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29화 (29/153)

#29.

“탈리온의 기사가 왜 여기 있지?”

그가 입은 옷은 기사의 정복이 아닌 사복이었다. 비공식적인 방문이라는 말이었다.

아시카의 질문에 상대의 얼굴이 더욱 사납게 일그러졌다. 질문을 받는 것조차 불쾌한 듯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원래 불구경이 재미있다지만 불은 한참 전에 꺼졌습니다. 구경거리가 필요하면 다른 데 가보시죠.”

“탈리온의 기사들은 원래 이렇게 무례한가? 그대의 직위가 어떻게 되지?”

“대답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아시카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사복까지 챙겨 입고 온 걸 보면 대공령 문제 때문이겠네. 치안대와 협조하고 있나? 아니면 탈리온이 단독으로 움직이는 건가?”

“캐묻는 게 재밌습니까? 들쑤시면 뭐라도 나올 것 같아서요? 아, 어느 귀족 가문은 문제가 터지면 일단 덮는 게 우선이라죠? 사람 수십 명이 죽든 말든 입 싹 닦고 나 몰라라 한다던데. 이번에도 트집거리 잡힐까 봐 사전 조사 나오셨습니까?”

빈정거리는 어조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감히 소공작을 상대로 내뱉기에는 지나치게 무례한 언사였다.

‘수도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아마도 영지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탈리온의 위명은 검이 아니라 입으로 싸워서 생긴 명성이었나 보군. 하긴, 그러니까 하급 기사들에게 칼이나 얻어맞고 다니지.”

“어디 감히!”

“어디 감히 일개 기사 따위가 나에게 무례를 범하는가!”

얼음장이 깨지듯 쩡하는 목소리였다. 가녀린 체구에서 나온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단호한 외침이었다.

순간 멈칫한 남자의 얼굴이 썩은 사과처럼 일그러졌다. 아시카를 노려보는 시선이 잡아먹을 것처럼 흉흉하다.

“애거나이트 델피노 남작입니다. 일개 기사 따위가 아닌 탈리온의 기사단장으로서….”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놈이 수도 거리 한복판에서 패싸움을 벌여? 탈리온의 수준을 알만하네.”

아시카는 상대의 말을 싹둑 잘라먹고 내질렀다. 저보다 배는 덩치 큰 사내라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양쪽 기사들의 다툼은 해묵은 분풀이라 생각했기에 유하게 넘기려고 애썼다. 그러나 해묵은 원한이 있다 해도 하극상은 또 다른 문제였다.

날 선 대치에 구빈원 앞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쭉 빼고 주시했다. 어디선가 다급한 말발굽 소리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뚫린 입이라 말은 바로 합니다. 가문 차원에서 보낸 항의를 깡그리 묵살하시니 이렇게라도 바른말을 하는 것뿐입니다.”

“대체 언제적 일을….”

“그만!”

바로 뒤에서 말 울음소리와 함께 쩌렁한 고함이 울렸다.

아시카와 애거나이트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말이 다급하게 멈추고 익숙한 상대가 뛰다시피 말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애거나이트, 그 입 닫아.”

“각하!”

“한마디라도 더 하면 당장 영지로 돌려보낼 줄 알아.”

드루쉬아의 단호한 명령에 애거나이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잔뜩 성난 시선으로 아시카를 노려보았지만 드루쉬아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레이디 이그레인.”

급하게 달려왔는지 드루쉬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탈리온 공작님.”

덩치 큰 기사를 앞에 두고도 잔잔했던 심장이 드루쉬아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부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하다 만 이야기가 있었지? 서신을 보냈다간 또 거절당할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어.”

아시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설마 내 동선을 모조리 꿰고 있는 거야?’

남작 부인의 살롱은 공식적인 일정이기에 알 수도 있겠거니 했다. 그러나 오늘 외출은 나일과 은밀하게 진행한 일이었다.

“애거나이트, 사람들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우리 쪽 인원 철수시켜.”

드루쉬아의 노기 서린 얼굴을 보고 애거나이트는 고개를 떨궜다.

주변에는 치안대원이 아닌 사복 차림의 기사가 몇 명 더 있었다. 조사를 위해 조용히 인력을 배치했는데 애거나이트 때문에 시선이 집중되고 말았다. 원래 이렇게 경솔한 사람이 아닌데 이그레인만 연관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수도로 부르는 게 아니었는데. 조부님의 지시만 아니었다면.’

드루쉬아는 치솟는 화를 꾹 눌렀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각하.”

애거나이트는 부릅뜬 눈으로 아시카를 노려보고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드루쉬아의 머리칼이 비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고 아시카의 망토 후드도 젖어서 축 늘어졌다.

아시카는 얼굴에 튀는 빗물 때문에 눈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저를 감시하고 계신 건가요?”

“그대가 내 서신을 연달아 거절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어.”

“감시하고 있었다는 말이네요.”

“따지는 건 나중으로 미루지. 그보다 급한 게 있어. 레이디 이그레인이 데려간 그놈, 그만 넘겨줬으면 해.”

또 나일의 이야기다. 이상하게도 드루쉬아는 처음부터 나일을 잡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탈리온 측에서 잡아들인 사람들이 더 있지 않나요?”

“레이디 이그레인.”

드루쉬아는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쓸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지난번에 말했잖아. 그놈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니까. 대공령 사람들에게 이미 확인했어. 외지인이 대공령에 나타나 이것저것 캐묻고 다녔다고. 방화범일지도 모르고, 제일 수상한 놈이 그놈이야.”

