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41화 (41/153)

#41.

아시카의 표정은 전에 없이 초조했다. 억지로 평정을 가장해도 불안감에 심장이 죄어들고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서 불쑥 튀어나와 정신을 흔들어놓았다. 목구멍에서 치밀어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도무지 정체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 꿈.’

악몽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현실과는 하나도 맞지 않는 말도 안 되는 꿈. 그러나 목전에 닥친 자신의 죽음보다 생명이 꺼져가던 남자의 절박한 눈빛에 가슴이 무너졌더랬다.

‘그 꿈이 진짜로 현실에서 닥쳐온다면?’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몸이 덜덜 떨려서 양손을 맞잡았다. 제 몸이 떨리는 게 아니라고. 마차가 흔들려서 그런 것뿐이라고 애써 자신을 설득하면서.

“추우세요?”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마주 앉아있던 나일이 물었다. 아시카는 고개를 저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븐에게 내가 간다고 전했지?”

“네. 오늘 내내 샵에 있을 거라고 했어요. 저기 그런데 아가씨.”

나일이 아시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그 여자,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어요. 저도 도움을 받긴 했지만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서요. 너무 쉽게 믿지는 마시라고요.”

아시카는 가만히 나일의 얼굴을 살폈다. 그도 만난 지 오래되지 않았다. 의심스럽기로 치자면 나일이 더 하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다른 이를 조심하라고 충고를 한다.

“나일,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당신도 조심해야 맞아.”

“그건 아니죠! 저는 그냥 보이는 그대로의 사람이에요. 누굴 속이거나 뒤통수칠 인물이 못 된다고요.”

나일은 펄쩍 뛰며 부정했다. 당연한 일이건만 의심받았다는 사실에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았다.

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태도가 솔직해서일까. 나일은 상대의 신뢰를 쉽게 얻어내는 사람이었다. 아시카는 언제부턴가 나일을 경계하지 않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차가 아트샵 앞에 멈췄는데도 나일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염려와 고민이 가득한 얼굴은 사뭇 진지하기까지 하다. 나일의 고민을 아시카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나는 지금 이븐이 필요해.”

치료가 불가하다는 희귀병의 치료제를 만든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븐에게는 해결책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은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아시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에서 내리자 나일도 뒤를 따랐다.

“제 말을 잊지 마세요.”

나일은 그녀의 뒤를 쫓으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하지만 아시카의 귀에는 더 이상 나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븐을 만나서 답을 찾지 못하면 어쩌나, 생각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도 리네라는 여자가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지난번처럼 으슥한 방이 아니라 햇볕이 잘 드는 응접실이었다.

“어서와, 레이디. 약속보다 일찍 왔어.”

이븐은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두 사람을 맞이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목 끝까지 가린 검은 드레스에 팔뚝을 뒤덮은 긴 검은 장갑, 대충 말아 올린 머리칼은 햇빛을 받아 금빛과 붉은색이 기묘하게 어우러졌다.

붓으로 그려 넣은 것처럼 섬세한 이목구비에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창백한 피부 아래 푸른 핏줄이 희미하게 비치는 것이 조금은 기괴하게 느껴진다. 아름다우면서도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레이디?”

“아.”

이븐의 목소리에 아시카는 정신을 다잡았다.

“뭐가 급해서 이렇게 부랴부랴 나를 찾았나?”

“저기, 연금술사라고 하셨죠. 약을… 치료법을 찾고 싶어요.”

이븐의 시선이 잠시 아시카에게 머물다 리네에게 손짓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네가 두 사람 앞에 있는 찻잔을 채웠다.

“연금술사는 치료사가 아니야. 악물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치료보다는 연구와 실험이 우선이지. 뭐 그러다 운 좋게 치료제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그러니까 당신 도움이 필요해요.”

“뭘 원하길래 이렇게 적극적일까.”

아시카의 조급한 마음을 읽었는지 이븐은 노골적으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아시카는 대답 대신 가지고 온 가방에서 피 묻은 셔츠를 꺼내 보였다.

“독에 중독되어 쓰러진 사람이 있어요. 벌써 몇 주째 수도에서 내로라하는 의원들조차 원인을 찾지 못했고요.”

이븐은 피 묻은 셔츠를 가만히 바라보다 아시카에게 시선을 옮겼다.

“궁금하네. 레이디가 이렇게까지 급하게 쫓아와서 구하려는 사람이 누군지.”

“그건….”

“내 도움이 필요하다며. 그럼 솔직하게 말해줘야지.”

이븐의 태도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원하시는 만큼 비용을 지불 할게요. 방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이런 일은 돈보다 신뢰가 우선이야. 그 정도는 알지 않아?”

이븐의 어조는 정중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압박이 느껴졌다.

