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마차가 멈추고 먼저 내린 드루쉬아가 아시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에게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며 그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사소한 일로 고집 피우지 말지?”
드루쉬아는 손을 거두지 않고 툭 뱉었다. 아시카의 손이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그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벌써 두 번째야.’
드루쉬아가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이런 날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아니, 둘의 관계는 이미 변하고 있었다.
아시카는 자신이 그를 거부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처음 황궁에서 기괴한 꿈을 꾸었던 그때부터 드루쉬아는 시시각각 다른 감정으로 그녀를 뒤흔들었다.
묻고 싶지만 차마 묻지 못하는 이야기. 서로 입을 다물고 외면하는 강렬한 끌림.
그 마차에는 왜 올라탔느냐고. 왜 겁에 질린 저를 내버려 두지 않았느냐고. 왜 그렇게 다정하고 달콤하게 입을 맞추었느냐고.
기사의 만행에 화가 나면서도 가까이에서 그를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귓가에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허공에 멈춰있던 손을 드루쉬아가 살며시 잡아끌었다.
“마차 문 앞에서 기도 같은 건 하지 마.”
콧방귀 뀌면서 무시할 줄 알았더니 그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모습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손을 잡을까 말까, 그 짧은 순간이 오히려 기대되었달까.
드루쉬아는 동요하는 속내를 애써 감추며 아시카를 이끌었다.
숲속에 지어진 건물은 어둠 속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 창가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아니라면 건물이 있는 줄도 모를 만큼 숲에 파묻혀 있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 별장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별장은 아닌데, 기사들이 오가면서 이용하는 곳이라 관리가 잘 되어 있지.”
“대공령까지 가는 길에 이런 곳이 얼마나 더 있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탐색인가. 우리 쪽 정보는 이그레인에서도 대부분 알고 있을 텐데?”
“나는 누구랑 달라서 시시콜콜 다 따져 확인하지는 않아요.”
“그래. 이그레인 공작과 레이디 이그레인이 다르다는 건 인정하지.”
드루쉬아는 선선히 수긍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서도 적대적이지 않은 태도가 묘하게 느껴졌다.
현관에 발을 들이기 전, 아시카의 등줄기에 서늘한 오한이 들었다.
‘뭐지?’
뒤를 돌아본 것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등 뒤에는 탈리온의 기사들과 나일이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어두운 숲을 지나 희미한 빛을 내는 하늘로 향했다.
‘그믐달이야.’
가느다란 형체만 드러낸 달빛이 어두울 법도 하건만 유독 시리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그 빛이 누군가의 시선처럼 느껴져서 등골이 오싹했다.
‘무슨 생각을.’
아시카는 몸서리를 치며 건물의 현관문에 발을 들였다. 밖에서 봤을 때 어두울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내부의 조명이 눈을 찌를 만큼 강렬했다.
어찔한 느낌이 들어서 아시카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홀이라고 말하기에는 작은, 그러나 외떨어진 안가치고는 제법 넓은 공간이었다. 단출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아시카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피로하실 텐데 침실로 안내해드리고 목욕물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아, 나와 함께 온 일행은….”
혹시 탈리온의 기사들이 나일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까 뒤늦게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뒤를 따르던 나일이 보이지 않았다.
“나일?”
나일뿐 아니라 탈리온의 기사들과 드루쉬아도 보이지 않았다. 저택 안쪽으로 앞서가는 여자만 보일 뿐.
아시카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기이한 이 느낌은 분명 처음이 아니었다.
“저기, 탈리온 공작님은?”
앞서가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잔잔하게 미소 띤 얼굴이 호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기사들과 여장을 확인하고 곧 들어오실 겁니다. 일정이 빠듯해서 꼼꼼하게 준비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모양입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시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여자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 침실에서 기다리기를 얼마간, 목욕물이 준비되었다는 말에 욕실로 향했다.
욕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 둘이 그녀가 옷을 벗는 걸 돕고 시중을 들었다. 홀린 듯이 몸을 맡기면서도 기이한 기분을 털어버릴 수가 없었다.
욕조 안에 발을 들였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피부를 감싸는 따뜻한 물에서 달콤한 꽃향기가 진동한 탓이다.
‘향유? 안가에 향유가 다 있어?’
기사들이 오가면서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곳에 향유와 여성용품, 꼭 맞춘 듯한 침의까지 준비된 것이 기이했다.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돌아왔을 때, 이상한 기분은 더욱 심해졌다. 침실 테이블에는 술병과 크리스털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저게 뭐지?”
“숙면을 돕는 와인이예요. 공작님의 지시대로 입맛에 맞게 준비해두었답니다. 내일 일정이 빠듯하기 때문에 최대한 편히 쉬셔야 한답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세요, 마님.”
두 하녀는 군더더기 없이 설명을 마치고 방을 빠져나갔다. 아시카는 하녀들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얼어붙었다.
‘마님? 누가? 내가?’
갑자기 머릿속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아시카는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생각, 생각을 해야 해. 뭔가 잘못됐어.’
그러나 아시카의 의심은 기이한 기억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황궁에서 올린 성대한 결혼식. 그러나 대공령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드루쉬아는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기사들과 함께 대공령으로 향했다.
아시카는 그와 만나기 위해 마차를 타고 따로 움직였다. 오늘 이곳에서 밤을 보내고 드루쉬아와 함께 탈리온의 영지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러니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제 것이 아닌 듯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가슴이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도통 가라앉지를 않네.”
