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문이 열리면서 제일 처음 느껴진 것은 방안을 가득 채운 약초 향기였다. 넓은 방인데도 얼마나 오래 문을 닫아두었는지 공기마저 답답했다.
“후. 딱 환자의 방 같은 느낌이네요.”
나일이 방안을 둘러보고 중얼거렸다.
창가 반대편에 놓여있는 커다란 침대와 그 한가운데 죽은 듯이 누워있는 한 사람. 창백하다 못해 회색빛이 도는 드루쉬아의 얼굴은 산사람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아시카는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이미 수차례 상황을 들었는데도 막상 의식 없는 드루쉬아를 눈앞에 마주하고 충격으로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환자라니.’
이 남자가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하는 날이 있을 줄이야. 언제나 인정사정없이 저를 몰아붙이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하던 남자가 아니었나.
“공작이 잘생기긴 했는데요. 얼굴 감상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죠, 아가씨.”
아시카는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럽게 품속에서 꺼낸 약병은 세 개였다.
“표시된 순서대로 먹여야 한다고 했지?”
“네. 첫 번째 약은 의식이 없을 때, 두 번째 약은 깨어난 직후, 그리고 하루가 지나기 전에 마지막 약을 먹여야 한댔어요. 근데 저 상태로 약을 먹을 수 있을까요?”
아시카는 첫 번째 약병을 들고 침대가로 다가갔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던 손이 드루쉬아의 입술을 눌러 살짝 벌렸다.
‘몸이 너무 차.’
손에 닿는 서늘한 체온에 소름이 끼친다. 몸서리를 치면서도 조심스럽게 입술에 약병을 대고 기울였다.
“아가씨, 그렇게 무작정 들이부었다가는 약이 기도를 막아서 숨 막혀요.”
그 말에 아시카는 손을 멈췄다. 한 번도 환자를 다뤄본 적 없으니 방법을 알 리 만무하다. 그건 나일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잡아드릴 테니 아가씨께서 약을 먹여보세요.”
나일은 한숨을 쉬며 침대가로 다가갔다. 그러나 아시카의 행동이 더 빨랐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약을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혀가 마비될 만큼 쓴맛에 아시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 아가씨?”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머리를 한팔로 감싸듯이 안아서 들어 올려 고개를 기울였다. 차디찬 입술이 닿는 걸 느끼고 혀끝으로 틈을 만들었다. 그녀의 입에 머금었던 약이 천천히 드루쉬아의 입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아, 정말 못 말려.”
나일은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나일이 놀라거나 말거나 아시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불과 한 모금의 약을 흘리지 않고 넘기는 데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간신히 약을 다 먹이고 아시카는 드루쉬아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긴 숨을 토해내는 아시카를 보며 나일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 약, 다른 사람이 먹어도 되는지 안 물어봤어요. 그러다 탈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럼 나 대신 나일이 해줄래?”
“으엑!”
“거봐, 그럴 거면서.”
나일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여전히 죽은 듯이 누워있는 드루쉬아를 보며 아시카는 젖은 입가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때였다. 아래층에서 쿵, 하며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일이 우뚝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정말. 뜻대로 안 되네.”
“무슨 소리야?”
“지금 누가 방에 들어오면 곤란하겠죠? 미안하지만.”
나일이 아시카의 손을 덥석 잡아당기더니 어깨를 눌러 바닥에 앉혔다.
“바닥에 엎드려요.”
“자, 잠깐만. 나더러 침대 밑에 들어가라고?”
그녀의 시선 끝에 한 뼘 남짓한 높이의 비좁은 공간이 보였다.
“당장 나갈 수도 없고 들키면 안 되잖아요. 아가씨는 날씬하니까 가능할 거예요. 얼른 들어가요.”
나일은 당황해있는 아시카를 바닥 끝까지 누르면서 침대 아래로 밀어 넣었다. 방 안은 어찌나 청소가 잘 되어 있는지 바닥과 침대 안쪽에도 먼지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일은 어쩌려고?”
“저는 알아서 처신할게요. 아가씨나 들키지 마세요.”
나일은 아시카를 깊숙이 밀어 넣은 뒤 옷자락이 보이지 않도록 정리했다. 나일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아시카가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잡았다.
“다치지 마.”
나일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들키지 말라거나 잡히지 말라는 말 대신 다치지 말라고 한다. 그 속에 담긴 염려가 느껴져서 빙그레 웃었다.
“걱정하지 마요. 아가씨만 속 썩이지 않으면 문제없어요.”
웃음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나일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발걸음 소리조차 없이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방안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방문이 열리는 순간 아시카는 숨을 죽였다.
기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신발조차 신지 않은 하얀 발은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고요한 방안에 사락사락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맨발로 다가온 상대는 침대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하아, 드루.”
여자의 목소리였다. 드루쉬아를 저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은 아시카가 알기로 한 명뿐이었다.
‘레이디 마이헬러.’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아시카가 구하려는 남자의 약혼녀. 그녀를 두고 무슨 짓을 저질렀던가.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치욕스러운 죄였다.
‘이 남자만 살리고 조용히 사라지면 돼.’
