 해야 하는데, 잡고 있는 것은 아시카가 아니라 드루쉬아였다.
“흐… 젠장….”
드루쉬아는 나직하게 욕설을 뱉으며 몸을 들썩였다.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화가 난 탓이다.
“공작님, 정신이 드십니까? 괜찮으신 겁니까?”
“…시끄러워. 목소리… 줄여.”
애거나이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정신이 드셨군요!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그동안은 정신이 들어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실상 눈만 몇 번 깜박이다 도로 의식을 잃기 일쑤였다.
“시끄럽다고… 했지.”
“당장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가서 주치의를….”
“기다려요!”
아시카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지금 주치의가 개입하면 문제가 어떻게 꼬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
‘설명을,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 해.’
드루쉬아의 목숨을 두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아시카가 애거나이트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손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설명… 해.”
내내 의식이 없던 드루쉬아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끌려 홀린 듯이 정신이 들었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그러나 숨결마다 은은하게 흘러드는 들꽃 향기는 착각이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아시카라는 걸 깨닫고 처음 느낀 감정은 안도였다.
「일어나요. 당신이 이러고 있으니까 무서워.」
그 목소리의 주인을 놓치지 않기 위해 드루쉬아는 더 단단하게 손을 움켜쥐었다. 아시카는 그 손을 내치지 못하고 애거나이트에게 말했다.
“내가 치료약을 가져왔어요. 그러니까 주치의는 부르지 말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애거나이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시카는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말이 안 된다고 하기에는 이미 공작님께서 깨어나지 않았나요?”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 수도의 내로라하는 의원들을 수소문하고 가문의 주치의가 모두 달려들어도 깨어나지 못하던 드루쉬아가 말을 하고 있었다.
드루쉬아는 여전히 아시카를 잡은 채 나머지 한 손을 들어 손짓했다.
“애거나이트, 나 좀… 일으켜 봐.”
“네, 알겠습니다.”
애거나이트는 아시카를 비켜서 드루쉬아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그를 일으키고 쿠션을 등에 받쳐 방안을 볼 수 있게 자세를 잡아주었다.
“후…, 몸이 말이 아니군.”
“보름이 넘도록 누워 계셨습니다. 의원을 불러 몸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아시카의 반박에 애거나이트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경계 어린 시선과 할 말이 가득한 얼굴. 그나마 드루쉬아를 앞에 두고 있기에 참는 눈치였다.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는 사이 방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단장님, 이상한 놈을 잡았습…. 헉! 각하!”
방안으로 뛰어들던 도리안이 침대에 앉아있는 드루쉬아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세상에, 어떻게…. 괜찮으신 겁니까!”
“왜 다들… 목소리가 이렇게 커.”
짜증 섞인 핀잔은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당장 침대로 달려들 것 같은 도리안을 애거나이트가 막아섰다.
“이상한 놈이라니?”
“자객은 아닌 것 같은데 정체를 모르겠습니다. 공작님을 뵙게 해달라고 난리를 쳐서. 어떻게 할까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아래층이 들썩들썩 시끄러웠다.
‘나일!’
아시카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놀라 움찔했다. 그 작은 변화를 드루쉬아는 바로 알아차렸다.
“데려… 와.”
“네, 각하.”
도리안이 밖으로 나가자 아시카는 초조해졌다. 조용히 들어왔다가 조용히 나가려고 했는데 공작저에 있는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손 좀….”
“아직 설명을 안 했잖아.”
아시카가 빠져나가려고 하자 드루쉬아는 더 단단하게 손을 틀어쥐었다. 아까보다 힘이 돌아왔는지 빼내기가 어려웠다.
“일단 놓고 얘기해요. 이렇게 기사들이 많은데 제가 어디로 도망가겠어요.”
“그날은 잘도 도망갔잖아.”
“그, 그건.”
아시카를 바라보는 짙푸른 눈동자가 선명하면서도 기묘하게 일렁거렸다.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뿌옇게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내내 어둠 속에서 헤매던 그를 깨운 것이 아시카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를 발견한 순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본능이 앞섰다. 다른 기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이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창백한 얼굴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드루쉬아의 목소리는 한결 차분해졌다.
‘무슨 애도 아니고.’
아시카는 난감한 얼굴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잡힌 손목에 땀이 차는데도 끝내 놓아주지 않을 기세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애거나이트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뭔가 이상한데.’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 적의도 호의도 아닌 뭔가가 있었다. 미묘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문밖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저놈이야! 날 기절시키고 무슨 짓을 한 거야!”
“칼 맞아 죽을 걸 구해준 것도 나잖아요. 몇 대 때린 거 가지고 뭘 그래요?”
“그걸 말이라고 해?”
“다들 조용! 공작님 침실 앞이다. 시시비비는 나중에 가리도록 해.”
1층에서도 3층 복도를 지날 때도 나일은 기사들 사이를 한바탕 휘저어놓으며 끌려왔다.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일이 안타까운 탄성을 질렀다.
