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40화 (40/153)

#40.

탈리온의 이름을 지닌 선조들의 모습이 가득한 전시실. 그림이 상하지 않도록 창문에는 어둑한 커튼을 쳐두었다. 드루쉬아는 기묘한 어둠을 마주하고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멍한 시선이 천천히 흘러가다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가문의 지위를 과시하듯 커다란 초상화가 가득한 벽 한가운데 유독 작은 액자가 눈에 띄었다.

손바닥 두 개를 펼쳐놓은 크기에 특이하게도 둥근 형태의 액자였다. 거기다 액자 상단에는 커다란 보석까지 박혀 있었다. 기묘한 청보라빛 보석은 어둠 가운데서도 선명하게 자기 색을 드러내었다.

‘초대 가주의 초상화가 아닌가.’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들은 적이 있었다. 이렇게 작고 볼품없어 보이는 액자 속 인물이 탈리온 가문의 시초였다고.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가자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툭 떨어지고 말았다. 바람도 불지 않는 밀폐된 방 안에서.

‘어라. 왜?’

떨어진 액자가 바닥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단단하게 박혀 있던 청보라빛 보석까지 툭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이런 세상에. 이게 왜 떨어져?”

세공사를 불러야 하나, 액자 장인을 불러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어디 계십니까! 지급입니다!”

다급한 목소리에 드루쉬아는 일단 보석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바닥에 떨어진 액자는 주워서 선반에 올려두고 마음속으로 사죄의 인사를 올렸다.

‘조만간 사람을 불러 수리해드리겠습니다.’

“공작님, 어서 나오십시오!”

그를 찾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래층에서 들리는 소음이 심상치 않아서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드루쉬아는 황급히 전시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 *

“흐윽….”

“공작님! 정신이 드십니까?”

칼프의 목소리가 드루쉬아의 귓가에 왕왕 울렸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지만 시야가 뿌옇게 흐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공작님. 저 칼프입니다.”

대답하려 해도 혀가 굳어서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마저 안개가 낀 것처럼 제대로 생각이 돌아가지 않았다.

“…집, 무실… 봉쇄… 조부, 님….”

“집무실을 봉쇄하라는 말입니까? 영지에는 이미 연락했습니다.”

드루쉬아는 느리게 눈을 깜박여 긍정을 표시했다. 칼프에게 고정된 시선이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보고….”

현재 상황을 보고하라는 말이었다. 칼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공작가 주치의는 ‘알 수 없다’며 답을 내리지 못했고 마이헬러의 주치의는 그보다 더 절망적인 답을 내놓았다.

「해독이 까다로운 독입니다. 치료는 가능한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고 큰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후유증이라 하면?」

「몸을 운신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제국의 대가문을 이끄는 건장한 사내에게 하루아침에 사형선고와 같은 진단이 내려졌다. 그걸 어찌 제 입에 올릴 수 있을까.

“조금 더 경과를 지켜봐야 한답니다. 치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칼프는 완곡하게 돌려 말했지만 드루쉬아는 그 말속에 숨겨진 불안을 읽었다. 하지만 생각마저 제 뜻대로 이어지지 않아 의식이 가물가물해진다.

순간 방문이 열리며 샤프리가 뛰어 들어왔다.

“드루! 정신이 들어?”

눈앞의 형체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샤프리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들었다. 드루쉬아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이 보였다.

‘왜?’

초점을 잃은 탁한 눈동자는 그 와중에도 의문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강력한 수마가 몰려오며 깨어있으려는 그의 의지를 집어삼키고 말았다.

“드루, 드루!”

샤프리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드루쉬아의 손을 잡았다. 다시 의식을 잃은 드루쉬아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에 깨어났던 거 맞죠? 드루가 뭐라고 하던가요?”

칼프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샤프리를 내려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크라우니 남작.”

“실례하겠습니다. 레이디 마이헬러.”

칼프는 샤프리의 질문을 가볍게 흘려넘기며 방을 나섰다.

수년 동안 얼굴을 봐왔는데도 칼프는 여전히 딱딱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불친절하니 그나마 위안이랄까.

“어휴, 저 철벽.”

샤프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드루쉬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잡은 손은 크고 서늘했다. 오랫동안 친우였고 약혼녀였는데 이 손조차 잡아본 기억이 몇 번 되지 않았다.

“주인이나 가신이나, 어쩜 그리 닮았는지.”

“레이디 마이헬러. 공작님께서는 쉬셔야 합니다.”