약혼녀까지 있는 사람이니 문제가 커지는 건 원치 않을 테지. 아시카만 조용히 덮고 물러나면 된다. 그렇게 단단히 마음먹었는데도 심장이 지끈거렸다.
“이 철벽같으니. 그래도 이건 고마웠어.”
‘무슨 말이지?’
이 난리 통에 약혼자에게 하는 말치고는 퍽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저택이 난리가 났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샤프리가 뭘 하고 있는지 숨어있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샤프리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처음 왔을 때처럼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방을 나가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샤프리가 나간 뒤 아시카는 침대 아래에서 나왔다. 불안한 마음에 드루쉬아를 살펴봤지만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뭘 한 거야.”
레이디 마이헬러가 왜 하필 이 시간에, 이렇게 조용히 왔다 간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약혼자가 걱정되어서 부러 찾아온 걸까.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이렇게 서둘러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맙다는 말은 또 뭐야?”
탈리온과 마이헬러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었나. 아시카는 드루쉬아를 내려다보며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 얼굴색이.”
시신처럼 회색빛이던 드루쉬아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아시카는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쓸어보았다.
“온기가 돌아. 다행이다.”
약이 효과가 있다. 그럴 거라고 믿고 먹였지만 약이 듣지 않으면 어쩌나, 영영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르쉬아.”
가녀린 손마디가 흐트러진 짧은 금발을 쓸어올렸다. 손에 감기는 머리칼의 감촉이 실크보다 부드럽게 느껴졌다.
“일어나요. 당신이 이러고 있으니까 무서워.”
그 꿈이 진짜가 되어버릴까 봐. 조용조용 속삭이는 목소리가 애달프다.
왜 이런 마음이 되는지 아시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남자가 빨리 눈을 떴으면 좋겠다고, 저를 미워해도 좋으니 이전처럼 생생하게 살아있기를 바란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조용히 얼굴을 마주하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왜 3층이 비어 있어! 정신 나갔어? 공작님께선 어떻게 된 거야!”
“현관이 막혀 있었습니다.”
“어떻게 시종이고 하녀고 하나도 안 보여!”
거칠게 내지르는 목소리는 분명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애거나이트.”
다시 침대 아래에 숨어야 하나. 그런 고민으로 망설일 때 드루쉬아가 신음을 흘렸다.
“르쉬아?”
드루쉬아가 깨어나고 있었다. 깨어날 때 먹이라고 했던 두 번째 약. 지금 숨어버리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었다. 아시카는 닫혀있는 문과 드루쉬아를 번갈아 보았다.
고민할 시간조차 여유롭지 않은 상황. 아시카는 품속에서 두 번째 병을 꺼내 약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도망치지도 못한다. 숨는다 해도 오래지 않아 들키게 될 터였다.
‘잡힐 때 잡히더라도 약은 먹여야 해.’
아시카는 양손으로 드루쉬아의 얼굴을 잡고 그대로 입술을 부딪쳤다.
“흐으… 읍.”
반쯤 정신이 든 드루쉬아는 입속으로 들어온 약물을 얼결에 삼켜버렸다. 약물과 함께 파고든 혀가 따뜻하고도 익숙해서 놓치고 싶지 않은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보드랍고 따뜻한 입술은 금세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벌컥, 문이 열리고 기사들이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누구냐!”
고개를 들던 아시카는 가장 먼저 들어온 애거나이트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레이디 이그레인?”
애거나이트와 기사들은 아시카를 발견하고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레이디 이그레인이 왜 여기에…,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문밖에는 자객과 탈리온의 기사들이 쓰러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방에 있는 것은 무기 하나 없는 이그레인 공작가의 레이디. 무방비하게 보이는 여자는 드루쉬아의 곁에 있었다.
애거나이트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공작님 곁에서 떨어지십시오.”
“왜? 내가 무슨 짓이라도 했을까 봐?”
“지시에 응하지 않으면 다음은 저도 장담하지 못 합니다”
애거나이트의 위협적인 태도에도 아시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약이 제대로 먹히고 있을까. 애거나이트를 노려보면서도 아시카의 생각은 온통 드루쉬아에게 향해 있었다.
“날 때려눕히기라도 하려고?”
“필요하다면요. 레이디 이그레인의 신분이 어떻든 공작님의 안위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물러나십시오.”
아시카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애거나이트가 걸음을 옮겼다.
‘아직 세 번째 약이 남아있는데.’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있을까. 설명한다 한들 앞뒤 꽉 막힌 저 기사가 제 말을 들어주기나 할까. 고민하는 동안에도 애거나이트는 점점 아시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제아무리 덩치 큰 기사라 해도 아시카는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그들이 기사이기 때문에, 힘없는 레이디를 함부로 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언제든 검을 휘두를 준비를 하고 살기를 풍기며 아시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 약을 어떻게 먹이지?’
오로지 그 생각으로 가득 차서 초조하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러나 탈리온의 기사단장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그녀가 물러나려고 할 때였다.
커다란 손이 느리게 다가와 아시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공작님!”
애거나이트가 가장 먼저 변화를 알아차렸다. 아시카의 손목을 잡은 것은 다름 아닌 드루쉬아의 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