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포근한 이불과 낯선 향기. 꿈지럭거리는 몸에 보드라운 감각이 닿았다. 그 어떤 최고급 원단보다 매끄러운 사람의 피부가 아시카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두근, 두근. 제 것이 아닌 심장 소리에 한없이 안락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안온한 감각이 낯설기만 하다.
아시카는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커튼이 쳐진 창문 너머 나른한 햇살이 방을 가득 채웠다. 단조롭지만 고급자재를 사용한 방안의 장식들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여기가 어디야?’
아시카는 제 몸을 단단하게 감싼 팔을 확인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신체의 일부. 아시카는 눈알만 도르륵 굴려 옆을 확인했다.
헝클어진 금색의 머리칼은 햇빛을 받아 부서질 것처럼 빛이 났고 잠들어 있는 얼굴은 한없이 편해 보였다. 또렷한 선을 그리는 이목구비는 분명 그녀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헉….”
아시카는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눈앞이 아득해 질만큼 커다란 충격이 머리를 후려쳤다.
‘말도 안 돼. 내가 왜….’
그러나 당장 상황을 판단하는 것보다 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시카는 느리고 조심스럽게 침대가로 몸을 빼냈다. 맨살에 감긴 남자의 피부 감촉이 스르륵 미끄러지는 느낌이 생생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지금 이 순간 드루쉬아가 눈을 뜨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상상이 되지 않아서 눈앞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다행히 깊이 잠이 들었는지 드루쉬아는 그녀가 빠져나간 그대로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아니, 어젯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세상에, 맙소사! 그게 꿈이 아니었어?’
아시카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재빨리 옷을 찾아 걸쳤다.
‘일단 나가자. 나가서 생각하자.’
저 남자가 눈을 뜨기 전에 나가야 한다. 그가 쏟아낼 의혹과 무수한 질문이 두려워서 도망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건물 내부가 고요했다. 아시카가 현관문을 나서자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둘이 앞을 막았다.
“어디를 가십니까?”
“어제 나와 함께 있던 일행은 어디 있지?”
아시카는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물었다. 기사 둘이 눈짓을 주고받더니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기사의 안내를 따라가자 본채와 조금 떨어진 곳에 오두막 같은 건물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수런거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닥쳐.”
“이것도 신종 고문이냐? 왜? 아예 조용히 땅에 파묻어 버리지.”
“진짜 주둥이만 파묻어 버리는 수가 있어.”
“이 파렴치한 새끼야. 너 기사 완장 떼버리라니까. 쪽팔리지도 않냐?”
“말 돌리지 말고 불라고. 너 뭐 하는 놈이야?”
“밤새 똑같은 말 지껄이는 것도 안 지치냐? 그냥 앵무새를 가져다 놓지 그래?”
“이름에 금딱지 처발랐어? 그게 뭐라고 아껴?”
“똥 냄새나는 주둥이로 부르면 내 이름에서 똥 냄새날까 봐 아낀다, 왜?”
“이 새끼가 진짜!”
결국 참지 못하고 애거나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약이 오를 대로 올라 붉어진 얼굴로 콧김을 뿜어댔다.
씩씩거리는 그와 달리 창살 너머 갇혀있는 나일은 여유로웠다. 밤을 꼬박 새운 탓에 초췌해지기는 했지만 덩치 큰 기사를 앞에 두고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 아가씨만 따로 데려간 건데? 무슨 일 생기면 여기 다 뒤집어 버린다니까.”
“네 놈이 뭔 수로? 여기 있는 기사만 해도 몇 명인 줄 알아?”
“너 같은 놈 열이 달려들어도 안 무서워, 이 파렴치한 새끼야. 아가씨 내놓으라고.”
“왜 밤새도록 아가씨 타령이야? 그 여자한테 꿀이라도 발라놨어? 아니면 네가 뭐라도 돼?”
“그 아가씨는 내 책임이라고. 파렴치한 탈리온 기사 새끼랑 달라서 난 책임을 다하는 인간이란 말이지.”
“아, 진짜 이 새끼가 입만 살아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으르렁대느라 가까이 사람이 다가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시카는 놀라 입을 벌린 채 멈춰 섰다.
‘내가 주운 게 대단한 물건이었구나. 귀공자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거야?’
한마디도 지지 않고 상대를 살살 긁어대는 것이 이제껏 봐왔던 어떤 부류와도 달랐다. 자작가의 장남이라고 들었는데 거친 말투는 10년쯤 밑바닥에서 굴러먹은 용병 같았다.
함께 온 기사도 둘의 다툼을 보며 당황한 눈치였다. 애거나이트는 충직한 탈리온의 기사였다. 그런 사내가 수도에 온 뒤부터 전에 없던 문제를 일으키고 말싸움에 휘말려 으르렁대는 모습이 생소했다.
“저어…, 단장님.”
“뭐야!”
애거나이트가 버럭 소리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 아가씨!”
나일이 아시카를 알아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은 괜찮아요? 별일 없었어요?”
별일 없었냐는 나일의 질문이 아시카의 심장에 날아와 쿡 박혔다.
‘별일? 별일이야 있었지. 내 세상이 뒤집힐만한 일이.’
아시카는 떠오르는 생각을 간신히 억누르며 대답했다.
“나는…. 괜찮아. 근데 왜 나일을 본채가 아니라 여기로 데려온 거지? 이게 무슨 경우야?”