밖을 지키고 있던 기사는 여전히 문을 닫지 않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샤프리는 드루쉬아의 손을 이불 속으로 밀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정말 까다롭게 굴기는.”

샤프리는 드루쉬아의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마지못해 방을 나섰다. 호위 기사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드루쉬아의 안색을 확인하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드루쉬아가 깨어난 것은 마이헬러의 주치의가 치료를 시작한 다음 날이었다. 최악까지 생각하고 있던 공작저의 사람들은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마 뒤 드루쉬아보다 먼저 혼수상태에 빠졌던 킨빌도 깨어났다. 그러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이라 침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날 거라는 기대와 달리 드루쉬아는 가끔 의식을 되찾을 뿐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샤프리는 약혼녀의 자격으로 내내 탈리온 공작저에 머물렀다.

* * *

이그레인 저택의 정원은 다른 귀족 저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컸다. 그 안에는 본채를 둘러싼 건물 외에도 여러 개의 별채가 있었다. 그중에는 사냥을 좋아했던 가주가 지어놓은 사냥용 별채도 있었다.

본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데다 이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서 먼지만 가득한 장소. 아시카는 낡은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별채는 커다란 방 하나 크기로 한쪽 벽에는 각종 무기와 사냥도구들이 주렁주렁 걸려있고, 바닥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벽에 기대어 놓여있었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아가씨.”

잔느와 함께 온 사람은 못 보던 얼굴이었다.

“그래, 새로운 소식이 있어?”

차분한 표정이지만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긴장이 느껴졌다.

“여전히 못 일어나고 계십니다. 탈리온 공작님의 원래 업무는 보좌관이 처리 중인 것 같고, 기사단장이 저택을 봉쇄했답니다. 사실상 외부인은 접근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서른 남짓한 여자는 동생이 탈리온 공작저의 하녀로 일한다고 했다. 진작부터 종종 소식을 전해줬는데 직접 만나자고 연락이 온 것은 처음이었다.

“공작님의 약혼녀가…, 레이디 마이헬러가 거기 있다고 하지 않았어?”

“네. 그분만 예외적으로 머물고 계십니다. 마이헬러의 주치의 덕에 공작님이 깨어나신 거라 치료는 전적으로 그쪽에 의존하는 모양입니다.”

“벌써 열흘이 넘어가고 있어. 차도가 없다며? 치료가 되고 있는 게 맞아?”

아시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여자의 책임이 아닌데 저도 모르게 추궁하는 어조가 되었다.

도망치듯 탈리온의 안가를 빠져나올 때만 해도 드루쉬아의 얼굴을 마주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정말로 저가 미쳐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남자가 문제를 알아차리지는 않았을까. 어떻게 하면 함께 보냈던 그 밤을 무마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애태웠다.

그런 아시카에게 들려온 날벼락 같은 소식.

대공령으로 가던 드루쉬아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의식을 잃었다고. 원인 모를 중독으로 사경을 헤매더란 얘기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검에 능한 사람이니 차라리 자객의 습격을 받았다면 이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그럼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

“저… 이것을.”

여자는 들고 온 가방 안에서 피 묻은 셔츠를 꺼냈다.

“이게 뭐지?”

“태우려고 소각장에 던져둔 걸 몰래 빼 왔답니다. 공작님께서 처음 실려 왔을 때 입고 있던 옷이라고 들었습니다.”

검붉게 말라붙은 흔적을 보고 아시카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 사람이 흘린 피야.’

손이 덜덜 떨려서 차마 받아들지도 못했다.

그 남자가 뭐라고. 어쩌다 이상한 계기로 하룻밤을 보낸 남자일 뿐인데. 그녀만 보면 으르렁거리고 끈질기게 괴롭혀서 그토록 꼴 보기 싫었던 남자가 아니었나.

아시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걸 태우려고 했다고?”

“이상하군요. 사고 당시의 증거물이 아닙니까?”

잔느는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이해할 수 없기는 아시카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내버린 거지?”

“모릅니다. 조사과정에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요.”

여자의 대답에 아시카는 고개를 저었다. 무려 탈리온 공작에 대한 시해 사건이다. 그렇게 허술하게 처리할 리 없었다.

“수고했어. 증거물은 내게 주고 동생에게는 조만간 연락이 갈 거라고 전해줘.”

아시카는 준비해 온 수고비를 여자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들고 여자가 활짝 웃었다.

“잔느, 나일은 어디에 있어?”

“제네스 경의 사무실에 있을 겁니다.”

아시카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쁘게 건물을 나갔다. 아시카가 사라지고 얼마 뒤, 잔느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여자를 저택에서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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