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26화 (26/153)

#26.

아시카의 말투가 뾰족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일은 뺨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뭐 딱히…. 사람을 가두려면 창문부터 튼튼하게 달아놨어야죠. 워낙 삭아서 툭툭 치니까 떨어지던데요?”

“거기 3층이었잖아.”

“여기도 3층인데요.”

“하….”

어이없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다. 아시카의 날선 반응에 나일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제 비기가 궁금하신 건 아니잖아요. 저는 얘기를 하고 싶어 찾아온 거고, 소공작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기가 팍 꺾인 목소리에 아시카의 마음이 약해졌다. 뭐가 이렇게 제멋대로인지. 나일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아시카는 체념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대화 좋지. 우선은 진실을 털어놓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어때?”

아시카는 숄을 어깨에 두르며 허리를 세웠다. 자신의 침실에서 이런 기막힌 대면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말을 들어보고 싶었다.

나일은 과장된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대공령에는 중병을 앓는 환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어요.”

“중병?”

“각화병이라는 아주 희귀한 병입니다.”

“희귀병이라면서 환자가 그렇게 많아? 마을까지 따로 만들어 살 정도면 오래됐다는 건데. 왜 나는 그런 얘기를 처음 듣지?”

이그레인은 대공령을 관리하는 두 개의 중심축 중 하나였다. 그렇게 중요한 문제를 이제껏 몰랐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공령 사람들이 철저히 숨기고 있으니까요. 만약 사실이 알려지면 이번에야말로 황실에서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두려워해요.”

“차라리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낫지. 어쩌면 대공령의 봉쇄를 풀 수 있는 동정 여론을 일으킬지도 모르잖아.”

주인을 잃어버린 대공령. 한때는 제국을 들썩이게 한 주범이었고 이제는 철저히 외면 받고 있는 땅이었다.

대공령 아크펠라는 제국의 건국 시초로서 한때는 황실에 맞먹을 만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 때문에 황제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아크펠라 대공이 병으로 쇠약해져 있을 때 황제의 군대가 대공령을 공격했고 하룻밤 사이에 대공성은 폐허가 되었다. 죄목은 반역이었다.

그날 밤 대공성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전해진다. 군대를 끌고 갔던 황제마저도 부상을 입고 간신히 생환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반역이라는 죄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공성의 비극에 대해 암암리에 황제를 비난했다. 사람은 고사하고 짐승 한 마리 살려 보내지 않은 그날 밤의 참상에 대해서.

거기서 그치지 않고 황제는 대공령의 백성들에게 이동 제한을 내렸다. 대공령 출신 귀족들은 아예 영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금족령까지 내려졌다. 그리고 그 관리를 위임받은 것이 대공령과 인접해 있던 두 개의 가문인 이그레인과 탈리온이었다.

그로부터 무려 40년이 흘렀다. 대공령에 대한 조치가 가혹하다는 여론은 진작부터 있어 왔지만 누구도 감히 선황제의 뜻에 반대하고 나서지는 못했다.

아시카의 말에 나일이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될 가능성이 커요. 전염병은 아니지만 계속 번지고 있거든요.”

나일의 대답은 더욱 아리송했다. 아시카의 얼굴에 의구심이 어렸다.

“병이 번지고 있다면 전염병을 의심해봐야지. 그래서 따로 마을까지 만든 거 아냐? 아니면 원인을 알고 있다든지.”

“추측은 하고 있지만 막연해요. 다들 이 병을 저주라고 생각하거든요.”

“저주?”

“네. 대공성의 저주요.”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나일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병에 걸린 사람들 모두 예전에 대공성 근처에서 살던 사람들이었어요.”

“말도 안 돼. 대공성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기사들이야.”

“병에 걸리는 조건은 저도 알지 못하지만, 예전부터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있어 왔어요.”

그건 그저 뜬소문 같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제국의 역사와 함께 굳건했던 대공성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어버렸으니 무슨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내 핍박받던 사람들은 병이 알려지면 그 일대를 모조리 불태워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도 그 마을에서 왔다고?”

아시카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일을 훑어 내렸다. 차분한 회색 머리칼과 청회색의 눈동자. 단조로운 옷차림이지만 별장에 갇혀있을 때와 달리 말끔해진 모습이었다.

“당신 귀족이지?”

나일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내가 소공작이라고 해서 귀족들만 만나왔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제국의 유통을 꽉 쥐고 있는 상단연합 소속 대부분은 평민 출신의 부유층이었다. 상단을 관리하는 아시카가 사교계의 귀족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만나는 것도 그런 부류였다.

