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27화 (27/153)

#27.

평범한 성인 남자의 체구인 쥴마 앞에서 나일은 다소 마른 듯이 보였다. 전형적인 문관 출신인 쥴마보다 오히려 더 행정직에 어울리는 외형이었다.

“브레나일 네드로프입니다.”

나일이 내민 손을 쥴마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네드로프라면 로샤강 북쪽 변경지역의 자작가가 아닙니까?”

정확한 출신지가 나오자 나일의 눈이 커졌다. 놀라기는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아시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작은 가문까지 기억하고 있단 말이야?”

“공작가의 보좌관으로서 제국의 귀족 가문 이름 정도는 당연히 모두 파악하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지 않아?”

“많아도 제 할 일입니다.”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쥴마를 보면서 아시카는 입을 다물었다.

‘내 보좌관이 유능한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똑똑했네.’

“가계도까지는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작가의 직계인지 방계인지는 확인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만, 제 보조라는 말씀입니까?”

“그건 대외적인 직책이고 내가 개인적으로 필요해서 고용한 사람이야. 내 곁에서 움직이기 쉽게 쥴마가 적당히 뒤를 봐줬으면 해.”

“신원확인부터 하겠습니다.”

쥴마의 냉정한 대꾸에 아시카의 시선이 나일에게 옮겨갔다. 그는 어제 대화할 때 자신의 출신지를 말하지 않았다. 아시카는 그를 보내고 난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요즘 정신 줄을 놨나 봐. 어떻게 신원도 불분명한 사람을 믿을 생각을 했지?’

저도 모르게 나일에게 휘말린 기분이었다. 상대의 경계를 허물고 신뢰를 얻어내는 재주가 탁월한 남자였다.

아시카의 시선을 느끼고 나일이 재빨리 대답했다.

“신원확인은 얼마든지 하셔도 되는데, 기왕이면 조용히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쥴마와 아시카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저… 집을 나온 지가 좀 되어서요.”

머뭇거리는 말속에서 당혹감과 피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겪은 지 며칠 안 됐는데도 아시카는 저 표정을 알 것 같았다.

“설마 가출이라도 한 거야?”

나일이 입을 딱 다물었다. 시선을 돌리고 딴청을 피우는 것이 사고치고 도망치기 직전의 악동 같은 얼굴이었다.

아시카의 머릿속에 캐묻고 싶은 의문이 무럭무럭 자라났지만 차마 쥴마 앞에서 꺼낼 수는 없었다. 단지 기막힌 웃음만 나올 뿐.

“아가씨의 지시대로 저택에 숙소부터 배정하겠습니다.”

쥴마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며 상황을 정리했다. 나일은 티 나지 않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아시카의 눈초리는 더욱 따가워졌다.

* * *

거리의 상점들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는 늦은 시간이었다. 아시카는 나일이 구해놓은 대여소 마차로 이동해 미리 위치를 확인해 둔 상점 앞에서 내렸다.

건물 크기에 비해 유리 너머로 보이는 실내는 작았다. 아직 불이 꺼지지는 않았지만 어둑한 실내조명 탓에 내부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뭐 하는 덴가요?”

“나도 몰라.”

내내 조용히 따라오던 나일이 처음으로 의문을 드러냈다. 호위조차 떼어놓고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와 도착한 곳이 아트샵이라니.

아시카는 나일의 의문을 뒤로하고 음침한 유리문 손잡이를 당겼다. 문에 걸린 방울에서 딸랑, 하고 맑은소리가 울린다.

“헉.”

안쪽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노란 맹수의 눈동자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아시카와 달리 나일은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박제군요.”

문 안쪽 정면 진열장에 새카만 표범 박제가 시선 높이에 있었다. 사람의 체구를 훨씬 넘어가는 크기에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 콧잔등까지 찡그린 것이 생생하다.

나일은 아시카보다 한발 앞서 내부를 눈으로 살폈다.

“거참, 들어오라는 건지 나가라는 건지. 괜찮으세요?”

“아, 괜찮아. 맹수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아시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놀란 마음을 추슬렀다.

“본적이 있어요?”

“영지에 있을 때 사냥꾼들이 종종 맹수를 잡아서 진상하거든. 물론 죽은 것들이지만. 취미 삼아서 맹수를 사육하는 귀족도 있고.”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바로 등 돌리고 문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은 위협을 느꼈다.

“문은 열려있는데 주인이 없나 봐.”

