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33화 (33/153)

#33.

불이 꺼진 방에는 잔잔한 향기가 감돌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은 잠으로 이끄는 기분 좋은 향기가. 그러나 침대에 웅크린 여자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흐억!”

불현듯 뜬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었고 깊게 주름진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당장 방을 뛰쳐나가고 싶지만 얼어붙은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침대를 내려다보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닌 다른 무엇이었다.

창백한 달빛처럼 시린 백금발이 바람도 불지 않는 실내에서 흐드러졌다. 청보라빛 눈동자가 그녀에게 향했을 때 황태후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악!”

수십 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사람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청보라빛 눈동자와 시리도록 창백한 백금색의 머리칼.

“이비스!”

황태후는 눈을 희번덕이며 몸부림쳤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간신히 끌어당겨 침대 기둥을 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저리 가! 그만하라고! 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유령처럼 흔들리는 여자의 형상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황태후는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더욱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나, 난 잘못한 게 없어. 내 잘못이 아니야!”

짐승처럼 울부짖는 황태후를 앞에 두고 사람인지 무엇인지 모를 상대가 입을 열었다. 사람의 목소리를 닮은, 그러나 황태후의 귓가에는 환청처럼 뭉그러지며 울리는 소리가.

“잘못한 게 없다고?”

“폐하께서 벌인 일이야. 난 아무것도 몰랐어!”

여자는 차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황태후를 내려다보았다. 청보라빛 눈동자가 그 기괴한 색만큼이나 소름 끼치게 번뜩였다.

“네가 기사들을 잠재웠잖아. 네가 성문을 열어주었잖아. 네가 황제의 군대에게 가족을, 백성들을 팔아치웠잖아.”

“아냐, 내가 잘못한 게 아냐! 나,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황태후는 다가오는 여자의 형상을 피하려고 팔을 허우적거렸다. 속 빈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팔을 휘두르면서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질렀다.

“너 따위 망령에게 당할 줄 알아? 넌 아무것도 못 해. 그래 봤자 내 머릿속이나 헤집을 뿐이야. 당장 꺼져버려!”

여자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살기 가득한 눈동자가 겁에 질린 상대를 압박한다.

“그래서 모두 네가 미친 줄 알잖아. 넌 미쳐가고 있어. 네가 죽을 때까지 나는 네가 미쳐 날뛰는 꼴을 볼 거야. 네 손에 흘린 핏값을 치를 때까지.”

황태후의 몸부림에도 여자의 얼굴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너는 대가를 치를 거야, 일레르나. 네 손에 묻힌 피만큼.”

“아아아악!”

버둥거리던 황태후가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진 충격을 느끼지 못하는 듯 정신없이 몸을 움직여 바닥을 기었다.

“누구 없느냐! 왜 아무도 오지 않는 게냐!”

그렇게 얼마나 악을 썼는지 한참 뒤에야 방문이 벌컥 열렸다.

“헉, 폐하!”

하녀장이 바닥에 쓰러진 황태후를 일으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사납게 몸부림치던 황태후가 저를 잡으려는 상대를 사정없이 할퀴고 잡아 뜯었다.

“악! 폐하, 고정하세요!”

“이비스! 그 년의 시신을 가져와! 내 눈앞으로 끌고 오란 말이다!”

깊은 밤, 모주의 궁전이 발칵 뒤집혔다. 깨어난 하녀들이 건물 곳곳에 불을 피워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고 황태후의 침실로 모여들었다.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폐하, 죽은 사람의 망령일 뿐입니다.”

“으허, 이비스가 죽어, 죽었어….”

“네, 폐하.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이미 정신이 나가버린 황태후는 연신 다독이는 하녀장의 부축을 받아 다시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폐하, 숙면을 돕는 약입니다.”

하녀장은 누군가 건네주는 약을 황태후의 입에 쏟아 넣었다. 그러나 넋이 나간 황태후의 입가에서 약이 주르륵 흘러 옷을 적셨다.

“하나 더.”

하녀장의 지시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또 다른 약병을 내밀었다.

“약을 드셔야 편히 잠들 수 있습니다. 자아, 천천히 삼키기만 하면 됩니다, 폐하.”

어르듯 달래는 손길이 자연스럽다. 황태후에게 간신히 약을 먹이고 하녀장은 침대에서 물러났다.

