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31화 (31/153)

#31.

수십 명의 기사들이 모여 있는데도 연무장 안이 고요하다. 열을 맞춰 대기하고 있는 기사들 누구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드루쉬아는 저에게 내밀어진 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검을 내밀고 있는 투박하고 거친 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훤칠한 기사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나더러 그 검을 받아서 어쩌라고?”

“자격이 없다 여기시면 반납하겠습니다.”

애거나이트가 내민 검은 기사 서임식 때 전대 공작인 네오렌이 직접 그에게 하사한 검이었다.

“조부께서 실망하실 건 아나 보군. 철없는 애들이나 할 분풀이를 아끼던 기사가 저질렀으니 오죽하겠어.”

드루쉬아는 팔짱을 끼고 선 채 자신의 기사를 질책했다.

애거나이트는 그날 사고로 가문의 후계자였던 형과 부모를 모두 잃었다.

차라리 아무도 찾지 못했다면 나았을까. 몇 주 뒤 실종된 세 사람 중 형님의 시신만 찾았는데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애거나이트는 시신을 직접 확인하고 충격에 빠졌다.

조금만 빨리 찾았더라면 온전한 시신이라도 건지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멀쩡하게 기억하며 장례를 치르지 않았을까. 이렇게 끔찍한 악몽으로 기억할 게 아니라.

부모님의 시신 역시 아무도 찾지 못할 강바닥 어딘가에서 썩어 백골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에 소년은 식음을 전폐하고 울부짖었다. 그런 그를 다시 끌어낸 것이 네오렌이었다.

그래서 드루쉬아는 치안대에서의 사건을 그냥 넘겼다. 애거나이트가 수도에 막 도착한 시점, 바로 코앞에서 이그레인을 마주치자 해묵은 분노를 절제하지 못했으리라. 워낙 불같은 성격인 데다 쌓인 울분이 크다는 걸 알기에 이해했다.

그러나 아무리 꼴 보기 싫은 이그레인이라도 지켜야 할 선은 있었다.

“조부께서 내린 검을 내가 왜 받아? 그거 치워.”

드루쉬아는 도열해 있는 기사들을 보며 툭 뱉었다.

“전원 일주일 동안 중갑옷 착용 후 훈련에 임한다.”

기사들의 입이 놀라 벌어졌다. 차마 소리 내지는 못했지만 비명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헉, 각하. 중갑옷이라뇨. 요즘은 전쟁터에서도 그런 갑옷은 입지 않습니다.”

내내 드루쉬아의 옆을 지키던 보좌관 미하일이었다.

몸에 걸치는 것만으로도 사람 하나를 지고 움직이는 거나 다름없는 중갑옷. 금속 제련기술이 발달해 이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과거의 유물이었다.

드루쉬아가 한마디 할 기세를 보이자 미하일이 얼른 덧붙였다.

“거기다 기사들의 장비 목록에도 중갑옷은 없습니다.”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용감한 보좌관에게로 향했다.

‘잘한다, 오르카 경. 조금만 더!’

‘오르카 경이 간이 크네. 안 맞아 봤나 봐.’

‘각하께서 보좌관은 안 때려. 대신 다른 방법으로 밟아주시겠지.’

말없이 술렁이는 분위기에 드루쉬아가 코웃음을 쳤다.

“없긴 왜 없어? 제일 오래된 골동품 창고를 뒤져봐. 그리고 저택 전시장에도 군데군데 있잖아. 다 거둬다 입혀.”

드루쉬아가 진심이라는 걸 알고 기사들의 얼굴이 허옇게 떴다.

“앞으로 쓸데없는 데 발끈해서 시비 걸리면 중갑옷에 중장비까지 얹어줄 줄 알아. 그리고 미하일.”

“네, 각하.”

“대공령에 가야겠어.”

“네? 저 온 지 얼마 안 됐는데요.”

“그래서 못 간다고?”

미하일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벌써 몇 달째 수도와 대공령과 탈리온 영지를 순회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가차 없었다.

