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드루쉬아는 제 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샤프리를 내려다보았다. 매달리는 성격이 아닌데 오늘따라 유난하다 싶었다.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샤프리는 힘없이 미소지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
그렇게 말하고 샤프리는 서둘러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맥없이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면서 드루쉬아는 마이헬러의 가족관계를 되짚어보았다.
‘마이헬러 후작과 소후작 모두 따뜻한 성격은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면 샤프리의 태도도 이해될 법하다.
모친은 병약해서 어릴 때부터 함께 있지 못했고 부친과 하나밖에 없는 오라비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다. 이름뿐인 약혼자인 드루쉬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옆에 있는 게 도움이 되지 않겠군.’
마음 나눌만한 상대를 하루빨리 만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라도 나서서 알아봐야겠어.’
하녀가 응접실에 차를 내오고 얼마 뒤 샤프리가 돌아왔다. 장례식용 검은 드레스를 벗고 장식이 적은 푸른색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부피감이 없는 드레스는 유려한 몸의 곡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디자인이었다.
“드루, 머리와 옷이 젖었어. 외투를 벗어주면 하녀에게 말려오라고 할게.”
“그 정도로 많이 젖지는 않았어.”
“그럼 물기라도 닦던가.”
그렇게 말하면서 샤프리는 수건을 들고 드루쉬아에게 다가갔다.
“아니, 괜찮아. 그냥….”
드루쉬아가 샤프리의 손을 밀어내려는 찰나 그녀의 다리가 엉키며 몸이 중심을 잃었다.
“앗!”
“샤프리!”
샤프리의 몸이 그대로 드루쉬아에게 쏟아졌다. 드루쉬아는 그녀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가슴에 손이 닿는 걸 느끼고 황급히 거뒀다. 샤프리의 체중에 밀린 드루쉬아는 그대로 소파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소파 위에서 완전히 밀착한 채 포개어졌다. 순간적으로 진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향수 냄새가 아니라 여자들이 목욕하면서 바르는 유향의 향기였다.
드루쉬아의 손이 당황한 채 허공에서 맴돌았다.
“샤프리, 이거 좀….”
드루쉬아는 샤프리가 혼자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샤프리는 일어나는 대신 양팔로 그의 목을 휘감아 더 바짝 몸을 밀착했다.
“대체 언제까지….”
샤프리가 고개를 들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나를 봐 줄 거야?”
“무슨 소리야? 아니, 일단 일어나서 이야기하지.”
“하, 드루. 왜 그렇게 눈치가 둔해?”
드루쉬아가 제 몸에 손대지 않으려는 걸 깨닫고 샤프리는 더욱 과감해졌다. 어떻게든 물러나려던 드루쉬아에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새 술이라도 마신 건가? 너답지 않게 왜….”
드루쉬아의 눈이 경악으로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샤프리의 입술이 그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내 샤프리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제 시도가 실패했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샤프리의 입술은 굳은살 박인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고 드루쉬아는 경악했다.
“너….”
드루쉬아는 제 위에 올라탄 샤프리를 그대로 소파 안쪽으로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드루!”
샤프리의 손이 그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제 팔에 휘감기는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순식간에 자리를 피한 드루쉬아의 표정은 전에 없이 차가웠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대가는 꽤 아프게 돌아왔다.
“너, 대체가…."
당황스러웠다. 아니 당황하다 못해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집요하게 그를 바라보는 진초록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번들거렸다. 그를 보는 시선도 기이하게 일그러진 얼굴도 낯설었다.
“드루, 미안해. 내가 성급했어.”
“아니,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너도 나이가 있는데 이런 관계를 오래 끌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
드루쉬아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을 털어내려는 듯 머리를 흔들기까지 했다.
“내 얘기 좀 들어봐, 드루.”
“이쯤에서 형식적인 관계는 정리하도록 해. 어차피 언제고 끝낼 약혼이었잖아.”
“아니야. 난 너를 사랑해서 원한 거라고!”
응접실을 나가려던 드루쉬아가 걸음을 멈췄다.