“그러게 말이에요, 아가씨. 이놈이 아주 작정하고 밤새 저를 달달 볶았다니까요.”
나일은 애거나이트를 손가락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창살에 달라붙은 채 눈초리를 뾰족이 세운 것이 마치 고자질하는 아이 같았다.
아시카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입가를 가렸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제 얼굴 좀 보세요. 밤새 한숨도 못 잤다고요. 여기 이 흙먼지들 보여요? 저 이런 데서 잠 못 잔다고요.”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애거나이트는 어이없는 얼굴로 나일을 노려보았다.
기가 막히기는 아시카도 마찬가지였다. 잠시나마 현재의 고민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탈리온 공작께서 내 일행을 감금하라고 지시한 건가?”
“손님으로 대접하라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애거나이트는 아시카의 시선을 피하며 툭 뱉었다.
아시카는 지위가 있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지만 나일은 달랐다. 귀족인지 평민인지 신분과 정체가 불분명한 상대. 공작의 뒤를 쫓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잡아둘 구실은 충분했다.
“나는 아직 그대의 처벌을 요구하지 않았어.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도 고민 중이야.”
아시카가 어제의 일을 걸고넘어지면 드루쉬아도 막아주기 어려웠다. 고위귀족 시해 죄. 모르고 했든 알고 했든 이는 분명 중죄였다.
애거나이트는 붉어진 얼굴로 대꾸하지 못했다. 그도 의도한 건 아니었다. 욱하는 마음에 내지른 것뿐. 상대가 같은 기사였다면 주먹다짐 몇 번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는 제국의 단 넷뿐인 공작가의 후계자인 데다가 가녀린 레이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을 만큼 파렴치한 짓이었다. 그래도 끝내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14년간 쌓여온 원망이 너무나 컸다.
하지만 아시카 역시 애거나이트의 잘못을 따져 물을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드루쉬아의 눈을 피해 떠나는 것이 더 급했다.
“그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지. 더는 탈리온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아. 내 일행과 말을 모두 내주도록 해.”
애거나이트는 아시카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어제 마구간에 넣어둔 말을 가져와.”
“네, 단장님.”
기사는 예를 갖추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애거나이트는 나일을 노려보며 으득 이를 갈더니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내 검.”
“저기 있잖아.”
나일에게서 압수한 검은 철창 앞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쓰레기 눈에는 죄다 쓰레기만 보이나 봐. 기사란 새끼가 남의 검을 아무 데나 던져버리게.”
“이 새끼가, 아직도 입이 살았어?”
“죽을 이유는 또 뭐 있어? 겁나는 구석이 하나라도 있어야 말이지.”
“너 이 새끼,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아 볼래?”
“기사가 검으로 싸워야지 몽둥이부터 들 생각을 해? 너 그거밖에 안 되는 놈이었구나?”
“야!”
나일이 박박 긁어대는 통에 애거나이트의 눈이 뒤집혔다. 광분해 달려드는 그를 기사들이 잡았다.
“아이쿠, 단장님. 제발 참으세요.”
“각하께서 아시면 경을 칩니다.”
나일은 길길이 날뛰는 애거나이트를 피하지 않았다. 검집에 올려진 손은 언제든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태껏 말로 실랑이하던 것과 달리 나일의 표정은 서늘했다.
그제야 아시카의 등골에 오한이 들었다.
‘화났구나.’
끝도 없이 말싸움을 하기에 원래 그런 성격인 줄 알았다. 반쯤은 농담처럼 여기기도 했고. 가볍게 여겼던 나일의 존재가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저… 나일.”
“네, 아가씨.”
애거나이트를 노려보던 시선이 아시카에게 옮겨가면서 유하게 풀어졌다.
“계획은 보류하고, 일단은 돌아가자.”
“말 타실 수 있겠어요?”
언제 싸웠냐는 듯 나일은 금세 애거나이트를 잊었다. 그 빠른 변화에 다들 속으로 혀를 찼다. 아직도 화를 삭이지 못한 건 애거나이트뿐이었다.
“난 괜찮으니까 앞장서. 여기 있어 봐야 좋은 꼴 못 보겠어.”
나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사가 가져온 말 위에 올랐다.
말을 타기 직전 아시카는 애거나이트를 돌아보며 차게 뱉었다.
“오늘 처음으로 탈리온 공작님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네.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주인을 곤란하게 만드는 가신은 애물단지나 다름없지.”
아시카의 말은 충고이자 경고였다. 나일에 이어 아시카에게까지 쓴소리를 듣자 애거나이트는 나무 기둥을 맨주먹으로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파이는 것이 보였다.
아시카는 조소하며 말에 올랐다. 그러나 다리를 올리는 동시에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악.’
말에 오르는 순간 아랫도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조금만 움찔거려도 욱신욱신 쓰린 통증이 느껴져서 앉아있기조차 어려웠다.
‘세상에,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상태로 말을 타고 별장까지 가야 한다니.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가씨?”
아시카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보고 나일이 다가왔다.
“힘드시면 말 하나로 움직일까요?”
“아니, 아니야. 갈 수 있어.”
할 수 없어도 해야 한다. 아시카는 미련 없이 말을 재촉해 출발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드루쉬아가 깨어나 마주치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아픔도 잊었다.
나일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말없이 아시카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