‘저 봐, 저 봐.’

‘눈치가 없어서 몸이 고생이네.’

기사들은 눈치 없는 보좌관을 향해 혀를 끌끌 찼다. 그런 기사들을 보며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도리안, 집사에게 창고 열쇠 받아다가 장비 꺼내.”

“네, 알겠습니다!”

저택에서 가장 나이 어린 기사 도리안이 다른 기사들의 눈치를 보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헉, 진짜야!’

기사들은 골동품을 몸에 걸쳐야 할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고 눈치 없는 보좌관에 대한 동정은 금세 잊었다.

요 며칠 내내 저기압이던 드루쉬아는 그렇게 연무장을 한바탕 휘저어놓고 돌아섰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안팎으로 속을 썩이는군.’

속 썩이는 인물에는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과 며칠 전 일을 생각하며 드루쉬아는 열 오르는 목을 쓸었다.

황궁에서의 일은 아시카가 정신이 나가 벌어진 일이었다고 치자. 그녀가 미친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끝내 밀어내지 못하고 어느 순간부터 열렬히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때도 내 정신이 아니었지.’

드루쉬아는 샤프리와 약혼하면서 더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명목상의 약혼이라도 그는 제 친우이자 약혼녀에게 충실했다.

너무 오래 여자를 멀리해서 그런 거라고, 욕정 따위 초연한 줄 알았더니 자신도 여자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사내였던 모양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변명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일을 저질렀다.

‘내가 어쩌자고 그런 짓을.’

창백하게 질려 과거의 기억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여자가 안타까워서. 그런데도 파리하게 질린 입술이 지나치게 유혹적이어서 저도 모르게 빼앗고 싶어졌다.

이그레인의 이름을 지닌 여자를. 미움인지 원망인지 모를 감정으로 제 가슴 깊숙한 곳에 박혀버린 그 여자를.

드루쉬아는 긴 숨을 내쉬며 뒤따르던 칼프를 돌아보았다.

“대공령으로 미리 서신을 보내. 조만간 가겠다고.”

“직접 움직이실 겁니까?”

“대공령에 관한 소문이 심상치 않아. 조용히 지나갈 수도 있었는데 너무 커지고 있어.”

“저, 각하.”

언제나 거침없이 말하던 칼프가 망설이는 걸 보고 드루쉬아의 한쪽 눈썹이 슥 올라갔다.

“아직 소문이 퍼진 건 아닌데 말입니다.”

“뭔데 그래?”

“선황제 폐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입니다.”

드루쉬아의 표정이 단박에 굳어졌다.

“그 얘기 말인가?”

“네. 선황제 폐하께서 한동안 칩거하다 돌아가셨잖습니까. 그것이 대공성의 저주였다는 이야기가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한때 그런 소문이 돌았던 적이 있었다. 호기롭게 대공성을 함락시킨 선황제가 부상을 핑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정정한 모습으로 다시 국사를 이끌면서 소문은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 뒤부터 선황제가 지병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모두 알았다. 원래 정정했던 황제는 10년 가까이 지병으로 고생하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소문이 다시 돌면 황실이 가만히 있지 않겠군.”

선황제 사후 황실은 대공령의 문제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제재를 풀지도 강화하지도 않으면서 현상유지만 해오던 지금, 잠자는 벌집을 들쑤시는 꼴이 될 터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 황실이 대공령에 개입하게 되면…. 하.”

평민 거리에서 벌어진 화재사건 하나로 제국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개의 가문이 황실과 엮여 신경전을 벌이게 되었다.

“지금 분위기면 그 소문이 확산되는 것도 시간문제겠어.”

그랬다간 제국 전체의 이목이 대공령에 쏠리게 된다.

“방화범에 대한 건?”

“실마리를 못 잡고 있습니다. 치안대는 진작에 손을 놓은 분위기입니다.”

“하.”

처음부터 느낌이 싸해서 가문의 기사들을 투입했다. 그런데 소득도 없이 일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 일이 사고일 리 없어.”

