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25화 (25/153)

#25.

아시카는 입술 안쪽 살을 깨물었다. 그 난리통 속에서 이그레인의 마차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이미 정보를 알고 있는데 도망자를 모조리 데려갈 필요는 없지 않나요?”

“이그레인의 마차를 골라 탄 놈이야. 도망친 다른 사람들과 같은 부류일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아시카의 얼굴이 긴장되었다. 나일은 자신이 필요하게 될 거라고 했고, 드루쉬아는 명확히 그 점을 꼬집고 있었다.

“데려가서 뭘 어쩌시게요?”

“당연히….”

드루쉬아가 말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놈을 보호하려는 건가?”

저도 모르게 아시카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보호라니. 난생처음 본 사람에게 그런 호의는 가당치 않다. 하지만 그녀가 구명줄인 양 매달리던 사람을 죄인 다루듯 드루쉬아에게 넘기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기보다는….”

“보다는?”

어쩐지 드루쉬아와의 거리가 아까보다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습기를 머금은 나무 향처럼 묵직하고도 깊은 체취가 코끝에 훅 끼쳤다.

선명하게 그려지던 머릿속이 모조리 헝클어졌다. 낯설다고 느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그리운 향기가 아시카의 생각까지 집어삼키고 말았다.

“…그게….”

정처 없이 흔들리던 눈동자가 천막 안쪽 어딘가에서 딱 멈췄다. 부스럭부스럭 소리 내던 그것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쳐들었다. 짙은 갈색에 긴 몸체를 지닌, 전시회장에서 도망친 거대한 도마뱀이었다.

“…악!”

아시카의 비명과 동시에 놀란 짐승도 튀어 올랐다. 사람 몸통 크기에 길쭉한 그것이 요동치자 긴 꼬리가 아시카의 다리를 후려쳤다.

“레이디 이그레인!”

드루쉬아가 잡아주려고 했지만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얻어맞은 다리가 휘청이며 아시카는 떠밀리듯 뒤로 넘어갔다.

허공에서 휘적거리던 두 팔이 본능적으로 무엇이든 잡아챘다. 부욱,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아시카의 손에 움켜쥔 뭔가가 뜯겨 나오고 시커먼 그림자가 그녀의 몸을 덮었다.

등이든 머리든 부딪힐 거라고 생각했다. 털퍽, 하는 충돌음이 들리고 아시카의 몸이 바닥에 안착했다.

“윽.”

그러나 예상했던 통증보다 몸을 짓누르는 무게의 압박감이 더욱 컸다. 본능적으로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자 그녀의 가슴 위에 엎어진 화사한 금발이 보였다.

“하아, 이 무슨….”

뜨거운 숨결이 풍만한 가슴 위로 고스란히 쏟아진다. 드루쉬아는 얼굴에 닿는 보드랍고 말캉한 감각을 깨닫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살짝 고개를 들었을 때 그를 바라보는 새까만 눈동자가 거기 있었다.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완전히 얼어붙은 채.

아주 잠시 두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건….”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머리와 등을 감싸고 있던 손을 슬며시 빼냈다.

“오해하지는 않겠지?”

혹시 아시카가 비명을 지를까 봐 드루쉬아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겹쳐진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는 대신 아시카의 시선은 그의 가슴팍으로 옮겨갔다. 드루쉬아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자신의 가슴 쪽을 내려다보았다. 탄탄하게 근육 잡힌 맨살이 고스란히 드러난 그곳을.

맨살 가운데 도드라진 가슴 끝이 외설적으로 보일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가슴을 가려줘야 할 천은 찢어진 러플 장식과 함께 아시카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드루쉬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화를 내야 할지 몸부터 가려야 할지 혼란스러운 순간. 입을 열지 못한 것은 아시카의 묘한 시선 때문이었다.

아시카의 손이 느릿하게 그의 가슴 위로 향했다.

