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28화 (28/153)

#28.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고 싶어요. 예를 들면 주술사나 뭐 그런 건 아닌지 해서요.”

“풉.”

“아가씨!”

여자는 웃음을 터뜨렸고 나일은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아아, 미안하네. 너무 뜬금없는 소리라서 말이지.”

여자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주술사의 영혼이 깃들었다는 물품은 몇 개 있지만, 그런 것들이 으레 그렇듯 검증된 건 아무것도 없어. 한 번 보여드릴까?”

아시카는 주술사를 본 적이 없다. 어릴 적 아버지가 읽어준 동화 속에서나 등장하던 존재일 뿐. 실제로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주술이든 뭐든 그녀가 겪은 이상한 일에 대해 실마리를 찾기를 바랐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누군가 당신에게 가보라는 말을 해줬어요. 당신에게 능력이 있다면서.”

“물론 내게 여러 능력이 있긴 하지. 그게 주술은 아니지만.”

여자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지금 상황이 퍽 재미난 모양이었다.

“예를 들면요?”

여자는 대답 대신 찻잔을 입에 대었다. 잠시 뜸을 들이는 몸짓이 상대의 긴장과 기대감을 끌어올린다. 한 모금, 두 모금. 차를 마신 여자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 공자님께선 가출해서 고생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얘기 같은 거? 공자님, 알고 있지? 집에서 당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나일의 입이 딱 벌어졌다.

“지금껏 고생 많이 한 거 같지?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앞으로 더 해질 거야.”

아시카에게 말할 때와 달리 여자의 목소리는 가차 없었다. 아시카는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나일을 돌아보았다.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는 것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래도 주술사가 아니라고요?”

“그거와는 좀 달라.”

“혹시 란탈 출신인가요? 거기 사람들에게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들었어요.”

“푸흡, 이걸 어쩌나.”

여자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엉뚱한 질문을 쏟아내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아시카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거 다 뜬소문이야. 거기도 여기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아. 평범해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기대와 다른 대답이 돌아오자 아시카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자는 웃음기 묻어나는 얼굴로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그래서 정말 궁금한 게 뭔가? 나를 찾아온 진짜 이유.”

아시카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난 한 달 내내 물어볼 곳도 없고 의논할 상대도 없이 모든 고민을 혼자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이 여자는 제 고민을 알아줄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숨을 가다듬으며 망설이던 입술이 열렸다.

“꿈을…, 악몽을 꿔요.”

웃음기 어렸던 여자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모든 것이 비슷해 보이지만 미묘하게 다른 상황에서 다른 일이 벌어지는 꿈을요. 계속 반복되어서 현실처럼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요.”

“그게 왜 문제가 되지? 비슷한 꿈을 반복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야. 별 의미 없을 수도 있고 예지몽일 수도 있고.”

“예지몽… 이요?”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아시카의 경험은 꿈보다는 눈을 뜨고 경험하는 환각에 가까웠다.

“레이디가 느끼는 문제가 뭐지? 이렇게 고민하게 될 만큼?”

여자는 굳어진 얼굴을 펴고 다독이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시카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등허리를 펴고 우아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가녀린 손마디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매번 강제로 어디론가 끌려가는 느낌이에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통제력을 잃는 게 두려운 거구나.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듣고.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불안하고.”

에둘러 설명했는데도 여자는 아시카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짚어냈다.

“예지몽이라고 말했지만 그 형태는 사람마다 달라. 어떤 이들은 과거를 읽고 어떤 이들은 미래를 경험해. 혹은 그 외의 다른 어떤 것 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것. 아시카의 손끝이 움찔했다.

“얼마나 됐나? 그 꿈을 꾸게 된 것이?”

“…한 달, 됐어요.”

아, 하고 여자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말이야.”

여자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찻잔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 레이디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일지도 몰라. 사람의 꿈은 무방비해서 파고들기 쉬운 약점이거든.”

“막연하네요.”

“그런 경우 뭔가 일관성이 있을 거야.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

아시카가 입을 다물자 여자는 조금 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생각해봐. 그리고 리네.”

그녀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초로의 여인이 다가왔다. 아시카와 나일을 여기까지 안내한 사람이었다.

