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무슨 말씀입니까? 증조부께서 선대 황제 폐하께 진상한 뒤로는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만.”
“흠. 제 발이 달려서 기어나갔을 리도 없고.”
이어진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드루쉬아는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차피 나중에 돌려받으면 알게 될 일이다. 미리 말해서 분위기를 흐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황궁의 깊숙한 창고에 보관해 둔 그것이 사라졌던 적이 있었다. 사실은 잊고 있던 물건이라 없어진 줄도 몰랐다. 황궁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그것을 발견하고서야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공작의 조부에게도 그리 전해. 아마도 흡족해할 걸세.”
드루쉬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결혼식에 황태후가 나선 것도 놀라운데 거기다 빼앗긴 가보까지 인질로 내걸 줄은 몰랐다.
“그럼 결혼 날짜가 잡히면 알려주게. 내 친히 가서 축하해줄 터이니.”
황태후는 제 할 말만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루쉬아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가 내뿜는 기세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시선을 내리고 있는데도 드루쉬아에게서는 숨 막히는 분노가 흘러나왔다.
‘기세 만만이지. 진작에 기를 꺾어 놨어야 했는데.’
그러나 황제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탈리온 공작가였다. 괜히 나서서 벌집을 들쑤시고 싶지는 않았다.
황태후가 응접실을 나간 뒤 드루쉬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프리에게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드루. 얘기 좀 해.”
냉정하게 돌아서는 그를 샤프리가 잡았다. 드루쉬아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짙푸른 눈동자가 애써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나는 너와 결혼하지 않아, 샤프리.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가문에서 내 위치가 어떤지 알잖아. 나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그래서 나더러 너를 위해 희생해달라고?”
“그런 말이 아니잖아. 어차피 너도 결혼해야 하고 그 상대로 내가 부족할 게 뭐가 있어.”
샤프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차피 고위귀족의 결혼이란 철저한 정략에 의해 이루어진다. 가문의 균형과 이해관계만 맞으면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샤프리를 그런 식으로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아름답지만 여자로서는 애정이 가지 않는 상대. 평생 허울뿐인 아내의 자리에 샤프리를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14년을 알아 온 친우에게 드루쉬아가 보여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조부님께서 계속 경고하셨지. 마이헬러의 위상은 보기와 다르다고.”
후작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던 마이헬러. 그러나 그 조용한 존재감에 네오렌은 의문을 제기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인연이라 참견하지는 않았지만 네오렌은 샤프리를 불편하게 여겼다.
“왜 조부님께서 마이헬러를 꺼렸는지 이제야 알겠군. 마이헬러 후작이 움직인 것이 황제 폐하일까 아니면 황태후 폐하일까?”
샤프리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파혼한다고 해서 우리 관계가 끝나는 건 아니었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내 목줄을 쥐려고 할 줄은 몰랐다. 14년간의 인연을 이렇게 끝장내는구나, 샤프리.”
드루쉬아는 탈리온 공작이었다. 어느 정치세력에도 손을 두지 않는 굳건한 제국의 검이자 방패. 제국의 황제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탈리온.
그런 그를 움켜쥐려고 했다. 감히 황실을 등에 업고서.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치밀었다. 그 음험한 속내를 드루쉬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우리 사이의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지. 나머지는 칼프를 보내서 처리할 테니까.”
“드루쉬아!”
돌아서는 드루쉬아의 태도에는 일말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지르는 기세에 호위 기사들마저 시선을 피했다.
무언가 어그러지고 있었다. 그가 살아온 견고한 세상이,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들이. 아니, 견고하다 여겼던 것들마저 실은 착각이 아니었을까. 기둥 없이 지어진 성채처럼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시작점이 어디였는지 드루쉬아는 기억한다. 황궁에서의 그날 밤. 이그레인의 여자가 드루쉬아의 밑바닥을 흔들어놓았다.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자라기 시작한 의문과 자각.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가지를 뻗어가며 의문을 더해갔다.
‘뭔가 잘못됐어. 그것도 아주 크게.’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불안해서 드루쉬아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 * *
울창한 나무 그늘이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는 담장 앞. 아시카는 호위 기사의 손을 가볍게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평소 함께 다니던 이들이 아닌 가문의 기사가 여섯 명. 말 한마디 걸지 않는 조심스러운 태도에 마음이 놓였다.