의심은 이제 확신이 되었다.

“사람들을 치료소로 불러들인 과정부터 탐문 해 봐. 누가, 어떤 경로로 사람들에게 접근했는지도. 어느 가문에 속한 치료사였는지 확실하게 알아보도록 해.”

“네, 각하. 그리고.”

“또 뭐야?”

켜켜이 쌓이는 문제들로 드루쉬아의 목소리에 절로 날이 섰다.

“오늘 오후에 헤네시 남작 부인의 장례식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준비하셔야 늦지 않게 갈 수 있습니다.”

“아, 장례식.”

명목상의 약혼이라도 기본 도리는 해야 한다. 그러나 썩 내키지 않는 방문이었다. 드루쉬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가운데 장례식은 공동묘지에서 진행되었다. 영지에 속한 가신이었다면 영지로 보내져 그곳에서 장례를 치렀을 텐데 헤네시 남작 부인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남편을 잃고 혼자된 남작 부인을 마이헬러 가문에서 거두었다던가. 이후 몸이 약한 후작 부인을 대신해 후작가의 소소한 일들을 처리해왔다고 들었다.

관이 땅속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샤프리는 흐느꼈다.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힘겨워하는 모습에 드루쉬아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싫어하던 게 아니었나.’

그래도 십수 년을 함께 했으니 충격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것은 마이헬러 가문의 장남이자 소후작인 에르윈과 차녀인 샤프리, 가문 내의 사용인 몇 명이 전부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드루쉬아가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샤프리가 다가왔다.

“드루.”

바르르 떨리는 하얀 손이 그의 팔을 잡았다. 금방 쓰러질 것만 같은 하얀 얼굴을 보고 드루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까지 에스코트하지.”

두 사람이 마차로 향하는 동안 따가운 시선이 따라붙었다. 드루쉬아는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에르윈과 시선이 마주쳤다. 진한 금발에 샤프리와 닮은 청록색의 눈동자. 그러나 나머지 한쪽 눈은 황금색이었다.

마이헬러 가문에서만 태어난다는 녹색과 금색의 오드 아이. 오래전 황실과 피가 섞인 증거라는 소문이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었다. 황실에서는 진작에 황금안의 명맥이 끊겼는데 기이하게도 마이헬러 가문에서는 아직도 종종 황금안이 섞인 오드 아이가 태어났다.

아름다울법한 눈동자가 기묘하게 불쾌하게 느껴졌다. 에르윈은 드루쉬아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마이헬러 후작저에 도착했을 때 바로 떠나려는 드루쉬아를 샤프리가 또다시 잡았다.

“드루, 오늘은 조금만 더 있어 주면 안 될까?”

“침실까지 에스코트가 필요하다면 하녀를 부르도록 해.”

여자를 내외하는 성격도 아니면서 드루쉬아는 샤프리의 침실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기억도 까마득한 옛날 어렸을 때 몇 번뿐. 성년이 된 이후에는 철저히 선을 지켰다.

그 냉랭한 거리감에 샤프리의 입매가 굳어졌다.

‘이런데도 남들은 우리가 친한 줄 알지.’

그동안은 샤프리도 그런 드루쉬아를 내버려 두었다. 약혼녀를 두고 한눈팔 남자는 아니니까 시간이 지나면 저를 봐줄 줄 알았다.

그런데 약혼 전이나 후나 드루쉬아는 한결같았다. 형식상의 약혼이라는 말과 친우라는 허울을 철석같이 믿고 지켰다.

그 사이에 이그레인이 끼어들 줄이야.

‘하필 그 여자가!’

샤프리의 눈에는 보였다. 틈만 나면 드루쉬아의 열기 어린 시선이 아시카의 뒤를 쫓는 것을. 분명 드루쉬아는 흔들리고 있었다. 이대로 뒀다간 허울뿐인 관계마저 끝장날지도 모른다.

샤프리는 한숨을 쉬며 한발 물러났다.

“그럼 응접실까지만. 차라도 한잔하면 좋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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