“내 침실에 있는 푸른 약병을 가져와.”

내내 유령처럼 서 있던 리네는 조용히 방을 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시카는 생각에 잠겼고 여자는 그런 그녀를 보며 침묵했다. 리네가 돌아올 때까지 방에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가씨.”

생각에 골몰해 있던 그녀를 일깨운 것은 나일이었다. 그리고 언제 돌아왔는지 리네가 가져온 작은 약병을 여자가 건네고 있었다.

“잠자는 게 어렵거든 이걸 한두 방울만 차에 섞어 마셔봐.”

악몽이라고 했더니 수면제를 주는 걸까.

‘내 문제는 이게 아닌데.’

이 약이 자신에게 쓸모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머뭇거리는 아시카를 보며 여자가 덧붙였다.

“위험한 약은 아니니까 가져가서 실험해보고 사용해도 돼. 대신 약값이 조금 비싸.”

“가져온 돈이 얼마 없는데요.”

“나중에 사람을 통해서 보내 줘도 되고.”

“뭘 믿고 제게 이런 걸 내주세요?”

아시카의 의문 어린 표정을 보며 여자는 가만히 웃었다.

“나를 다시 안 볼 생각이야?”

이 인연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어조였다.

“내 이름은 이븐 시클레어. 지금은 망해버린 가문이지만 나도 한때는 귀족이었어. 이 정도면 믿을 만할까?”

“이븐 시클레어….”

“이븐이라고 불러주면 좋겠네. 그나저나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저 공자님에게서는 왜 이렇게 약 냄새가 진동하는 거지?”

“아.”

이븐은 곁에서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나일에게 손짓했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아랫사람이나 어린아이를 부르는 듯한 태도였다.

“얼마 전에 화상을 입어서 치료 중이라 그럴 거예요.”

“화상연고? 아닌데. 그보다 더 독하고 찌든 냄새인걸.”

나일이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그의 설명에도 이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만 보고 개인사를 줄줄이 읊더니, 냄새만으로도 병이 있는걸 알아보는 거야?’

아시카는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일을 돌아보았다.

“겁먹지 말고 이리 와. 무슨 일을 내도 힘이 있는 그쪽이 내지 내가 어쩌겠어?”

“누가 겁을 낸다고 그래요?”

“그럼 말해봐. 지병이 있어?”

나일의 불퉁한 대답에 이븐이 웃었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는데 처음보다 유해진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 보였다.

“말해주면 도움이 될 텐데. 싫으면 말고.”

“각화병이라고 아세요?”

딱히 비밀도 아닌 듯 나일이 툭 뱉었다.

모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이븐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아마도 한 달에 한 번씩 약을 먹고 있을 테지? 그것도 엄청나게 비싼 약을 말이야.”

“희귀병인데 잘 아시네요.”

아시카를 대할 때와 사뭇 다른 어조에 나일이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게 치료제는 아니지.”

“그 병에 치료제는 없다고 알고 있어요.”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 그걸 내주면 공자는 내게 뭘 줄 수 있을까?”

“치료제가 있다는 말인가요?”

나일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완치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피부에 딱지가 생기면 그때부터 점점 통증이 심해지고 나중엔 견디기 어려워지지. 그걸 막아주는 약이야. 물론 지금 먹는 약도 계속 먹어야 하고.”

“하. 제국 최고의 약제사도 치료제를 만들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당신 말을 어떻게 믿어요?”

나일의 시선이 전에 없이 날카로워졌다.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이븐은 너무 쉽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일이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워도 이븐의 태도는 여유로웠다.

“약을 만드는 게 왜 약제사뿐이라고 생각해?”

“당신….”

나일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혹시 연금술사인가요?‘

“아….”

아시카는 작게 탄성을 뱉었다.

독과 약과 온갖 물질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사람들. 그러나 제국에는 연금술사가 드물었다. 연금술사의 약은 강력하지만 위험하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연금술사를 유난히 경시하는 풍조 탓에 제국에서는 거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다.

“저는 당장 돈을 지불 할 능력이 안 되는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일의 눈동자는 빛이 났다. 이븐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레이디, 이 남자를 잠시 내게 맡기는 건 어때?”

“저, 저를요?”