“약을 닦아내고 폐하의 옷을 갈아입히도록 해. 침실 등은 이대로 밝게 유지하고.”

지시를 내리는 하녀장 역시 황태후와 비슷한 연배로 흰머리가 드문드문 보이는 나이였다. 오랜 세월 곁을 지켜온 만큼 능숙하게 상황을 지휘했다.

한밤중의 소란은 그렇게 수습되었다. 할 일을 마친 하녀들이 본관 건물을 나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이달 들어서만 벌써 네 번째야. 수십 년 전에 죽은 자매를 지금까지 찾으시니 원.”

“그게 다 죄책감 때문 아니겠어? 반역의 증거를 넘긴 것도 대공성의 성문을 열어준 것도 황태후 폐하였다면서.”

“금침을 두르고 호의호식하면 뭐해. 평생 망령에 시달려서 잠 한번 편히 못 자는걸.”

“쉿, 어디 가서 이런 얘기 떠들면 당장 경을 친다, 너?”

“아휴, 모르겠다. 연세도 많으신데 저러다 탈나면 어쩌려고.”

“탈이야 진즉에 났지 뭐.”

숙소로 돌아가는 하녀들은 소곤소곤 저희끼리 속삭이며 발길을 재촉했다.

* * *

황태후의 얼굴에는 어젯밤 소동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짙은 화장으로 창백한 안색을 숨기고 충혈된 눈은 약초물로 씻어 또렷한 색을 유지했다.

그러나 꺼지기 직전의 등잔불처럼 쇠락해가는 느낌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힘없이 늘어진 몸뚱이와 그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화려한 의자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향이 왜 이리 강해. 머리가 아프지 않으냐.”

황태후는 짜증스럽게 찻잔을 밀어냈다. 평소 즐겨 마시던 차였는데 오늘은 그조차도 거부감이 들었다.

“바꿔오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얼른 찻잔을 들고 물러났다. 짜증을 참지 못한 황태후는 마주 앉은 상대에게 화살을 돌렸다.

“후작가의 금지옥엽인데 어째 나는 본 기억이 별로 없을까?”

“송구하게도 제 위치가 미력하여 궁에는 발을 거의 들이지 못했습니다.”

“마이헬러 후작이 그리 놔뒀다고?”

“아버지는 제가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샤프리는 시선을 내리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못마땅한 기색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황태후는 노골적으로 핀잔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진작 얼굴부터 내밀었어야지. 누굴 뒷방 늙은이 취급해?”

샤프리는 변명하는 대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더욱 고개를 낮췄다. 황태후의 기분을 거슬려봐야 좋을 게 없기에 말을 아꼈다.

응접실을 나갔던 시녀가 다시 돌아왔다. 황태후의 눈치를 보면서 새로 준비된 다구를 세팅하고 찻잔을 채웠다.

“앗, 뜨거워!”

찻잔을 들어 올리던 황태후가 비명을 질렀다. 손에 힘이 없어서인지 손잡이가 주륵 미끄러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찻잔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폐하!”

샤프리도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갑이 젖었습니다. 데지 않으셨습니까?”

“저리 치워! 감히 어디에 손을 데느냐!”

황태후는 소스라치게 놀라 제 손을 움켜쥐었다. 마치 숨기듯이 샤프리의 시선에서 손을 가렸다. 과할 정도로 격한 반응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샤프리가 물러나자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여분의 장갑을 들고 황태후에게 다가갔다. 샤프리가 고개 숙이고 있는 동안 시녀는 빠르게 장갑을 교체했다.

대기하고 있는 시녀들은 제 할 일만 하고 빠르게 물러났다.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시종이 찾아왔다.

“폐하, 탈리온 공작이 도착했습니다.”

샤프리의 얼굴에 처음으로 화색이 돌았다. 황태후는 늘어져 있던 몸을 세우며 손짓했다.

“들라 해라.”

응접실 입구를 지키던 호위 기사보다 더 크고 단단한 체구의 사내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비율 좋게 균형 잡힌 몸매와 탄탄한 근육은 기사의 그것과 같았지만, 깔끔하게 빚어 넘긴 금발과 수려한 이목구비,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전형적인 수도 귀족의 모습이었다.