“방화범은 아니라고 했어요. 단지 구빈원에 있다가 휩쓸렸을 뿐이라고….”

“지금 그놈 말을 믿는 거야? 언제 봤다고?”

드루쉬아가 눈을 크게 뜨며 언성을 높였다. 아차 싶어서 아시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공령에 희귀병 환자 마을이 있다면서요? 공작님께선 알고 계셨나요?”

이번에는 드루쉬아가 입을 닫았다.

“설마 알고 계셨어요? 왜 저희 측에는 알리지 않았죠?”

“양쪽 진영이 관리하는 지역이 엄연히 구분되어 있어. 그걸 시시콜콜 알려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잖아.”

“점점 확산되고 있다면서요? 전염병일 수도 있는데, 그런 중요한 정보를 숨기는 건 직무 태만 아닌가요?”

“아니야. 전염병 같은 게 아니라고.”

드루쉬아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나일이 보여준 것과 같은 태도에 아시카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알고 있는 게 뭐죠? 아니, 뭘 숨기고 있는 건가요?”

“레이디 이그레인, 지금 이 일의 파장이 얼마나 커지고 있는지 알아? 대공령에서 전염병 환자촌을 숨기고 있었다는 소문이 번지고 있어. 대체 그놈이 왜 거기 있었는지, 뭘 알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협조를 원한다면 공작님께서 알고 계신 정보를 주세요.”

아시카는 비에 젖은 눈가를 손끝으로 훔치며 말했다. 쏟아지는 비로 인해 시야가 가려지는 것이 거슬렸다. 그러다 문득 나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황제는 왜 굳이 대공성을 봉쇄하라고 했을까요? 어차피 폐허가 됐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뭔가 더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아시카는 드루쉬아에게 한발 다가가며 서늘하게 물었다.

“대공성이 봉쇄되어 있는 것이 맞나요?

순간 드루쉬아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쳐갔다. 하지만 이내 단호하게 굳어진 얼굴로 맞받아쳤다.

“그놈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기에 엉뚱한 소리를 해? 40년이나 닫혀 있었던 곳이야.”

“대공성에 뭐가 있죠?”

“그걸 난들 알아?”

“대공성을 폐허로 만든 게 정말 선황제 폐하가 맞나요?”

“그게 무슨 소리야?”

드루쉬아의 놀란 얼굴을 보고 아시카는 급히 입을 닫았다. 나일이 그녀에게 던진 말들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뱉고 말았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푹 젖어버린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다가왔다.

“각하, 대화를 나누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습니다.”

“애거나이트와 먼저 철수해.”

“저, 그게. 단장님이 각하를 기다리겠다고….”

이제 얼굴에서는 빗물이 줄줄 흘렀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쏟아지는 비에 드루쉬아는 손으로 연신 눈가를 쓸었다.

후드를 쓰고 있는 아시카 역시 푹 젖어 얼굴에서 빗물이 흘렀다. 서늘하게 굳어진 얼굴이 화가 났기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어디 가서 조용히 얘기하자고 한들 순순히 따라올 여자도 아니고.’

아시카는 가까이 있던 기사를 바라보다 물기 젖은 입술을 열었다.

“처음 보는 기사던데, 애거나이트 델피노 남작은 영지 출신인가요?”

“본적이 없다고? 그럴 리가.”

“수도에 온 적이 있나요?”

서로를 적대하는 만큼 이그레인과 탈리온은 서로를 잘 알았다. 그런데 애거나이트는 그녀가 수도에 있는 내내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수도에는 온 적이 없지. 하지만 생판 처음 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웃기군.”

보다시피 이그레인 얘기만 나오면 길길이 날뛰는 인물이라 수도로는 아예 부를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아.”

아시카는 뒤늦게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이제 생각이 나나?”

여전히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드루쉬아가 언제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추도식에 있었나 보구나.’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한 실종자들을 위해 사고 현장 근처에서 치러진 추도식. 양쪽 가문의 험한 다툼에도 추도식만큼은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공작님께선 제 가문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시나요?”

파리해진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아시카라고 해서 할 말이 없지는 않았다. 다른 이그레인의 가신들처럼 그녀도 화를 내고 울분을 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다고 해서 그녀마저 동조해버리면 현재의 협력 관계를 이어갈 수 없게 된다.

“나는 기억해.”

드루쉬아의 대답에 아시카의 눈이 커졌다.

“그날 본 이들을 기억하지는 못해도 희생자가 몇 명인지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 남은 사람들은 어떠한지. 초상화를 구해서라도 모두 머릿속에 욱여넣었지. 시신도 찾지 못했는데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 상처 입은 이들이 억울하지 않은가.”

담담한 목소리가 해묵은 상처를 꺼내어 뱉는다. 그러나 말 속에 담긴 무게가 두 사람의 가슴 위에 묵직하게 얹어졌다.

“그러니 내 기사의 무례는 넘어가 줬으면 해.”

드루쉬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아마도 이것이 드루쉬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과일지도 모른다. 차마 거기다 대고 화를 낼 수도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새카맣게 비를 쏟아내는 하늘 한가운데 번쩍 섬광이 지나갔다. 뒤이어 콰르릉, 울리는 천둥소리에 그녀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놀라 움츠러든 어깨와 희게 질린 얼굴. 아시카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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