나일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저는 물건이 아닌데요. 달리 써먹을 데도 없어요.”

나일은 진지한 얼굴로 아시카에게 말할 때와 전혀 다른 말을 뱉었다.

“약값 대신이라 생각하고. 레이디, 어때?”

“그걸… 제가 결정할 권리는 없는데요.”

결정권이 자신에게 넘어오자 아시카는 나일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렇죠. 아가씨께서 저를 아무 데나 팔고 그러시면 안 되죠. 그리고 진짜 치료제인지 아닌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이 약을 포기하겠다고?”

이븐이 눈꼬리를 접으며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마치 사탕을 주며 아이를 꼬드기는 마녀처럼. 알면서도 나일의 입에서는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레이디는 마부를 불러 댁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릴게. 염려하지 말고.”

“지금 아가씨를 혼자 보내라고요?”

펄쩍 뛰는 나일과 달리 아시카의 표정은 차분했다.

‘여자의 말이 사실이면 나일에게는 기회야.’

제국 내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연금술사다. 병 때문에 그녀에게 기꺼이 목숨까지 내맡기는 남자인데 혹시 모를 기회를 팽개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저에게 준 약값은 내일 늦지 않게 보내드릴게요. 그때 나일을 보내주시면 되겠네요.”

아시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일은 더욱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능력 있다며. 설마 여자 둘만 있는 곳이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아가씨.”

“어디로 가면 마차를 탈 수 있나요?”

아시카는 나일의 부름을 외면하고 이븐에게 물었다. 이븐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리네, 레이디를 안내해드려.”

“혼자서도 갈 수 있으니까, 따라오지 마.”

아시카는 단호하게 말을 뱉고 돌아섰다. 나일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홀로 빠르게 방을 벗어났다. 이븐과의 인연이 가볍지 않으리란 생각 때문인지 두려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밖으로 나왔을 때, 거리의 상점은 모두 문을 닫은 뒤였다. 짙게 구름이 깔려 달조차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 * *

덜컹거리던 마차가 조용한 거리 한복판에서 멈췄다. 아시카가 마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마부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 여기가 목적지가 맞습니까? 마님께서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라고 했습니다만. 하늘도 묵직한 것이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습니다.”

“괜찮아. 다른 대여소 마차를 이용하면 되니까.”

아시카는 이븐에게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니 이븐의 마차를 타고 공작저까지 갈 수는 없었다.

“다른 마차를 타실 거면 빨리 움직이셔야 합니다. 조금 있으면 거리의 마차들도 모두 들어갈 시간이거든요.”

“그러도록 할게.”

마부는 재차 당부하고 자리를 떠났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아시카는 구빈원 담장을 따라 걸었다.

“아.”

문득 서늘한 밤공기와 함께 피부에 닿는 차가운 감각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툭, 툭.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시카는 얼굴에 닿은 물기를 손끝으로 슥 닦아내고 망토의 후드를 깊게 눌러 썼다.

늦은 시간인데도 구빈원 곳곳에는 오가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구빈원 안에 공간이 없어 밖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었다. 빗방울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부산스럽게 일어나 건물 입구와 천막이 쳐진 곳으로 움직였다.

그 너머 새카맣게 불타버린 건물의 잔해가 보였다. 주위에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밧줄을 빙 둘러놓았다.

숯덩이가 되어버린 목조 골격과 까맣게 그을린 채 무너진 흙벽,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눌러버린 내부. 오래되고 허름했던 건물은 속을 파헤쳐놓은 괴물처럼 시커멓고 흉흉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탄내가 진동해서 옷소매로 코를 막았다.

“줄 안으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시카가 뒷문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있었구나.’

상대는 훤칠한 키에 골격도 남다른 사내였다.

“여긴 구경할 만한 곳이 못 됩니다. 그냥 나가시는 게….”

문득 다가오던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아시카와 시선이 마주치자 상대의 얼굴이 구겨졌다.

“망할 이그레인.”

속삭임처럼 작은 목소리였지만 아시카의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당황한 것도 잠시뿐, 아시카 역시 상대를 알아보았다. 검갈색 머리칼에 서른 남짓한 남자는 한 달 전쯤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치안대 구속실 안에서.

“탈리온의 기사가 왜 여기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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