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38화 (38/153)

#38.

안가에 도착한 직후, 드루쉬아는 치료사를 아시카에게 보냈다. 그러나 치료사는 방문턱도 넘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시카가 문을 열어주지 않은 탓이다.

소식을 전해 듣고 드루쉬아는 망설였다.

‘달리는 말에서 떨어졌는데.’

부상이 없더라도 충격이 작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레이디 이그레인.”

문밖에서 몇 번을 노크해도 아시카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염려는 초조함으로 바뀌었고 직접 확인해봐야 안심이 될 것만 같았다.

“레이디 이그레인, 잠시 실례하지.”

혹시 잠든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예상외로 아시카는 깨어 있었다. 테이블을 앞에 두고 우아하게 앉은 채로.

“와인?”

하녀장이 숙면을 도와줄 와인을 내줬다고 하더니 그걸 혼자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 대답을 안 해? 몸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 나도 대처를 할 것 아닌가.”

아시카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이상하리만치 느린 움직임이었다.

“레이디 이그레인?”

그 목소리가 신호가 된 것처럼 아시카가 돌아보았다.

“…르쉬아.”

배시시 웃는 얼굴에는 어떤 사심도 그늘도 보이지 않았다. 그간의 신경전이 무색할 만큼 살가운 미소였다.

드루쉬아는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준비되지 않은 채 한껏 후려 맞은 사람처럼 놀란 심장이 술렁거렸다.

아시카는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공기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발걸음이 기묘하게 시선을 당긴다.

“레이디 이그레인, 술에 취했어? 왜….”

“르쉬아….”

아시카의 하얀 손이 다가왔을 때, 드루쉬아는 홀린 듯이 자리에 얼어붙었다. 가녀린 팔이 목을 휘감고 그의 얼굴을 당길 때도 거부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흡.”

와인에 젖은 입술이 살며시 그의 입술을 덮었다. 작은 혀가 입속으로 파고들어 두툼한 혀를 조르듯이 비벼댄다. 달콤한 와인의 맛이 그녀의 향기와 함께 입속으로 스며들었다.

혀에 감기는 미끄덩한 느낌과 함께 잊고 있던 아찔한 감각이 깨어난다.

“흐….”

작은 입술이 그의 입술을 물고 놓지 않았다. 망설일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입안의 살덩이를 휘저으며 빨아당겼다.

숨이 달아올랐다. 심장이 쿵, 쿵 요란하게 진동하고 아랫배에서부터 뻐근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드루쉬아는 그녀의 뒷머리를 끌어당기며 혀뿌리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노련한 혀끝이 아시카의 입술을 파고들어 내밀한 점막을 문질렀다.

“흐응….”

교태 섞인 신음이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다. 달뜬 호흡이 엉키면서 아시카는 더욱 몸을 밀착했다. 말캉한 여자의 살집이 단단한 근육 위로 뭉그러졌다.

“…하….”

입맞춤이 농밀해지면서 아시카의 한숨 같은 신음이 더해졌다. 그가 밀어붙이는 힘에 아시카는 뒷걸음질 치다 침대 모서리에 부딪혀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도 드루쉬아는 멈추지 않았다.

침대 위에 쓰러진 여자는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가 되었다. 드루쉬아의 체중에 짓눌려 헐떡이면서도 그의 목에 감은 팔을 풀지 않았다. 아시카가 갈아입은 얇은 드레스 아래 매끄러운 몸의 곡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아, 당신이….”

드루쉬아는 달라붙어 있던 입술을 간신히 떼면서 속삭였다.

“먼저 시작한 거야. 멈추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아아, 르쉬아….”

애절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드루쉬아의 마지막 인내심을 집어삼켰다. 멈추라고 한들 멈출 자신도 없었다. 당장 이 여자를 가져야겠다는 욕망 외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잔잔한 들꽃 향기 같은 체취는 어떤 최음제보다도 강력했다.

그래서였다. 차마 거부하지 못한 것은.

장애물처럼 제 손길을 가로막는 얄팍한 드레스를 단번에 걷어내면서 저에게 닿는 쾌감을 거부하지 않았다.

* * *

텅 비어버린 침대가 이렇게 휑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비릿한 정사의 향기가 아직도 남아있는데 꿈처럼 제 하룻밤을 점령했던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망연자실 중얼거리는 목소리마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비어있는 침대를 바라보고 느끼는 감정은 안도여야 할 텐데, 그보다는 허전함, 혹은 상실에 가까웠다.

“그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이그레인이었다. 그 깨달음이 주는 후폭풍은 제법 사나웠다. 그러나 더 기막힌 것은 조금의 후회도 들지 않는다는 거였다. 차라리 자신이어서 다행이라는 미친 생각까지 들었다.

“처음…. 그 여자 처음이었어.”

한 번도 추문이 없다 했더니 실제로 연애 경험조차 없었을 줄이야.

“그런데 왜 하필 나지?”

이걸 빌미로 무슨 요구를 하려고?

거기까지 생각이 뻗어가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것은 분노나 의심이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화가 나기보다 어떤 요구를 해올지 기대가 되었달까.

그렇다. 그건 기대감이 섞인 묘한 흥분이었다.

“감히 나를 덮쳐놓고 내뺐단 말이지.”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를 농락한 대가를 철저히 갚아주리라. 그렇게 마음먹으면서도 격정적으로 뒤엉켰던 여자의 나신이 끈질기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 * *

“애거나이트, 너에 대한 처벌은 대공령에 다녀온 뒤로 미룬다.”