‘필요할 때 외에는 가까이 오지 않겠지.’
그걸 계산하고 일부러 데려온 이들이다. 아시카는 저를 에워싼 기사들을 슬쩍 보고는 정문으로 향했다.
안쪽에는 사용인들이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별장의 규모가 작은 탓에 열 명이 채 안 되는 인원이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그동안 별일은 없었고?”
“네. 한적한 곳이라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종종 쉬러 오시던 분이 안 오셔서 쓸쓸했을 뿐이죠.”
나이가 지긋한 별장 관리인은 아시카를 보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수도에서 불과 하루 거리에 있는 별장이라 부친이 살아있을 때는 자주 들렀던 곳이었다.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가 되었지만.
아시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호위 기사 여섯에 그녀를 따라온 하녀는 마릴린 하나가 고작이었다.
관리인이 뒤를 따르며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물었다.
“인원이 단출하군요. 얼마나 계실 예정입니까?”
“아마도 일주일 이상? 조용히 있고 싶어서 온 거니까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집으로 보내. 내 방에는 마릴린 외에는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관리인이 놀란 얼굴을 했지만 따져 묻지는 않았다. 한동안 파혼 소식으로 시끌시끌하더니 이제야 마음을 정리하러 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시카는 마릴린에게 짐을 풀도록 지시한 뒤 주변을 산책하고 홀로 식사를 하며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었다.
해가 지고 얼마 뒤, 아시카는 마릴린을 침실로 불러들였다. 아시카가 침의가 아닌 바지로 갈아입은 걸 보고 마릴린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 제가 드린 침의가 마음에 안 드세요? 다른 옷을 준비해 올까요?”
“마릴린, 나는 당분간 별장을 비울 거야.”
“네에?”
뜬금없는 통보에 마릴린은 기겁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별장을 비우다뇨?”
“네가 할 일은 침실 근처에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내가 자리에 없다는 걸 들키지만 않으면 돼.”
“그, 그런…. 아가씨. 혼자서 어딜 가시려고요?”
마릴린은 당황한 나머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잔느가 있었다면 절대 말렸을 일이다. 그러나 일개 하녀인 마릴린은 아시카를 막을 수 없었다. 그걸 알고 일부러 잔느를 떼놓고 온 것일 터다.
놀란 마릴린을 보며 아시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혼자 가는 게 아니야.”
“누구랑 가시는데요? 혹시 베르트 경이 같이 가나요? 아니면 블란코 경이 따라온 건가요?”
“아니.”
설명의 여지도 없는 짤막한 대답. 마릴린은 자신의 양손을 움켜쥐며 초조하게 물었다.
“그럼 어디로 가는지 만이라도 알려주세요.”
“마릴린.”
조용하지만 서늘한 목소리가 더는 묻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마릴린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테라스로 연결된 문밖에서 톡, 톡, 작은 소음이 들렸다. 아시카가 문을 열자 테라스 너머에서 나일이 손을 흔들었다.
“어, 저분은 제네스 경의 보조가 아닌가요?”
어깨 길이였던 회색 머리칼을 짧게 자르고 싱글싱글 웃고 있는 나일의 얼굴은 소년의 그것처럼 짓궂어 보였다.
‘저 사람이 따라온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마릴린은 당황한 얼굴로 나일과 아시카를 번갈아 보았다.
“마릴린, 입 다물고. 내가 한 말 잊지 마.”
“아, 아가씨.”
“부탁할게.”
아시카는 발을 동동 구르는 하녀를 뒤로하고 테라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녀의 방은 1층이라서 테라스 난간만 넘어가면 바로 정원이었다. 나일은 언제나처럼 소리 없이 길을 안내해 아시카를 별장 밖으로 인도했다.
“무슨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해요? 조용히 따라오느라 애먹었잖아요.”
“말은?”
“숲에 있어요. 시키는 대로 준비는 했지만, 진짜 말을 타고 대공령까지 갈 수 있겠어요?”
“내가 누군지 잊었어? 영지 순회 때는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을 말을 타야 해.”