물론 가난한 평민과는 다르지만 아무리 부유해도 태생부터 귀족인 사람들과도 차이가 있었다.

“그저 이름뿐인 귀족입니다. 병 때문에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다가 그 마을까지 가게 된 거고요.”

그의 말을 믿는 건지 아닌 건지 아시카의 표정만 봐서는 알기 어려웠다. 나일은 긴장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수도에서 온 치료사가 희귀병 환자들에게 치료 기회를 주겠다고 접근해왔어요.”

“대공령에 치료사가 찾아가서 그런 제안을 했다는 거야? 그게 말이 돼?”

“물론 시작은 대공령이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탈리온 공작령에 있던 환자에게 접촉했지요. 그 뒤 소식을 듣고 대공령 사람들이 함께 움직인 거고요.”

아시카는 나일의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대공령 사람들이 탈리온 영지를 오가고 있었어?”

나일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은 의아한 듯 조심스러운 얼굴이었다.

“모르셨어요? 대공령에 금족령이 내려진 게 무려 40년이 넘어요. 그사이 가까운 영지에 샛길 하나 정도 생긴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요.”

아시카는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지만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기기에는 석연치 않았다.

‘왜 하필 탈리온의 영지일까.’

이그레인은 고용된 기사단과 병사들이 지키고 있지만 탈리온은 전대 공작인 네오렌이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눈에 띄는 허점을 방치했다고?’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드루쉬아를 수도로 보내놓고 네오렌은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이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해지는 건 탈리온만이 아니겠죠. 어쨌거나 대공령은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책임이니까요. 거기다 대공령 사람들이 내내 숨겨왔던 문제까지 불거졌잖아요.”

생각보다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졌을 때 파문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위험한 걸 알면서 왜 수도까지 온 거야?”

“그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없으니까요. 소공작님께서도 약을 구해봤으니 아시잖아요.”

“아.”

약값이 어마어마했다. 한 번 먹을 약을 구하는데 평민들의 1년 치 생활비 이상의 돈이 들었다. 이런 약을 한 달에 한 번씩 먹어야 한다면 사실상 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처음에 나에게 말했던 대공성 이야기는 뭐지? 거기서 왔다고 말했잖아.”

나일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황제의 명령으로 완전히 봉쇄된 폐허. 대공성에 들어갔다는 건 황명에 불복했다는 말이며 반역죄로 간주 될 수도 있는 중범죄였다.

“대공성에는 분명 숨겨진 이야기가 있어요. 저는 그걸 알기 위해 갔던 거고요.”

“병사와 기사들이 지키고 있을 텐데 어떻게….”

믿을 수 없다고 말하려던 아시카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수도 한복판에 있는 고위귀족의 저택에 소리소문없이 숨어든 남자였다. 아무리 경계가 철저해도 황량한 폐허 한복판에 있는 대공성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터다.

“어이가 없네. 그래 봤자 폐허일 뿐인데 가서 확인할 게 뭐가 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황명까지 어겨가며 대공성에 들어가서 뭘 확인했지?”

“그건….”

나일이 생각에 잠기며 걸음을 옮겼다. 다소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방안을 서성였다. 부상 때문에 몸이 불편할 텐데 그조차 잊은 얼굴이었다.

“저도 제가 뭘 본 건지 모르겠어요.”

“말 돌리지 말고.”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요. 선황제는 왜 굳이 대공성을 봉쇄하라고 했을까요? 어차피 폐허가 됐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생각해본 적 없으세요?”

“그야….”

일종의 상징 같은 게 아닐까 했다. 반역이라는 죄목으로 폐허를 만들고 그것을 본보기 삼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그리고 대공성을 폐허로 만든 게 정말로 선황제였을까요?”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대공성에서 뭘 봤기에 그런 소리를 해?”

“그냥 폐허예요. 네, 폐허. 그런데 그게….”

부상으로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침착했던 남자가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뭔가 좀 이상했어요. 이건 그냥 느낌일 뿐이라서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워요.”

나일의 상태가 불안해지는 걸 보면서 아시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사나우니까 거기 의자에 앉으면 안 될까?”

“아, 네.”

생각에 빠져있는 와중에도 나일은 고분고분하게 테이블 의자를 가져다 앉았다.

‘도통 경계심이라곤 없어.’

저런 자연스러운 태도 때문에 아시카도 경계를 허물게 된다. 낯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무도회에서 친근하게 말을 거는 공자들처럼 스스럼없는 태도였다.

