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이건 그냥 독이 아니라 연금술사의 약이야. 특별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연금술사의 약이요?”
아시카와 나일은 잘 이해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일명 ‘인형의 사술’이라고, 사람을 산송장으로 만들어. 깨어있되 깨어있지 않으며,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해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약이야.”
이븐은 자리를 옮겨 자신의 도구를 한차례 훑어보며 말했다. 그 사이 리네가 빗자루를 가져와 깨진 유리 조각을 쓸고 자리를 닦아냈다.
“그럼 목숨이 위험한 건 아닌가요?”
“당장 죽는 건 아니지만,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종국에는 어떻게 되겠어?”
생명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약. 아시카의 등줄기에 선득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누군가 탈리온을 노리고 있어.’
단순히 목숨을 노리는 것은 아닐 터다.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번잡한 상황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체 누가? 왜 이런 짓까지 하는 거지?’
드루쉬아의 가까이에서 이득을 얻을 사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보좌관 칼프였다.
‘탈리온 공작이 제일 오래 데리고 일한 사람이라고 들었어.’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드루쉬아가 직무수행이 불가능할 경우 보좌관이 상황을 통제한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권한이었다.
전대 공작인 네오렌이 살아있기 때문에 종국에는 모든 권한이 네오렌에게 다시 돌아간다. 후계문제가 있지만 네오렌이 살아 있는 동안은 그조차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어 생각난 사람은 샤프리였다. 탈리온 영지에서부터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온 친우이자 약혼녀인 샤프리 마이헬러.
‘아니야. 못해도 1, 2년 안에는 결혼하게 될 텐데 뭐하러 이런 짓을 하겠어.’
결혼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드루쉬아가 일어나지 못하면 샤프리는 다른 혼처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제국 내에서 탈리온 공작가보다 나은 혼처는 없었다.
‘당장 한 사람만 해친다고 얻을 게 없을 텐데. 어째서지?’
아시카는 떨리는 손을 말아쥐었다.
‘생각을 해, 생각을 해보라고.’
지난 두 달 내내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악몽. 그 꿈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둘뿐이었다. 양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아시카와 드루쉬아. 그리고 지금 당장 드루쉬아를 노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슬며시 나타났다 희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지금 탈리온 공작의 상태가 어떻다고 했지?”
“사경을 헤매다가 얼마 전에 의식을 회복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잠시뿐이고 대부분은 의식이 없다고 해요. 그게 치료가 되는 과정인가요?”
이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설마. 이 약은 중간이 없어. 치료됐다면 진작에 자리에서 일어났겠지. 간신히 목숨줄만 연명하는 모양인데, 그게 언제까지 갈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래서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는 건가요?”
“가능하긴 해.”
“아아….”
아시카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지불 할게요.”
“이렇게 희귀한 치료제를 돈 몇 푼에 넘기라고?”
“그럼요? 원하는 게 따로 있나요?”
“약을 만들어주는 대신 두 가지 조건이 있어.”
아시카는 긴장한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어진 이븐의 요구는 꽤 의외의 것이었다.
“첫째는 이그레인이 관리하는 상단의 유통 권한 일부를 넘겨줬으면 해.”
“아, 상단을 운영하고 계신가요?”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물론이지. 이 샵에 있는 물건들을 봐. 직접 발로 뛰지 않으면 구하기 어려운 물건들이야. 그리고 이그레인 소유의 상단은 가장 광범위한 유통 권한을 가지고 있고. 제국 내에서 가지 못할 곳이 없다지 아마?”
세부 사항에 따라서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는 조건이었다. 더 어려운 요구를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그 정도는 내 권한으로 충분히 가능해요. 세부 사항은 나중에 조율해서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죠. 그럼 두 번째는요?”
이븐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레이디 이그레인, 내게 이름을 허락해 주는 건 어때?”
“무슨 말이죠?”
아시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시카라는 이름이 참 예쁘거든. 하지만 불러주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테지. 그 이름을 내게 허락해 주게.”
“아….”
같은 귀족이라 해도 이븐과 아시카의 위치는 하늘과 땅 차이. 이름을 허락한다는 건 그만큼 친밀한 사이라는 의미였고, 그것만으로도 이븐은 사교계에서 상당한 뒷배를 과시할 수 있게 된다.
아시카는 그렇게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그럼 약은 언제 가져갈 수 있나요?”
“하루 정도만 기다려줘. 준비되는 대로 이그레인 저택으로 사람을 보낼게.”
이븐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선선히 대답했다. 그 미소가 퍽 따뜻해 보여서 아시카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드루쉬아의 소식을 들은 날부터 바짝바짝 피가 말랐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속이 타들어 갔던 나날들. 제대로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어서 밤마다 공작저를 홀로 배회했더랬다.
갑자기 맥이 탁 풀리면서 아시카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아가씨!”
나일이 휘청이는 아시카의 팔을 잡았다.
“아냐, 괜찮아. 일단 돌아가자.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간신히 한고비를 넘겼을 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직 남아있었다. 해독제를 어떻게 드루쉬아에게 가져갈 수 있을지 방법을 찾아야 했다.
* * *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새벽, 사위가 뿌연 가운데 풀벌레 소리마저 잦아들어 저택 주변이 고요했다. 드문드문 순찰하는 기사들만이 눅눅하게 잠겨있는 안개 속을 거닐었다.
챙강.
스산한 침묵을 깨고 난데없이 금속성 파열음이 선명하게 울렸다.
“침입자다!”
누군가의 외침에 어두웠던 저택에 일제히 불이 밝혀졌다. 숙소에 있던 애거나이트와 잠들어 있던 기사들도 검을 들고 밖으로 달려 나왔다.
