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
스며드는 한기에 온몸이 떨렸다. 아시카는 늘어뜨린 하얀 손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다음에 언제….”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진작에 봐두었던 마차까지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마부석의 차양 아래 웅크리고 있던 마부가 아시카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시카는 이그레인 공작저로 가자는 한마디만을 남기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은 어둡고 눅눅했다. 아시카는 입을 앙다물고 허리에 힘을 주었다. 움츠러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얼마 뒤, 돌연 마차 문이 열렸다.
“잠깐, 기다려.”
조금 전 헤어졌던 남자가 단숨에 안으로 뛰어들었다. 드루쉬아는 재빨리 의자에 앉으며 마차 문을 닫아걸었다.
아시카는 놀라지도, 왜 이러냐고도 묻지 못했다. 파리하게 질린 낯빛에 검은 눈동자가 어둑한 허공 어딘가에 고정되어있을 뿐.
빗소리가 요란하게 마차 지붕을 두드렸다. 여과되지 않은 소리는 비좁은 공간을 사정없이 흔들고 애써 묻어두었던 기억 한 자락을 기어이 끄집어내고야 말았다.
“레이디 이그레인.”
깊게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마저 위협적인 소음 속에 파묻혔다. 숨조차 멎은 듯 꽉 다문 그녀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아시카 이그레인.”
재차 부르는 목소리는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요란한 빗소리가 파괴적인 소음으로 돌변해 기억 언저리를 파고들었을 때, 언젠가 들었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시카,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어린 딸을 달래고 아비가 마차를 나선다. 가지 말라고, 함께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환하게 미소지으며 나서는 부친을 잡지 못했다. 그렇게 떠나간 부친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콰르릉, 콰광.
요란한 천둥소리가 마차를 통째로 찢어놓을 것처럼 울렸다.
하얗게 질린 아시카의 얼굴은 두려움을 토해내지도 못하고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흔들리는 마차의 진동이 산사태에 휩쓸렸던 그날의 기억 같아서. 파괴적인 소음과 어둠 속에 갇힌 채 돌아오지 않는 아비를 기다리던 그 날 같아서.
드루쉬아는 자신이 왜 이 마차에 올라탔는지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망치는 여자를 차마 혼자 보낼 수 없었다. 부모의 빈 관을 땅에 묻으며 망연했던 저처럼, 그날의 기억을 악몽으로 품고 있을 저 여자를.
모든 것이 떠내려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자리에서 추도식을 올리던 날, 드루쉬아는 여덟 살 어린 소녀를 처음으로 보았다.
소리 내지도 흐느끼지도 않고 사슴처럼 까만 눈동자에서 끝도 없이 눈물을 흘리던 소녀를. 어린 소녀가 어찌 그리 처연하게 울 수 있었을까.
드루쉬아도 알고 있다. 실은 서로 원망할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라는 걸. 서로를 향한 증오에는 서로만이 이해하는 깊은 상처가 있다는 걸. 그래서 더욱 미워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
그렇게 양쪽은 분노하고 슬퍼하면서 이미 서로 안에 있었다. 그 감정이 시작된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서부터.
날 선 가시가 가득한 껍질이 벗겨지고 나면 흉하게 갈라진 상처가 드러난다. 드루쉬아와 아시카는 그런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가만히 마주 앉아있던 드루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실례하지.”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시카에게 들리지 않았다. 대신 늪처럼 그녀를 잠식해가던 요란한 빗소리가 멀어져갔다. 온몸을 진동하는 소음 대신 귓가에 따뜻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아시카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가까이 다가와 있는 짙푸른 눈동자가 그녀의 것처럼 젖어 있는 것은 꿈일까 현실일까.
아시카의 귀를 덮고 있는 커다란 손은 심장이 달린 것처럼 맥동했다. 그 미세한 진동에 맞춰 그녀의 심장도 두근, 두근 함께 뛰었다.
따뜻하고 다정하다. 두려움을 가려준 손길이. 그녀의 심장에 닿는 온기가. 한껏 파헤쳐지던 기억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떨림도 잦아들었다.
아시카의 손이 저를 감싼 남자의 손을 가만히 매만졌다. 그것이 꿈이나 환상이 아닌 실체라는 걸 확인하려는 양. 그 작은 움직임에 멈춰있던 상대도 따라 움직였다.
감정을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가 가까이 다가올 때 아시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따뜻한 숨결이 피부에 닿고 이어 말캉한 감각이 입술에 내려앉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미끄덩한 감각이 밀려들 때, 아시카는 모든 생각을 잊었다.
어둠을 가르는 파괴적인 소음과 몸을 들썩이는 진동, 그녀를 집어 삼키던 그날 밤의 기억 모두를.
대신 습한 숨결이 뒤섞였다. 따뜻하고 다정한 남자의 체온과 함께.
* * *
이그레인과 탈리온, 두 가문의 악연은 40년 전 아크펠라 대공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반역죄로 선황제의 군대에 의해 폐허가 되어버린 대공성. 선황제는 대공성을 완전히 폐쇄하고 반역자의 땅이라는 이유로 대공령에 대한 온갖 제재를 가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관리를 대공령과 인접한 두 개의 가문, 이그레인 공작가와 탈리온 공작가에게 맡겼다.
수년간 광대한 대공령을 관리하던 두 공작가는 관리체계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혼맥을 추진했다. 탈리온의 무력과 이그레인의 재력이 합해지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이때 이그레인 공작가의 적자 웨이브와 탈리온 공작가의 적녀 반느의 정략혼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웨이브가 결혼에 반대하고 나섰다. 웨이브는 결혼을 거부하면서 이미 정인과 아이들이 있음을 고백했다.