아시카의 시선은 어둑한 실내를 차례로 훑었다.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문 바로 옆쪽에서부터 장미목으로 마감된 유리 진열장이 한쪽에 길게 늘어섰고 바로 앞 중앙을 가로지르는 테이블 역시 장미목에 금장으로 장식된 최고급품이었다. 진열장 안과 밖, 그 위에까지 정체불명의 조각이나 소품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벽면 한쪽은 대형 거울이 차지했는데, 칠기로 만들어진 최고급 거울 여덟 개가 나란히 벽에 붙어 있었다. 실내가 거울에 투영돼서 더 넓어 보이는 착시효과를 일으켰다.

“주인 없이 방치하기에는 지나치게 고가인데요.”

진열된 물건은 잡동사니인지 상품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데 오히려 진열장과 실내 장식이 초고가로 보였다.

“제국 내에서는 본적 없는 장식이야.”

아시카는 선반에 놓여있는 작은 단지를 손에 들었다. 반투명한 녹색의 단지는 재료도 문양도 생소했다. 테이블 위에 있는 도자기 역시 붉은색과 파란색 염료로 섬세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였다.

“찾으시는 게 있습니까?”

“헛.”

너무 놀란 나머지 아시카는 손에 든 단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여자가 바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주름진 여자의 얼굴은 표정이 없어서 언뜻 유령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 주인인가요?”

아시카의 질문에 여자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경계도 탐색도 아닌 그저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다. 나일조차 기이한 상대의 분위기에 긴장했다.

“약속하고 오셨습니까?”

“아니요. 약속을 해야만 만날 수 있나요?”

여자는 대답 대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안쪽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다리라는 말조차 없어서 기다리라는 건지 나가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가씨, 참견하고 싶지는 않지만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 알고 오신 건가요?”

아시카도 무작정 온 터라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호위 인원을 늘려서 다시 오는 게 나을까?”

“호위 기사를 늘리는 것보다는 저 한 사람이 나을 건데요.”

조금은 긴장된 목소리에 나일이 미간을 찡그렸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기사는 아니라면서.”

“아, 기사요. 그렇죠. 아니기는 한데.”

나일의 입가에 조소 비슷한 것이 스쳐 갔다. 이내 표정을 수습했지만 씁쓸한 표정에서 말하고 싶지 않은 사연이 느껴졌다.

“캐묻는 건 아니야. 만약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나를 지켜줄 수 있을지 궁금한 것뿐이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 가서 밀리는 실력은 아닙니다.”

“칼 맞은 걸 구해준 사람이 난데 별로 신뢰가 안 가.”

“그때는 화상을 입은 데다 연기까지 마셔서 방심했던 거고요.”

못 미더워하는 아시카의 태도에 나일은 왠지 억울한 얼굴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나름 쓸 만할 수도.’

문득 아시카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럼 탈리온 공작과 맞붙어 볼 수도 있을까?”

나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탈리온 공작이요? 제국의 제일 검과 말입니까?”

왜 하필 이 순간 떠오른 사람이 드루쉬아였을까. 아시카는 멋쩍게 시선을 돌렸다.

“너무 터무니없지? 그냥 한 번 해본 말이야.”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자신이 말을 꺼내놓고도 무리한 비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일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저도 궁금하네요. 탈리온 공작이 어느 정도일지.”

아시카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다니.

“왜요? 안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제국 내에서도 그 남자와 검을 맞댈 수 있는 사람이 몇 없다고 들었어.”

나일의 입에서 피식, 하고 웃음이 새었다. 장황한 설명보다 웃음 한번이 더 분명한 뜻을 전달했다.

‘뭐가 이렇게 자신만만해?’

이제껏 보여줬던 천연덕스러운 태도와 달리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기사들은 상대의 기척만으로도 실력을 가늠한다던데 평범한 레이디인 아시카는 그저 궁금할 따름이었다.

“들어오시랍니다.”

“흡.”

아시카는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자는 기척도 소리도 없이 유령처럼 다가와 있었다. 나일이 앞장서려고 하자 여자가 손을 들어 앞을 막았다.

“레이디께서 먼저입니다.”

“아니….”

반박하려는 나일을 두고 아시카가 먼저 걸음을 내디뎠다. 가만히 있으라고 조용히 입모양을 만들면서. 나일은 다소 불안한 얼굴로 아시카의 뒤를 따랐다.

진열대가 있는 곳 안쪽으로 켜켜이 쌓인 이국적인 상자들을 지나 비좁은 통로로 들어섰다. 미로처럼 갈림길이 계속 나오는 기이한 곳이었다. 마침내 통로가 끝나는 곳에 사람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 만한 작은 문이 있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 여자가 문고리를 잡고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오십시오.”

“여기가…, 흡. 콜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아시카는 격하게 기침을 토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안내해준 여자의 얼굴에는 동요가 없었다.