아시카는 두 사람을 위해 준비된 술잔을 홀로 들이켰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홀로 술병의 반을 비웠다.
알싸하게 취기가 오를 무렵 침실 문이 열렸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는 그녀에게 퍽 익숙한 상대였다.
“아시카, 길이 험해서 오느라 힘들었지?”
“…르쉬아.”
속삭임과도 같은 다정한 부름에 드루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얼굴 가득 번지는 미소가 꽃처럼 화사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어. 속이 까맣게 타버릴 정도로.”
드루쉬아는 단숨에 달려와 아시카를 와락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이 그녀를 가두면서 나무향처럼 그윽한 체향이 훅 끼쳤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아시카의 심장이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공령 일은 어떻게 됐어?”
“아아, 그건 나중에. 결혼 첫날부터 신부를 버려둔 죗값을 치러야지.”
“르쉬아….”
“너무 그리웠어.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는데.”
귓가에 속삭이는 그윽한 음성에서 절절한 감정이 묻어난다. 깊게 내쉬는 숨결이 그간 참아왔던 그리움을 토해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줄기를 훑었다. 얇은 침의를 사이에 두고 뜨거운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드루쉬아의 손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망설임 없이 그녀의 옷 속으로 파고들어 보드라운 맨살을 움켜쥐었다.
땀에 흠뻑 젖은 묵직한 체구가 아시카의 전신을 짓눌렀다. 이마에 닿은 입술에서는 거친 숨결이 쏟아졌다.
“흐윽….”
아시카는 땀으로 미끈거리는 그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몸이 쪼개어질 것 같은 통증에 저도 모르게 손톱으로 그의 등을 확 긁어버렸다.
“아파… 르쉬아.”
“하아…, 아파?”
드루쉬아는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아파… 첫날밤인데, 제발 살살….”
드루쉬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아시카는 열기와 통증으로 정신이 혼미해서 그의 표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제야 드루쉬아는 미세하게 풍기는 피비린내를 깨달았다.
‘젠장. 어쩐지….’
통증으로 파르르 떨면서도 아시카는 그에게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르쉬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애처로운 목소리.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양손을 잡아 침대에 꾹 눌렀다. 처음이든 아니든 이미 늦었다. 멈출 수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흐릿해진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드루쉬아는 혀끝으로 그녀의 눈물을 핥아내며 천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으… 읍.”
아시카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뜨거운 입술이 삼켜버렸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이 그의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시카는 돌덩이 같은 그의 몸에 깔려 속절없이 흔들렸다. 거대한 바위 더미 아래 깔려 있는 기분. 그의 몸이 이토록 단단한 근육질인 줄 몰랐다. 격하게 부딪히는 충격으로 몸이 어딘가로 내동댕이쳐지는 것만 같았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안개가 낀 듯 흐릿한 머릿속으로 오늘이 첫날밤이라는 기억만 곱씹었다.
침실로 들어왔을 때 긴장한 그녀를 다독이며 춤을 신청하던 드루쉬아. 부끄럽게도 얇은 침의 차림으로 그녀를 안고 빙글빙글 돌며 즐거워하던 기억. 약간의 와인과 달콤한 입맞춤, 그리고… 그리고….
아시카는 정신을 수습하기가 어려웠다. 이제 그만 멈췄으면 싶기도 하고 이대로 꼭 안고 잠이 들었으면 싶기도 했다. 그녀에게 드루쉬아는 이렇게나 그리운 사람이었다.
“…르쉬아.”
아시카는 흠뻑 젖은 그의 등을 손으로 쓸었다. 움찔, 뭔가에 놀란 듯 드루쉬아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후….”
드루쉬아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더니 가쁜 숨을 토해냈다. 얼굴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지고 아직도 흥분해 있는 푸른 눈동자가 아시카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확인하려는 듯 집요한 시선이 그녀의 표정과 사소한 근육의 움직임 하나까지 살펴보았다. 왠지 모르게 긴장해 있는 얼굴이 우스워서 아시카는 그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손끝이 젖은 피부 위로 미끄러진다.
“푸훗….”
아시카가 웃자 드루쉬아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놀라워하는 듯도 했고 인상을 찡그리는 듯도 했다.
아시카는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한없이 먹먹하고 그리운 마음.
땀에 젖어 짙어진 금색의 머리칼과 저를 보는 깊은 눈동자, 촉촉이 젖어 생기 있는 입술과 혈색 좋은 뚜렷한 이목구비. 지금 이 순간 제 앞에 있는 남자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짧은 침묵 끝에 마침내 드루쉬아가 입을 열었다.
“…많이 아픈가?”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아시카는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괜찮아. 처음에는 원래 그런 거라면서.”
“그래, 처음에만 그런 거야.”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짓궂은 악동 같은 미소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제는 당신 차례야.”
“응?”
그 미소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기도 전에, 드루쉬아의 상체가 천천히 아래로 기울었다.
또다시 깊게 파고드는 감각을 느끼고 아시카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뜨거운 열기와 달뜬 숨이 온몸을 점령한다. 헐떡이는 숨결 사이로 그녀의 이름이 흘러들었다.
아찔한 감각에 시야가 아득해질 때까지 애타게 갈구하는 목소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