양쪽 공작가는 충격에 빠졌다. 사교계에서 한 번도 추문을 일으킨 적 없는 이그레인 소공작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그런데도 양쪽 가문은 결혼을 밀어붙였다. 사생아는 사생아일 뿐이라면서. 당사자의 거부와 가문의 이해관계, 대공령에 주둔한 기사단이 얽힌 복잡한 상황 속에서 예기치 못한 비극이 발생했다.
웨이브의 정인과 아이들이 모종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이 습격으로 인해 정인과 작은 아이가 사망하고 장자인 란체 하나만이 큰 부상을 입은 채 구조되었다.
누구의 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정혼을 반드시 성사시키려던 탈리온 공작인지, 아들의 비행을 눈감아줄 수 없었던 이그레인 공작인지. 소문은 분분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한 채 두 사람의 죽음은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 공작이 사망하고 작위를 이어받은 웨이브는 예정대로 반느 탈리온과 결혼했다. 당연히 둘 사이는 좋지 않았고 웨이브는 정식으로 입적한 란체를 후계자로 선포했다.
그렇게 2년가량 지났을 무렵, 웨이브와 반느의 사이가 나아지면서 반느가 아이를 가졌다. 껄끄러웠던 두 가문의 분위기도 나아지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비극이 찾아왔다. 이그레인의 본성 침실에서 반느가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최초 발견자의 증언으로 반느 스스로 목을 맸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자살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반느의 오빠인 네오렌은 이를 믿지 않았다. 누이의 죽음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며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웨이브는 탈리온 공작가의 항의를 묵살했다.
반느는 그렇게 배 속의 아이와 함께 이유 모를 죽음으로 사라졌다.
이 문제로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사이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탈리온의 모든 이들이 반느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고, 네오렌은 누이를 저주받을 이그레인의 땅에 묻을 수 없다며 시신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웨이브는 모든 요구를 거절했다.
함께 주둔해 있던 대공령에서는 이 문제로 양측 기사단이 몇 차례나 심각한 충돌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황제의 명으로 협력해야 하는 두 가문이 싸울 수는 없는 노릇. 두 가문은 서로를 외면하는 것으로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웨이브의 아들 란체가 자라서 결혼하고 아시카가 태어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쪽 가문의 감정도 조금은 희석되어 갔다.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영지는 대공령을 사이에 두고 맞물려 있었는데 대공령은 계속된 가뭄과 물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탈리온은 로샤강 상류에 댐을 건설하자는 의견을 냈다.
로샤강은 탈리온에서 시작해 대공령을 관통해 이그레인 영지로 들어가는 제법 큰 강이었다. 란체는 적극 찬성했다. 이그레인의 전폭적인 지원과 탈리온의 주도하에 공사는 무려 5년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완공을 기념하던 날, 양쪽 가문의 가신들과 공사 관계자 등 수십 명의 주요 인사들이 현장을 찾았다. 맑았던 하늘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건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사고가 발생했다. 완공되었던 댐이 폭발과 함께 급속도로 무너지면서 엄청난 양의 물이 방류된 것이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급류에 휘말렸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쓸려나갔다. 살아남은 것은 극소수뿐, 참석자 대부분은 그날 목숨을 잃었다.
그날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비로 주변의 강물과 지류가 함께 범람했다. 비속에서도 양쪽 가문은 실종자를 찾기 위해 수색을 계속했다. 강가에 떠밀려 온 시신은 찾았지만 대부분은 이미 하류로 휩쓸려간 뒤였다.
그때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시일이 지날수록 시신은 더 멀리 떠내려갈 것이고 아예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비가 오는 와중에도 탈리온의 기사단과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수색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사고가 발생하고 사망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웨이브는 수색 중단을 명령했다. 더는 희생자를 늘릴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탈리온 측에서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목숨을 걸고라도 끝까지 수색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저항이 거세지자 웨이브는 이그레인 영지에 탈리온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이그레인의 실종자들은 거의 찾은 상태였고 찾지 못한 대부분은 탈리온의 사람들이었다.
비는 계속 쏟아졌다. 생전 없던 우기라도 찾아온 것처럼. 그렇게 수색을 막아버리고 웨이브가 금지령을 푼 것은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뒤였다. 시일이 오래 경과 돼서 더 이상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사람들 모두 충격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던 시기였다. 양쪽 가문은 사고 현장에 모여 추도식을 올리고 각자의 가문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탈리온 측은 대부분 시신조차 없는 빈 관을 묻어야 했다.
그 뒤부터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그레인 영지의 사람들은 공사를 주도한 탈리온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탈리온은 웨이브의 봉쇄령으로 인해 가족의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며 맹비난했다. 과거 반느의 죽음조차 웨이브의 짓이 아니었냐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두 가문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양쪽 병력이 함께 주둔한 대공령에서는 시시때때로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했다.
하지만 대공령을 지키는 것은 황제의 명령. 웨이브와 네오렌은 더 이상 서로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하면서 가신들과 기사들에게 침묵을 종용했다.
모든 것이 휩쓸려갔기에 사고의 원인조차 찾지 못하고 묻어버린 비극이었다. 분노와 슬픔을 토해낼 대상을 잃어버린 이들은 그 화살을 서로에게 돌렸다.
그리고 14년. 잃어버린 가족을 지워버리기에는 아직 짧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