“보통… 레이디들은 마차를 타지 않나요?”
나일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랬다간 한 달이 아니라 두 달은 마차를 타야 할 걸?”
이그레인의 영지는 광대했고 빠른 시간 안에 순회를 마치려면 기사들과 같은 속도로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웨이브는 하나뿐인 어린 손녀를 더욱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아시카는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기억을 털어냈다.
“그냥 가는 게 아니라 먼저 간 탈리온의 마차를 조용히 쫓아야 해.”
아시카의 차분한 설명에 나일은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그건 제 주특기죠. 레이디까지 달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요.”
“혼자서도 했으니까 둘도 가능할 거야. 제대로 안내해 봐.”
아시카의 태도는 시종일관 한결같았다. 시종에게 ‘차를 따라 주렴’하고 지시하는 것처럼 우아하기만 하다.
나일은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호기심 왕성한 아가씨를 부추겨서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 기분이랄까. 문제는 그 불구덩이에 저까지 끌고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그거 되게 억지로 들리는 거 아세요?”
“대공성에 가고 싶어 했잖아. 혼자서는 할 수 없어도 내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설마, 지금 대공성에 가는 건가요?”
머뭇거리던 나일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하지만 탈리온 공작이 하필 지금 대공령에 가는 이유는 알아야겠어.”
드루쉬아와 달리 아시카는 대공령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처리하는 업무 모두 서류상의 일들이었을 뿐.
조부 웨이브는 아시카가 대공령에 가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몇 번 말을 꺼냈다가 단호히 거절당한 뒤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는 내버려 둘 수 없게 되었다.
‘탈리온과의 관계가 평범하기만 했어도 좋았을걸.’
그랬다면 함께 가자는 제안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설령 뒤를 쫓다가 들킨다 해도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그레인이었고, 대공령에 관한 한 탈리온은 정보를 독점해서는 안 되었다.
“그냥 저 혼자 다녀올게요. 세상에 이런 일에 직접 발 벗고 나서는 레이디가 어디 있어요?”
“가만히 앉아서 명령만 내릴 것 같으면 당신이 필요하지도 않았어.”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조에 나일은 입을 다물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당장 돌아가라고 할 것만 같은 냉한 목소리였다.
‘하. 이 아가씨가 한 고집 하네.’
겁이 많은 줄 알았더니 한 번 마음 먹은 일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든다. 몸을 사리지 않는 태도가 대범하다기보다 위험하게 느껴졌다.
“길은 알고 있는 거야?”
“대공령으로 가는 게 맞다면 어차피 길은 하나뿐이에요. 서두르면 금세 따라잡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아시카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생각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이그레인을 등에 업고 대공령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 나일이 원한 건 그뿐이었는데 일이 꼬여도 한참 꼬였다.
말고삐를 잡고 나일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혹시 제가 도와드려야 할까요?”
레이디들은 마차에서 타고 내릴 때조차 도움을 받는다. 하물며 발 받침도 없는 말을 혼자 탈 수 있을까.
“왜, 무릎이라도 빌려주게?”
발 받침이 없는 경우 기사들은 레이디를 위해 기꺼이 바닥에 앉아 무릎을 세워주었다. 밟고 올라갈 수 있도록.
나일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아니, 그건 좀.”
“그럼 손이라도 빌려주던가.”
“손잡아 드려요?”
아시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릎 대신 상대의 손을 밟고 말을 탈 수도 있다. 질색하는 걸 보니 그런 건 아예 생각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막 굴러먹은 것처럼 굴더니 의외로 귀공자일 수도 있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아시카는 말고삐와 안장 앞쪽을 움켜쥐고 등자를 밟아 단숨에 말에 올랐다.
커다란 말에 비해 아시카의 체구는 작고 가녀렸다. 그러나 고삐를 쥐고 내려다보는 우아한 몸짓은 전형적인 귀족의 모습이었다.
“앞장서.”
아시카는 가볍게 말을 토닥이며 지시했다.
제 도움이 필요 없다는 걸 깨닫고 나일은 멋쩍은 얼굴로 말에 올랐다.
‘제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
바짝 긴장한 채 나일은 마음속으로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