“사랑?”
드루쉬아는 미간을 좁히며 샤프리의 얼굴을 살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청록색 눈동자는 아름다웠다. 보통의 남자라면 심장이 덜컹거릴 만큼.
그러나 드루쉬아에게는 기묘한 거부감을 일으켰다. 내내 건조했던 눈동자에 갑작스럽게 드러난 애틋한 감정에 위화감을 느꼈다.
‘이것도 변덕인가?’
약혼 전까지 드루쉬아는 적지 않은 여자를 만나보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상대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랑을 고백하는 샤프리의 눈동자에는 기묘한 열기가 있었다. 애정이라고 말하기에는 불편한 무언가가. 그 흔적은 채 잡기도 전에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귀책사유는 내 쪽에 있는 것으로 하지. 너를 위해서도 그게 나을 테니까.”
“드루! 이런 식으로 약혼을 끝낼 수는 없어!”
샤프리의 애타는 외침에도 드루쉬아는 냉정했다.
“곧 파혼서를 보내도록 하지.”
이 약혼에는 얽힌 것이 그다지 없었다. 애초에 진짜 결혼까지 갈 생각이 아니었기에 간단한 서류 몇 가지만 정리하면 된다.
할 말을 마친 드루쉬아는 곧바로 발길을 돌렸다.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서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샤프리가 부르는 목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거지?’
친우라고 선을 그어뒀지만 샤프리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건강한 성인 남자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만큼. 그런데도 불쾌하고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그 여자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내내 싫다고 생각했던 여자에게는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는데, 정작 14년을 가깝게 지내온 여자는 온몸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이 무슨 웃긴 상황인지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공작저로 돌아가 이 불쾌감을 빨리 씻어내고픈 마음뿐이었다.
* * *
짝.
살이 찢어질 것 같은 날카로운 파열음이 서재를 울렸다. 호리호리한 몸은 사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심한 것.”
쓰러진 샤프리의 머리 위로 냉랭한 질책이 떨어졌다.
“여태껏 뭘 한 거냐. 1년 동안 남자 하나 자빠트리지 못해서 파혼 소리가 나오게 만들어?”
샤프리는 입을 꼭 다물고 얼얼한 뺨을 손으로 감쌌다.
드루쉬아가 후작저를 떠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지켜보는 눈과 귀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즉각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파혼이라니, 파혼이라니!”
에르윈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그걸 알기에 샤프리는 고개를 떨구고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에르윈은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수습해라.”
“…오라버니.”
“몸이 안 되면 목숨이라도 팔아서 탈리온 공작을 잡아!”
요동치는 녹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붉게 달아오른 뺨과 하얗게 질린 얼굴이 가엾어 보일 법도 하건만 에르윈은 동요하지 않았다.
샤프리의 시선은 에르윈 뒤쪽으로 옮겨갔다. 묵묵히 의자에 앉아 저를 내려다보는 마이헬러 후작에게로.
후작은 여유로웠다. 눈물 흘리는 샤프리의 모습에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댄 채 담배 연기를 뿜어낼 뿐.
후작과 시선이 마주치자 샤프리는 황급히 고개를 떨궜다. 그녀에게 후작은 사신처럼 어둡고 태산처럼 거대한 사람이었다. 감히 저항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두려운 상대.
에르윈은 다시 손을 올렸다가 혀를 차며 거뒀다.
“저렇게 쓸모없는 걸 애지중지해왔다니.”
얼마 뒤 에르윈이 당긴 종소리를 듣고 하녀 둘이 서재로 들어왔다. 별다른 지시 없이도 하녀들은 익숙하게 샤프리를 부축해서 밖으로 나갔다.
“편히 쉬세요. 아버지, 오라버니.”
비틀거리며 나가는 와중에도 샤프리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걸 보면서 에르윈은 기가 찬 얼굴이 되었다.
“저런 걸 보면 아주 맹탕은 아닌데 말입니다. 저 미모에 저 몸뚱이를 가지고 어찌 남자 하나를 못 후리는지.”
