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35화 (35/153)

#35.

가문의 문장이 새겨지지 않은 검갈색 마차가 험한 산길을 달렸다. 드루쉬아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말보다는 마차를 택했다.

“대공성을 지키는 병력이 얼마나 되지?”

“영지의 병사 오십여 명 정도가 교대로 근무 중입니다. 이번에 파견된 기사들은 대공성 임무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부께서 보낸 기사들이지?”

“네.”

미하일은 핼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차 멀미에 누렇게 뜬 얼굴이 퍽 안쓰러워 보였다.

“조금만 참아. 안가에서부터는 말로 움직일 테니까.”

“네에….”

말로 바꿔 타는 건 마차 멀미 못지않게 고역스럽다. 그걸 아는 미하일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문득 마차를 두드리는 소리에 드루쉬아가 창문을 열었다. 마차를 호위 중이던 애거나이트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각하, 수상한 놈들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마차를 따라오는 게 확실해?”

“네. 몇 번 속도 조절을 했는데 내내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중입니다.”

드루쉬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대공령에 관한 소문으로 탈리온과 이그레인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대공령으로 가는 이번 여정에도 유독 신경이 곤두선 참이다.

‘그런데 미행이 따라붙다니.’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탈리온 소유의 안가가 나온다. 기사들의 이동이 잦은 만큼 대공령을 오가기 위해 오래전에 마련해 둔 장소였다.

거기서부터는 비공식적인 길을 통해 대공령으로 들어가는데 그 길을 아는 사람은 탈리온의 몇몇 기사들뿐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꼬리를 달고 갈 수는 없지. 떨궈버려.”

“네,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애거나이트가 마차에서 멀어졌다. 말의 방향을 바꿔 단숨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거친 산길에도 무서우리만치 빠른 속도였다.

꽤 먼 거리에서 마차를 뒤따르던 나일은 뜬금없이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에 긴장했다.

“아가씨, 잠시만요. 속도를 줄이세요.”

“뭐? 왜?”

앞서가던 나일의 외침에 아시카는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러나 채 답을 듣기도 전에 정면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뭐야? 앞서가던 일행 아냐?”

상대를 발견하고 아시카도 당황했다. 몸을 바짝 낮춘 채 말을 달리는 상대는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폭이 넓지 않은 산길이었다. 급작스럽게 말을 멈추는 것도, 정면에서 달려오는 말을 피해 가는 것도 모두 위험하다.

나일이 다급히 외쳤다.

“아가씨, 측면으로!”

아시카의 반응이 한발 느렸다. 그녀가 방향을 정하기도 전에 상대가 검을 손에 드는 것이 보였다.

“아가씨!”

애거나이트는 검집을 손에 드는 순간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망설임은 찰나였다.

이그레인 소공작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어떤 목적으로 탈리온 공작을 미행하는지 따위의 의문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더 바짝 몸을 낮춘 채 검집을 크게 휘둘러 아시카의 옆을 스쳐 갔다.

“아악!”

기사의 검집에 호되게 후려 맞은 말이 날뛰었다. 아시카는 고삐를 놓치고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해 나뒹굴었다.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은 꽤 멀리까지 전해졌다. 사그라지는 소리를 들은 드루쉬아가 마차를 두드렸다.

“마차를 멈춰.”

이내 마차가 멈추고 가까이 호위하던 기사들이 다가왔다.

“자네도 들었어? 이게 무슨 소리지?”

“비명인 것 같습니다.”

애거나이트가 미행을 처리하기 위해 홀로 말을 돌려 달려갔다. 그런데 들려온 것이 여자의 비명이라 기사들도 당황한 눈치였다.

“그 말, 잠시 빌리지.”

“네, 각하.”

기사는 군말 없이 자신의 말을 내주었다.

기묘한 예감이 스쳐 갔다. 드루쉬아는 굳어진 얼굴로 애거나이트가 사라진 방향으로 말을 달렸다.

문제가 생긴 장소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멈춰있는 세 필의 말과 바닥에 쓰러진 여자, 그리고 그녀를 부축하는 또 한 명의 남자.

낯익은 실루엣을 확인하고 드루쉬아는 경악했다.

“레이디 이그레인?”

아시카는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정신을 수습하기 어려웠다. 아시카 대신 분노한 나일이 언성을 높였다.

“무기도 지니지 않은 여자를 다짜고짜 공격부터 하는 게 탈리온의 기사도입니까?”

드루쉬아의 시선은 아시카와 나일을 거쳐 말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있는 애거나이트에게로 옮겨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애거나이트, 설명해.”

“뒤따르던 미행을 떨어트렸는데, 설마 이그레인 소공작님인 줄은 몰랐습니다.”

“몰랐다고? 당신 기사 아냐? 기사가 그 정도 거리에서 상대가 여잔지 남잔지, 아는 얼굴인지 모르는 얼굴인지도 못 알아봐?”

버럭버럭 소리치며 나일의 표정이 더욱 사나워졌다. 그러나 애거나이트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설마 소공작씩이나 되는 분께서 남의 마차 뒤나 쫓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애거나이트, 그만!”