“어느 쪽이야!”
“북쪽 별채입니다.”
“인원은?”
“파악이 안 됩니다. 발견 직후 모습을 감췄습니다.”
기사의 보고에 애거나이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3조는 나와 함께 소리가 난 곳을 확인하고 1조는 공작님의 침실로 향한다. 나머지 인원은 원래 맡은 구역대로 배분해서 저택 전체를 수색해.”
“알겠습니다, 단장님.”
애거나이트는 신속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 저택 안으로 스며드는 그림자가 있었다.
“본채에도 침입자가 있다!”
저택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검은 복장의 자객들과 본채로 향하던 기사들이 충돌했다. 그사이 드루쉬아의 침실 문 앞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제기랄! 다른 놈들은 왜 안 와!”
문을 지키고 있던 호위 기사는 둘, 상대는 여섯이었다. 기사 둘이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냈지만 열세를 면할 수는 없었다. 그대로 떠밀리다가 한 명은 검을 맞고 쓰러지고 한 명은 3층 발코니에서 굴러떨어졌다.
“아악!”
“공작님의 침실을 막아!”
다른 층에 있던 기사 둘이 달려왔지만 한발 늦었다. 수적인 차이로 달려온 이들도 복도 끝으로 내몰렸다.
“네 이놈들!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거냐!”
악다구니 쓰는 기사의 외침에도 상대는 묵묵히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기사는 드루쉬아의 침실 문과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상대를 보고 암담해졌다. 간신히 검을 받아냈지만 얼마나 더 버틸지 자신이 없었다. 눈앞의 적을 막아내느라 뒤에서 날아드는 검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뒷덜미에 선뜩한 죽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챙강.
“죽으려고 환장했나. 어디다 목을 디밀어?”
불쑥 튀어나온 검이 뒤에서 날아온 공격을 걷어냈다.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으로 인해 침입자들이 놀라 주춤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제복을 입은 건 기사고, 얘네들은 또 뭐야?”
“넌 누구냐!”
기사도 아니고 자객도 아닌 상대의 출현에 버티고 있던 탈리온의 기사들이 당황했다. 나일은 방심하고 있던 자객에게 매섭게 검을 휘두르며 대꾸했다.
“아, 나는 그냥 손님. 근데 이쪽은 어떻게 하죠? 죽여도 되는 건가요?”
자객 둘의 검을 받아치면서 나일이 기사에게 물었다. 그 모습이 여유로워서 기사는 말을 잃었다.
“대답을 안 하면 나도 난감하잖아요.”
“컥.”
나일은 검으로 자객의 어깨를 내리치는 동시에 상대를 냅다 걷어찼다. 등 뒤에서 날아오는 검을 받아치고 쓰러진 놈의 머리를 다시 걷어차 버렸다.
나일의 검은 눈으로 좇기도 어려울 만큼 빠르게 상대를 몰아쳤다. 자객들이 당황한 사이 기사들도 함께 달려들어 밀어붙였다. 상황은 금세 역전되었다. 셋이 쓰러지고 나머지 셋은 황급히 자리를 이탈했다.
“쫓지 마라. 여기를 지키는 게 우선이야!”
자객들이 1층으로 달아나는 걸 보면서 기사 하나가 소리쳤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기사들은 검을 내리지 않은 채 나일을 돌아보았다.
“누구십니까? 누구신데 이 시간에 저택에 계신 겁니까?”
도움을 받았지만 기사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나일은 검집에 검을 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 손님이라고 했잖아요.”
“저희가 알고 있는 손님은 마이헬러가에서 온 분들뿐입니다. 다른 분은 보고받지 못했습니다.”
“도와줬는데 되게 꼬장꼬장하게 따지네요.”
“신분을 밝히십시오.”
“음, 그게 말이죠. 좀 곤란한데.”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던 나일이 검집을 드는 순간 기사들도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기사의 검날과 나일의 검집이 충돌하며 불꽃이 튀었다. 동시에 기사의 검을 뱀처럼 휘감아 급소를 찔러 들어갔다.
“끅.”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기사들을 돕던 나일이 태도를 바꾼 것은 순식간이었다.
동료가 쓰러지는 걸 보고 나머지 기사가 달려들었다. 그러나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눈앞에서 번쩍 불꽃이 튀었다.
“너, 이게 무슨… 컥!”
기사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휴. 뭐가 이렇게 복잡해.”
나일은 쓰러진 이들이 의식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복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가씨, 정리됐습니다. 나오세요.”
나일의 목소리를 듣고 사용인들이 다니는 통로 안쪽에서 아시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을 가린 후드 망토에 간편한 바지 차림을 하고 바짝 얼어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에 나뒹구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시신처럼 널브러진 모습에 가슴이 오그라든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외면했다.
“우리가 날을 잘못 골랐네요. 설마 탈리온 저택을 습격하는 간 큰 놈들이 있을 줄이야. 덕분에 일이 쉬워진 건지 더 어려워진 건지. 내가 아가씨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알고 계시죠?”
나일은 얼굴을 찡그리며 줄줄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냥 나한테 시키시면 좀 좋아. 이런 일에 아가씨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다고요.”
“탈리온 공작가도 믿을 수가 없어. 약이 제대로 전달이 될지 어떻게 알아?”
말은 그렇게 해도 실상은 드루쉬아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만 앞뒤 생각할 정신도 없을 만큼 애가 탔다.
“여기가 공작의 침실이라고?”
아시카는 커다란 갈색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나일의 재촉에 아시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손잡이를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