아시카는 손에 든 셔츠를 움켜쥐었다. 이미 수도 전체에 드루쉬아에 대한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있었다. 어차피 비밀이랄 것도 없는 사건이었다.

“얼마 전 탈리온 공작이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이 옷의 주인이 탈리온 공작이야?”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커졌다. 이제야 흥미가 생긴 듯 창백한 손으로 피 묻은 셔츠를 받아들었다.

아시카는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로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전에, 이걸 가져온 레이디는 누구신가?”

이븐의 질문에 아시카는 입을 닫았다. 그녀가 망설이는 걸 알아차리고 이븐이 셔츠를 내려놓았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솔직히 말해달라고 했지?”

이븐이 원치 않는다면 아시카를 도울 이유가 없었다. 제국 내에서 연금술사는 귀했고 아쉬운 것은 아시카였다. 머뭇거리던 입술이 다시 열리고 결국 이븐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아시카…, 아시카 이그레인.”

이븐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반짝이는 진갈색 눈동자가 오히려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놀라지 않는 걸 보면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나일이 말해주던가요?”

“아가씨! 전 그런 적 없어요!”

조용히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일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억울해하는 나일의 반응은 이븐의 관심 밖이었다.

“오해하지 마. 나름대로 정보책이 있어서 확인해둔 것뿐이야. 그래도 이름쯤은 직접 듣고 싶었어. 레이디 이그레인.”

아시카의 신분을 알고 태도가 돌변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묘하게 부드러워진 느낌이랄까.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말투조차 바뀌지 않았다. 그것이 어쩐지 이븐에게 어울려서 거슬리지 않는 것이 기묘하다.

나일은 저를 무시하는 이븐에게 구겨진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래서, 방법이 있긴 한가요?”

“확인을 해봐야 하는데, 여기서는 어렵고.”

“어디로 가면 되죠? 제가 따라가도 되나요?”

“아니….”

응접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아시카의 눈이 반짝였다. 거절의 말을 뱉으려던 이븐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옮기지. 따라오는 건 좋은데 위험하니까 아무것도 만지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마. 알았지?”

아시카와 나일은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샵이 있는 건물 정면을 제외하고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였다. 세 사람은 비좁은 복도와 문을 여러 번 통과해서 더 깊이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이 아닌 경사진 길을 여러 번 오르내려서 목적지가 몇 층인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디 가서 길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여기서는 까딱하면 갇히겠는데요.”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게 아니냐며 나일이 툴툴거렸다. 아시카는 기이한 건물의 구조보다 다른 것에 의문이 들었다.

‘왜 사용인이 하나도 없지?’

이 커다란 건물에서 마주친 사람이라고는 이븐과 리네 단둘뿐. 고가의 장식품을 생각하면 경비라도 있어야 마땅한데 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어딘지도 모를 길을 돌아서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넓은 실험실이었다. 언제 왔는지 리네가 자질구레하게 흩어진 도구들을 치우고 바닥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뒤 잠시 고민하던 이븐은 내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정체불명의 약병이 가득한 테이블로 다가가면서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탈리온과 이그레인은 제국에서 앙숙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지 않아? 그런데 어쩌다 레이디 이그레인이 나섰을까?”

아시카는 드레스 자락을 가만히 손에 쥐었다. 저 질문이 나오지 않을까 내내 긴장했던 터였다.

“소문을 들었다면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도 아시겠죠.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저도 신세를 갚으려고요.”

코랄과 파혼하는 과정에서 드루쉬아에게 도움받은 것이 수차례였다. 앙숙이라던 둘의 관계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이븐은 피 묻은 셔츠를 잘라 작은 약병에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인연이란 참 재밌기도 하지.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을 보면.”

“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챙그랑-!

이븐이 손에 들고 있던 약병을 내팽개치다시피 떨어트렸다.

“마님!”

유령처럼 표정 없던 여자가 이븐에게 달려갔다.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 아시카와 나일도 얼어붙었다.

이븐은 산산조각난 바닥을 노려보며 바르르 떨고 있었다.

“저게 왜….”

“마님, 물러나세요. 제가 치우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리네 저리 가.”

리네가 유리 조각을 치우기 위해 맨손으로 달려들자 이븐이 황급히 가로막았다.

“이븐, 무슨 일인가요?”

아시카가 다가오려고 하자 이븐은 손을 들어 막았다.

“이 셔츠가 탈리온 공작의 것이라고 했지?”

재차 확인하는 눈동자가 사나웠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흉흉한 기세에 아시카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븐의 눈동자에서 광기와도 비슷한 안광이 스쳐 갔다. 그러나 사나운 기세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순식간에 이븐은 평소와 다름없는 여유로운 얼굴이 되었다.

“후. 내가 손님을 놀라게 했네. 내 살아생전에 이걸 또 보게 될 줄은 몰랐거든.”

아시카는 바짝 힘이 들어가는 두 손을 맞잡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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