“흐읍, 이게 무슨 연기…. 콜록.”

당황한 아시카를 대신해서 나일이 그녀의 입에 손수건을 대주고 자신의 입을 옷소매로 막았다.

“가능하면 참아요. 환각 성분이 있어요.”

나일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시카는 눈을 찡그리며 나일을 노려보았다. 생리적인 눈물이 눈가에 고여 그렁그렁하다.

‘숨 쉴 다른 구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참으라는 거야.’

그런 핀잔이 담긴 표정이었다.

당황한 두 사람과 달리 여자는 차분하게 방문자를 고했다.

“손님이 왔습니다.”

어둑한 조명과 매캐한 연기 사이로 커다란 테이블과 잡동사니가 켜켜이 쌓인 선반들이 가득하다. 누가 있기는 한가 의문이 들 무렵, 테이블 옆에 느리게 움직이는 여자가 보였다. 정확히는 바닥에 흐트러진 검은 드레스 자락이었다.

“아, 잠시만….”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쉰 듯한 목소리. 기다리라는 상대의 말에 여자는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뭔가를 찾는 걸까. 드레스가 바닥을 온통 쓸고 있는데도 상대는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구석을 더듬거렸다.

끙끙대는 상대를 보다 못해 아시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와… 드릴까요?”

“상자가, 작은 검은색인데.”

방문한 손님이 누군지는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시카는 손수건을 나일에게 돌려주고 바닥에 몸을 숙였다. 찾을 것도 없이 테이블 아래 잡동사니와 뒤섞여 있는 검은 상자가 보였다.

“이걸 말하는 건가요?”

“아, 고마워. 상냥하기도 해라.”

바닥을 헤집던 여자는 상자를 받아들면서 몸을 일으켰다. 무심하게 상자를 건네던 아시카는 상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두운 적금발에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지닌 여자는 아름답고도 창백했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피부에서는 빛이 나는 느낌이었고 그린 듯한 이목구비는 사람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섬세했다. 마치 산채로 박제된 것처럼 소름 끼치는 아름다움이랄까.

아시카가 넋을 놓고 있자 여자가 먼저 손을 내밀어 상자를 쥐었다.

“눈이 어두워서 코앞에 있는 게 안보였네.”

“아.”

아시카는 자신의 무례를 깨닫고 상자를 건넸다. 그러나 무심결에 옮겨간 시선이 여자의 손끝에서 멈췄다.

창백한 손가락 마디마디에 알 수 없는 회색 반점이 보였다. 드문드문 나 있는 희미한 흔적인데도 유독 눈에 거슬렸다.

아시카의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차리고 여자는 재빨리 손을 거뒀다.

“이걸 어쩌나. 손님이 올 건 생각도 못 해서.”

여자는 검은 상자 속의 약초를 확인하고는 뚜껑을 닫아 옆으로 치웠다. 아마도 화로에 태우는 약초인 모양이었다.

이어 바닥에서 일어나 커다란 쿠션이 깔려있는 침대 같은 긴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그 움직임이 둔하다고 느껴질 만큼 느린 것이 퍽 이상하게 보였다.

‘어디가 불편한가.’

쿠션에 몸을 기대어 앉은 뒤에야 여자는 숨을 토해냈다. 그 짧은 움직임이 피로하기라도 한 양.

‘그 여자가 맞아.’

첫 만남에서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목소리와 검은 드레스, 독특한 분위기가 분명 그 여자였다.

“그래서, 나를 찾으신 분이 레이디인가? 아니면 이쪽 공자님?”

여자는 한결 편안해진 시선으로 아시카와 나일을 번갈아 보았다.

‘몰라보는구나.’

어쩌면 이라는 기대는 그렇게 맥없이 스러졌다. 혹시 자신을 알아본다면 물어볼 것이 많았겠지만, 지금 이 여자는 아시카를 처음 보는 것일 터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말문이 막혔다.

“나를 찾아온 건 레이디쪽인가 보군.”

여자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테이블 한쪽에 있던 다구를 끌어왔다. 찻잔을 꺼내고 화로 위 주전자의 물을 부어 차를 준비하는 손길이 자연스럽다.

조르륵 찻물을 따라내고 두 사람 앞에 밀어준 뒤에야 여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꺼내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너무 망설이지 않아도 돼.”

갈등하는 아시카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여자의 어조는 부드러웠다.

“저…. 혹시나 해서 말인데요.”

이런 말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꺼내도 되는 걸까. 말을 꺼내려는 아시카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왜? 뭐가 이상해 보이나? 괜찮으니까 말해봐.”

여자의 채근에 아시카는 용기를 내었다.

“혹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거나 하는 능력이 있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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