“그럼 나를 찾아온 이유가 대공성 때문이었어? 대공성을 관리하는 건 기사단이고, 나는 기사단에 대한 권한이 없어. 탈리온 공작이라면 모를…, 아!”

불현듯 다가온 깨달음이 있었다.

“설마 나를 찾아온 게 아니었던 거야?”

“그게….”

나일이 의자에 앉은 채로 긴장했다. 처분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다소곳한 태도에 웃음이 난다.

“맞구나. 그런 이유라면 내가 아니라 탈리온 공작을 만나려고 했겠지. 부상만 아니었다면.”

아시카의 기막혀하는 반응에 나일이 서둘러 변명했다.

“처음 생각은 그랬지만, 생각이 바뀌었어요.”

“왜? 탈리온 공작보다는 내가 상대하기 쉬울 것 같아서?”

“아니에요!”

이제 나일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보다는 실리적인 이유예요. 거기에는 이미 실력 있는 기사들이 넘쳐나고 제가 간다고 해서 쓸모를 입증하긴 어려울 테니까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약값이 제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잖아요.”

“아, 그 약.”

탈리온 공작가의 재산 규모는 상당하지만 워낙 많은 병사와 기사들을 보유한 탓에 늘 빡빡했다. 모르는 사람 하나 살리자고 비싼 약값을 감수하지는 않았을 터다. 그에 비하면 이그레인에게는 먼지 한 톨만큼의 값어치도 없는 소소한 비용일 뿐이고.

“그럼 당신이 내게 줄 수 있는 건 뭔데? 당신이 탈리온보다 나에게 쓸모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

나일은 아시카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라도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조심하는 눈치였다.

“제가 소공작님의 손과 발이 되어드릴 수 있어요.”

나일이 별장에서 지낸 며칠 동안 알게 된 것은 아시카가 조부인 이그레인 공작의 통제범위 밖에서 움직인다는 거였다. 기사단을 움직이지 못하는 아시카가 쓸 수 있는 인력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현직 가주와 후계자 사이에도 힘의 균형은 있었고 모든 것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제게 가장 필요한 건 약이에요. 그것만 약속해주시면 됩니다.”

이건 대놓고 목줄을 쥐여 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시카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좋은 기회.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

“대공성에 관한 문제는 도와줄 수 없어. 황명을 어기는 건 반역에 준하는 처벌을 받게 돼. 더구나 두 가문이 걸린 문제야.”

나일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게요. 대공성에 관한 정보가 있다면 제게 공유해주시는 정도면 돼요.”

“왜 그렇게 대공성을 궁금해하는 거지?”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곳이었다. 쥐새끼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다는 그곳에서 캐낼 것이 뭐가 있을까.

“저는 이 병이 그곳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해요. 원인을 찾으면 병을 치료할 방법도 찾을지 몰라요.”

“약이 있다며. 그게 치료제 아니야?”

“아니요. 증상을 늦추는 것뿐, 이 병은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어요.”

아시카는 굳은 표정의 나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절박함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 이제 만난 지 며칠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털어놓지 못할 무언가가.

‘이쯤 하자.’

대공령에 관한 이야기가 이게 전부일 리 없다. 그러나 나일도 자신이 지닌 패를 한꺼번에 내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일은 정확하게 아시카가 원하는 바를 제시했다. 차곡차곡 쌓이는 의문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했고 그것은 웨이브의 시야 밖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이 저택에서 아무도 모르게 나를 빼낼 수 있어?”

“네? 야반도주라도 하시게요?”

나일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가감 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표정이 아시카에게는 퍽 새삼스럽게 보였다. 그가 내내 주장했던 대로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혼자 외출하고 싶은데, 내 호위 기사는 절대 나를 혼자 내보내지 않거든.”

당장 아시카가 봉착한 문제였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을 지닌 드문 외형, 거기다 함께 다니는 잔느도 퍽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잔느에게는 미안하지만 비밀스럽게 움직일 동행으로는 부족했다.

“물론 가능합니다만. 어디 가시려고요?”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일단 내일 아침에 다시 저택으로 와. 정문으로 제대로 들어와서 내 보좌관 쥴마를 찾아. 나머지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일단 결정을 내리고 나자 다음은 신속했다.

잠시 얼떨떨한 얼굴을 하던 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당분간은 아시카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모종의 합의를 이루고 나일은 처음 왔던 대로 조용히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그 소리 없는 움직임에 아시카는 가만히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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