에르윈은 저와 꼭 닮은 금발에 청록색 눈동자를 지닌 후작을 돌아보았다. 가만히 저를 지켜보는 시선에서 묵직한 압박이 느껴진다. 툭, 하고 담배를 재떨이에 얹는 동작마저 느릿하게 숨통을 조여왔다.
“아버지.”
초조한 아들의 목소리에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열렸다.
“탈리온 공작은 본래도 쉽지 않은 상대지.”
“그래 봤자 사내놈인데 어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여자를 만나도 한 달을 넘어가지 않던 놈이다. 그만큼 곁을 안 준다는 말이야.”
“그런 놈 옆에 14년씩이나 붙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장점을 왜 살리지 못하느냔 말입니다.”
“처음부터 샤프리 혼자만으로는 안 될 일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아버지. 제가 잘 타일러보겠습니다.”
새삼스럽지 않은 듯 후작의 표정은 시종일관 느슨했다.
“그보다 저 아이가 깜찍한 짓을 저질렀던데.”
“네? 무슨 일을….”
“몰랐던 모양이구나.”
에르윈은 후작의 시선을 마주하고 흠칫 뒷걸음질 쳤다.
“헤네시 남작 부인이 저 아이를 퍽 많이 괴롭혔다지?”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에르윈이 바삐 머리를 굴렸다.
헤네시 남작부인은 샤프리가 어릴 때부터 훈육과 양육을 전담했던 사람이었다. 더는 훈육이 필요 없는 샤프리와 계속 그녀를 휘두르려는 남작 부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남작 부인이 샤프리가 내준 구호 물품을 들고 구빈원을 방문한 것이 우연이었을까.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이 말 없는 질책처럼 느껴져서 선뜻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그러면서 잘 타일러 보겠다고?”
“저… 설마.”
“애완 고양이도 예쁜 짓을 할 때나 예뻐하는 법이다. 고양이가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도록 두지 마라.”
음산한 어조에 에르윈의 등줄기에 오한이 들었다. 다행히 후작은 그 이상 아들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헤네시 남작 부인을 대신할 사람은 구했느냐?”
“아, 아직 수소문 중입니다.”
“딴마음 품지 않도록 관리 잘해라.”
“네, 아버지.”
엄중한 목소리에 담긴 경고의 뜻을 놓치지 않았다. 에르윈은 깊게 고개 숙이며 아비의 지시를 새겨들었다.
후작이 담뱃재를 비워내고 새로 채우는 것을 보면서 에르윈은 나가야 할 때가 됐음을 알았다. 상대의 존재감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태도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의사표시였다.
에르윈은 조용히 서재에서 나와 샤프리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는 가문의 주치의가 막 나오는 참이었다.
“노아, 치료는?”
“아가씨께서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고집하고는. 내일 아침에 다시 와서 봐주도록 해. 내 뜻이라고 전하고.”
아무리 가문의 주치의라도 맞은 얼굴을 내보이고 싶지는 않았을 터다. 샤프리가 의원을 거부하는 이유를 알기에 에르윈은 가만히 혀를 찼다.
주치의가 물러나는 것을 확인하고 에르윈이 샤프리의 방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샤프리가 몸에 바른 유향의 향기가 진동한다. 달콤하고도 자극적인 향기였다.
“샤프리.”
샤프리는 침대에 다소곳이 앉은 채 돌아보지 않았다. 부러 돌아보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에르윈은 채근하지 않았다.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침의 차림에 인형처럼 단아하게 느껴지는 자세. 침대 위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과 함께 미묘한 부조화가 느껴졌다.
“마음이 상했니?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아버지께서 직접 나섰을 거야. 알고 있잖아.”
대답하지 않는 샤프리를 향해 에르윈은 더욱 달콤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름다운 나의 누이야.”
다정한 목소리에 그제야 샤프리가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에르윈의 눈꼬리가 살며시 접혔다.
“오라버니.”
가녀린 목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울렸다. 에르윈은 등 뒤로 문고리를 잡고 가만히 문을 잠갔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