“제국의 모후이신 황태후 폐하를 뵙습니다.”

“탈리온 공작은 오랜만에 보는구나.”

황태후는 드루쉬아의 방문에 반색을 했다.

정치 구도와 상관없이 저 홀로 굳건한 세력을 지닌 탈리온. 황실과 외척들이 가장 탐내지만 누구에게도 힘을 실어주지 않기에 고고하기만 한 가문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낮잡아 볼 수 없는 상대. 단단한 드루쉬아의 얼굴은 가문의 위명만큼이나 고고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부르기 전에 와주면 좀 좋아? 내가 황궁을 나왔다고 아무도 찾지 않으니 직접 나설 수밖에.”

“그래도 마이헬러 후작께서는 걸음을 하셨나 봅니다.”

가시 돋친 지적에 황태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드루쉬아의 시선이 샤프리에게 옮겨갔다.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샤프리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탈리온 공작은 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

황태후는 슬금슬금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리 황궁에서 쫓겨난 신세라도 현 황제의 모후였다. 뒤에서 수군거릴지언정 제 앞에서 이렇게 뻣뻣하게 구는 인물은 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를 처음 불러주셨는데 그것이 지금이라 의아했을 뿐입니다.”

“사교계를 멀리해서 그런가. 공작의 처세가 어찌 그리 야박해?”

“3년이나 파병군으로 지내면서 수도 귀족의 예법을 많이 잊었습니다. 너그러우신 황태후 폐하에 비해 부족함이 많습니다.”

‘이것 봐라?’

뻣뻣하다 했더니 슬그머니 떠넘기는 요령이 얄밉기 짝이 없다. 황태후는 차마 화를 내지도 못하고 인상을 구겼다. 문득 제 아들이 전대 탈리온 공작을 몹시 어려워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 나이 반토막도 안 될 어린 것이. 조손이 아주 똑같아.’

어설픈 설득은 통하지 않을 인물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저어, 폐하.”

두 사람의 신경전에 샤프리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그래 맞아. 내가 잊을 뻔했네. 두 사람이 약혼한 지 1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날을 안 잡았다지?”

드루쉬아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샤프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이어질 황태후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결혼식 축하 선물을 줄까 해서 불렀어.”

“폐하께서 저희 결혼식에 이토록 관심이 많으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애써 평정을 가장했지만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드루쉬아는 이 자리가 곤혹스러웠다. 왜 자신의 결혼에 황태후가 거들고 나서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황태후의 표정은 한결 느긋해졌다. 자신이 꺼낼 이야기에 상대가 어찌 반응할지 기대감마저 어렸다.

“내 아들이 황제이고 손자가 황태자이면 뭐하나. 이렇게 궁에서 내쫓고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는 것을. 그런 내게는 옛적부터 이어온 인연이 소중한 법이지.”

모주의 궁전으로 쫓겨난 뒤 대부분의 고위 귀족들은 황태후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나마 아직까지 친분을 이어가는 이가 마이헬러 후작이었다.

황태후는 찻잔을 손끝으로 우아하게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결혼식 선물로 탈리온의 가보를 돌려줄까 해.”

드루쉬아는 예의도 잊고 고개를 획 치켜들었다. 부릅뜬 두 눈에는 놀라움과 의문이 교차했다.

탈리온 공작가의 가보. 건국 초기 가문의 시작과 함께해온 신물을 말함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 전 선황제가 빼앗다시피 가져간 물건이기도 했다.

반역죄로 대공령이 쑥대밭이 되어버린 상황. 엄한 일로 덜미가 잡히지 않을까 모든 귀족들이 몸을 사릴 때였다.

선황제는 탈리온 가문의 신물을 갈취하다시피 가져갔다. 핑계는 ‘맡아 두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빼앗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의 탈리온 공작은 신물을 선황제에게 내주고 대신 대공령의 관리를 지시받았다.

“황제 폐하의 허가가 떨어진 겁니까?”

“어차피 폐하께선 관심도 없던 물건이야. 창고에서 썩어 가느니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이렇게 돌려줄 거면 애당초 왜 빼앗아갔을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말일세, 탈리온 공작.”

거만하던 황태후가 조심스럽게 드루쉬아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그걸 가져가려고 했던 적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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