드루쉬아의 지시에 애거나이트는 고개를 떨궜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드루쉬아의 시선은 차기만 하다. 뒷골목의 무뢰배도 감히 하지 못할 짓을 제 기사가 저질렀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너무 기가 막혀서 당장 처분을 고민하는 것조차 암담했다.

드루쉬아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그놈에게 알아낸 건? 레이디 이그레인 옆에 찰싹 붙어 있던 그놈.”

“그게….”

나일을 떠올리자 애거나이트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하룻밤 사이 켜켜이 쌓인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나일이라는 이름 말고는 내놓은 정보가 없습니다.”

그것도 본인 입으로 말한 게 아니라 아시카가 그리 불러서 알아낸 사실이었다.

“보통 놈이 아닙니다. 밤새 잠도 안 재우고 캐물었는데 자신의 정보는 한 마디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캐물었다기보다 일방적으로 휘둘린 수준이랄까. 죄인을 잡아들인 게 아니니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 실망스러웠다.

드루쉬아는 떨떠름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어제오늘 벌어졌다. 적어도 그가 알던 이그레인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뒤를 왜 쫓아왔는지 물었어야 했는데.’

더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느라 까맣게 잊고 말았다. 어젯밤 기억을 떠올리자 목구멍에서부터 홧홧한 열기가 올랐다.

‘사람이 완전히 뒤바뀐 것 같아.’

정체 모를 남자를 가까이하고 드루쉬아를 유혹하기까지 했다. 최근 들어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만날 때마다 평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지난달까지 보고받은 내용에는 없던 놈이야. 이그레인의 인물 정보를 다시 파악해야겠어.”

이렇게 무능한 가신이 아니었는데, 애거나이트는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번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드루쉬아는 예정대로 안가를 출발했다.

일행은 드루쉬아와 애거나이트, 호위 기사인 킨빌과 미하일이 전부였다. 드루쉬아에게 호위는 필요치 않았기에 사실상 잡일을 처리하기 위한 동행이었다.

폭이 넓은 숲길을 지나 외부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샛길로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으아아앙.”

울창한 숲 너머 메아리처럼 울리는 소리에 모두가 말을 멈췄다.

“아이 울음소리가 아닌가?”

“마차가 다니는 길 쪽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확인하고 가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에 아이의 울음소리라.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다. 네 사람은 가던 길을 되돌아서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옆으로 기울어있는 마차가 보였다. 그 옆에는 마부인 듯 보이는 사내가 한 손에 피를 흘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어이쿠, 나리들. 저 좀 도와주세요.”

사내가 드루쉬아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아이 울음소리를 들었는데?”

“제 처와 아이가 비탈로 미끄러졌는데 끌어 올릴 수가 없어요. 어떻게든 좀 도와주십시오.”

드루쉬아와 기사들이 말에서 내리자 사내가 앞장서서 길옆을 가리켰다. 산길이라서 한쪽은 산비탈로 막혀 있고 한쪽은 뚝 떨어지는 급경사였다. 울음소리는 급경사 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여기, 이쪽입니다.”

“흐아앙. 아빠아!”

“여보!”

마부의 처로 보이는 여자가 예닐곱 살쯤 된 아이를 안고 급경사에 아슬아슬 걸쳐 있었다. 낭떠러지는 아니지만 풀 한 포기 없는 가파른 바위 경사라서 삐끗하는 순간 아래로 굴러떨어질 수 있었다.

“마차를 살피는 동안 아이가 아래로 미끄러졌습니다. 제가 마차 바퀴를 빼려다 다치는 바람에… 아내가 구하러 내려갔다가 올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부까지 내려갔다간 셋이 함께 떨어질 판이라 이도 저도 못 하던 참이었다.

“밧줄이 없나?”

“있기는 한데 길이가 길지 않습니다.”

마부가 초조한 얼굴로 바로 근처의 나무를 돌아보았다. 여자와 아이가 있는 곳까지는 거리가 멀어서 밧줄을 사용하기 어려워 보였다.

“가져와 보게. 사람이 여럿이니까 충분할 거야.”

“예, 나리.”

드루쉬아의 말을 이해하고 마부는 기울어있는 마차로 다가갔다. 마차 안쪽을 뒤적이는가 싶더니 밧줄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애거나이트가 밧줄을 받아 가장 체구가 호리호리한 미하일의 허리에 묶었다.

“둘이 지탱하고 하나가 내려가면 되겠어.”

드루쉬아의 지시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잡았다.

애거나이트와 킨빌은 위쪽에서 밧줄을 잡아주고 미하일이 가파른 바위 위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밧줄을 거의 끝까지 내렸을 무렵 여자와 아이가 있는 곳에 닿았다.

“아이 먼저.”

울고 있던 아이는 가까이 다가온 미하일의 품으로 옮겨졌다. 두 사람이 밧줄을 당겨 길이 있는 위쪽까지 다다랐을 무렵 드루쉬아가 팔을 내밀어 아이를 받았다.

“흐에엥.”

겁에 질린 아이는 드루쉬아의 목에 팔을 감으며 덥석 달라붙었다.

“어이쿠, 녀석아. 이리 와. 나리께 그러면 안 돼.”

귀족의 값비싼 옷이 상할까 봐 마부가 아이에게 손을 내밀며 채근했다. 그러나 아이는 더 크게 울음을 터뜨리며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애가 많이 놀란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나리.”

마부는 거듭 사죄하며 아이의 몸을 힘주어 당겼다.

아이가 떨어지면서 드루쉬아의 목 뒤로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버티던 아이가 손톱으로 긁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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