“이런. 아가씨 들키셨어요?”
이쪽이나 저쪽이나 어쩌면 이렇게 뻔뻔한지. 아시카는 민망해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또 그쪽이로군.”
드루쉬아의 시선이 아시카를 지나 나일에게 향했다.
‘최측근 기사를 놔두고 왜 저런 놈하고 다니는 거지?’
창백한 얼굴을 하고도 나일에게 향한 드루쉬아의 시선만큼은 찌를 듯이 날카로웠다. 물론 나일은 별로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아가씨, 미리 말해두지만 전 잡힌 게 아니에요. 아가씨가 걱정돼서 도망치지 않은 것뿐이라고요.”
이 와중에도 나일은 여기까지 끌려온 것이 자존심 상하는 눈치였다.
‘그냥 혼자라도 도망가지 그랬어.’
아시카는 그런 표정으로 나일을 돌아보았다.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이해했는지 나일이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까지 데려온 게 저니까 무사히 데리고 나가는 것도 제 책임이에요, 아가씨.”
‘아 정말.’
그렇게 안 생겨서는 꽤 고지식한 남자였다.
“그나저나 탈리온 공작님 때문에 아가씨께서 꽤 애를 썼는데….”
무심하게 흘러가던 나일의 시선이 드루쉬아의 입술에서 멈췄다.
“운도 좋으셔라.”
“나일!”
당황한 아시카를 보면서도 나일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 공작님을 살리려고 무던히 애쓰셨다는 정도는 아시라고요.”
공작저에 몰래 침입하다 잡혔는데 한마디도 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 넘는다. 드루쉬아는 피곤한 듯 손을 저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데리고 나가.”
“아 참. 또 가둘 거면 제대로 된 방을 주세요. 지저분한 감옥 같은데 처넣으시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기막힐 정도로 뻔뻔한 요구에 애거나이트가 주먹을 쥐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드루쉬아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얼굴이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 손님방을 내주고 감시해.”
어쩐지 계속 마주 보고 있으면 속을 긁어놓을 것 같은 놈이었다.
나일이 기사들에게 잡힌 채 방을 나가고 드루쉬아가 애거나이트에게 물었다.
“상황 보고부터.”
“각하께서 쓰러지신 뒤 누구도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상태가 심각해서…. 다행히 레이디 마이헬러와 함께 온 후작가의 주치의 덕에 병세가 호전되긴 했습니다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신 채 보름이 넘었습니다.”
“샤프리? 설마 샤프리가 여기 있나?”
“네. 후작가 주치의와 함께 머물면서 공작님의 치료를 지켜봤습니다.”
드루쉬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불쾌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태도였다. 애거나이트는 떠오르는 의문을 삼키며 보고를 이어갔다.
“그리고 오늘 새벽 무렵, 정원 북쪽에 침입이 있었습니다. 제가 확인하러 가면서 저택 전체에 수색을 명했고 이후 돌아와 보니 본관 입구가 막혀 있었습니다. 그사이 각하의 방 근처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잠시 말을 멈춘 애거나이트가 나머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까 그놈이 튀어나와서 도와줬답니다. 직후 그놈에게 공격당해서 기사 둘이 기절했습니다.”
“다른 피해는?”
“침입자들과 싸운 기사 여섯 명이 부상을 입거나 기절했고, 본관 사용인들은 나오지 않아서 다친 사람이 없습니다. 미리 약을 쓴 게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애거나이트가 아시카를 슬쩍 흘겨보았다.
“저희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동안 레이디 이그레인이 여기 머물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각하, 레이디 이그레인은 어쩌실 겁니까?”
드루쉬아는 아직도 아시카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땀이 차다 못해 축축한 느낌이 날 정도였다.
“제일 먼저 심문을 해야겠지. 안 그런가, 레이디 이그레인?”
“나와 대화하고 싶다면 단둘이 해요. 다른 사람은 내보내고.”
무슨 얘기만 하면 버럭버럭 나서는 애거나이트를 두고 대화가 될 리 없었다. 저 충직한 기사가 아시카는 몹시 불편했다.
드루쉬아는 느릿하게 숨을 토해내며 상황을 정리했다.
“내부에 협조자가 있어. 저택의 봉쇄를 유지하고 첩자들을 모조리 색출해.”
이렇게 큰일을 벌였을 정도면 진작에 내뺐을 테지만 이참에 외부의 눈과 귀를 한 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애거나이트, 기사들 데리고 나가. 내 방 근처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레이디 이그레인과 동행이 저택에 있다는 건 함구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애거나이트는 순순히 지시를 따라 나머지 기사들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자 아시카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기분이었다.
“이제 그만 놔줘요.”
지친 목소리에 드루쉬아가 아시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면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형형한 눈빛이 이제까지와 달리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것이 마음 놓이면서도 아시카는 바짝 긴장했다.
“용감하게 내 침실까지 뛰어들어놓고 무서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