드루쉬아는 재빨리 말에서 내려 아시카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나일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에 손을 얹었다.

“내가 탈리온 공작이다. 일단 다치지 않았나 확인부터 하지.”

“아, 저 망나니 같은 기사의 주인 되는 분이요?”

신분을 밝히자 나일은 더욱 날 선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나 드루쉬아에게는 상대의 적대적인 태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은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만 보일 뿐이었다.

“다가오지 마시죠.”

나일이 당장 검을 뽑을 기세로 몸을 움직였다. 그제야 드루쉬아는 장애물처럼 앞을 가로막은 나일을 확인했다.

“네 놈은 뭐지? 이그레인의 기사 중에 너 같은 놈은 본 적이 없는데?”

“아, 예. 기사 따위는 아닙니다. 그저 아가씨의 수행원일 뿐이죠. 그렇지 않아도 놀란 아가씨 더 놀라게 하지 마시고 갈 길 가세요.”

“일단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부터 해야 할 게 아닌가.”

계속된 방해에 드루쉬아의 인내심도 바닥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살벌한 기세를 쏟아내는데도 나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던 아시카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빙글빙글 돌던 머리가 제 자리를 찾고,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일….”

“아가씨, 괜찮으세요?”

“나 좀, 일으켜 줘.”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에 나일은 빠르게 반응했다. 후들거리는 아시카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상처가 없는지 눈으로 확인했다.

드루쉬아의 시선이 그런 두 사람의 움직임을 좇았다.

‘이건 뭐지?’

기사도 아니고 오래 알아 왔던 상대도 아닌데 아시카를 대하는 태도에 거리낌이 없다. 드루쉬아의 뱃속 깊숙한 곳에서 불편한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레이디 이그레인.”

“탈리온 공작님.”

아시카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나일에게 기댔던 손을 놓았다.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다친 데는?”

“제힘으로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까, 부상은 없나 보죠. 그나저나 델피노 남작.”

드루쉬아의 손짓에 애거나이트가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에는 미안함이나 죄스러움 따윈 없었다.

그 뻔뻔함이 기가 차서 아시카는 서늘하게 말을 뱉었다.

“아무리 날 죽이고 싶었어도 이런 방법은 너무 멍청하지 않아?”

“레이디 이그레인인 줄 몰랐습니다.”

억지로 내뱉은 변명이었다. 애거나이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 적의가 앞서서 저도 모르게 내지른 행위였다. 그도 자신이 잘못한 줄은 알고 있었다.

아시카는 이제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죽을 뻔했다는 위기감과 상대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내가 목이 부러져 죽기를 바란 모양인데 실패해서 어쩌나.”

노골적인 빈정거림이었다. 그러나 애거나이트뿐 아니라 드루쉬아조차 할 말이 없었다. 빈말이 아니라 재수가 없었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일단 부상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지 않나?”

“병 주고 약 주고 하시려고요? 제 몸은 제가 알아서 챙길게요.”

바닥에 뒹굴어 엉망이 된 몰골이어도 내치는 어조는 싸늘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물러나지 않았다.

“근처에 안가가 있어. 거기 치료사도 있고. 함께 가는 게 좋을 거야.”

“누가 제 목을 노릴 줄 알고요? 사양하겠어요.”

“이봐, 그건….”

드루쉬아는 얼굴을 구기며 애거나이트를 노려보았다.

애거나이트가 상대를 못 알아봤다는 말은 분명 거짓이다. 그러나 확인도 하지 않고 미행을 떨구라고 지시한 것은 자신이었다. 아시카가 자신의 마차를 쫓고 있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왜 그를 쫓았는지 따져 물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은 모두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그 몸으로 말을 타고 돌아가겠다고? 가까운 마을까지도 하루 이상 가야 하는데, 그 상태로 말이나 탈 수 있겠어?”

“날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탈리온의 기사들 틈에 끼는 것보단 낫지요.”

아시카는 덜덜 떨리는 손을 움켜쥐면서도 꼿꼿하게 고개를 세웠다. 그 태도가 새삼스럽지 않아서 드루쉬아는 안심이 되는 동시에 답답해졌다.

“탈리온의 누구도 레이디 이그레인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지. 그러니 고집 피우지 마.”

호되게 낙마한 직후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였다. 다치지는 않았어도 큰 충격을 받은 터였다.

“애거나이트, 가서 마차를 돌려. 레이디 이그레인을 모시고 안가로 간다. 네 처분은…, 나중에 다시 따져 묻도록 하지.”

지시를 내리는 드루쉬아의 얼굴은 냉랭했다. 애거나이트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에 올라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아시카도 더는 싫다고 우길 수가 없었다. 이미 해가 지고 있어서 어디든 쉴 곳을 찾아야 했다.

얼마 뒤 앞서갔던 마차가 되돌아왔다.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마차에 태우고 나일은 기사들과 함께 뒤를 따랐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아시카에게 휴식이 우선이라는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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