섬세한 가슴근육이 도드라진 위로 흉터처럼 길게 늘어진 붉은 자국. 땀에 젖어 끈적한 느낌이 나는 피부가 손끝에 달라붙는다.

‘진짜로 있었어.’

꿈에서 본 그대로. 어깨에서 시작해 가슴을 타고 내려가는 긴 흔적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고 있다. 본적은 없지만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을 따라 아시카의 손끝이 그의 맨살을 더듬었다. 늑골 아래를 지나 아랫배의 중심부 근처에서 허벅지 깊숙한 안쪽까지 이어지는 흔적을. 그러나 허리 벨트에 막혀 더 아래로 이어지지 못했다.

커다란 손이 느리게 다가와 작고 하얀 손을 잡았다.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그러나 명백한 의도를 갖고.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손을 잡아 머리 옆에 놓으며 꾹 눌렀다. 반쯤 일으켰던 몸이 다시 아래로 기울면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짙푸른 눈동자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고 입술 언저리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몸에 닿는 체온도 뜨겁고 뒤엉켜있는 하체도 뜨거웠다.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닿는 단단한 살덩이는 더욱 뜨거웠다. 데일 것처럼 뜨거운 그것이 체중에 짓눌려 꿈틀거렸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열기가 뒤엉켜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서로를 옭아매는 어떤 것이. 그저 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회오리치는 강렬한 감각이 느껴졌다.

드루쉬아의 입술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입술을 비껴갔다. 촉촉이 젖은 입술을 단숨에 삼켜버리고 싶지만 실낱같은 이성이 그를 붙들었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얼굴 옆으로 고개를 떨궜다.

“후우….”

아시카는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이건 그냥….”

아직도 허벅지 사이에 닿아 있는 단단한 그것의 감각이 아찔하다. 그 느낌이 낯설면서도 이 남자가 낯설지 않아서 기이한 기분이었다.

“…사고예요.”

“그렇지. 아마도….”

“아마도.”

드루쉬아는 긴 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다. 강력히 끌려가는 본능을 거부하며, 제 품에 있는 여자를 놓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필사적으로 밀어내면서.

드루쉬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아시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혹시 거절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녀는 퍽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켰다.

“아, 미안해요.”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위였다. 바로 시선 높이에서 남자의 맨살이 아른거렸다.

“이런, 젠장.”

드루쉬아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옷이 찢어져 휑해진 가슴 한쪽. 가리자니 웃기고 놔두자니 민망하다.

아시카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제 손에 있는 찢어진 천 조각을 내밀었다. 드루쉬아 역시 붉어진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이걸로 나더러 어쩌라고?”

“그게… 밖에 나가서 사람을 불러올까요?”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은밀한 공간에서 옷이 찢어진 채로 나타나다, 뭐 이런 추문을 원하는 건가?”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럼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는 것 같으니까, 저는 이만….”

아시카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천막 입구로 움직였다. 그러나 드루쉬아가 앞을 가로막는 것이 더 빨랐다.

“혼자 도망치면 나는 어쩌라고?”

가슴의 절반을 훤히 드러내놓은 채 남자가 으르렁댄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서 아시카의 얼굴이 요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저더러 어쩌라고요? 사람을 불러올 수도 없고, 제가 공작님을 옷 속에 숨겨서 데리고 나갈 수도 없잖아요. 누구에게 들키기 전에 둘 중 하나라도 나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말은 잘하는군. 이제 알겠어. 레이디 이그레인의 주특기가 일단 저지르고 도망가는 건가?”

“저지르고 도망이라뇨, 제가 뭘 어쨌….”

문득 황궁에서의 일을 떠올리고 아시카는 입을 닫았다.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억울한 마음에 그녀를 잡기는 했지만 드루쉬아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납게 얼굴을 구기던 드루쉬아가 문득 눈을 반짝였다.

예의고 뭐고 집어치우기로 했는지, 성큼 아시카에게 다가가 어깨에 걸쳐진 케이프를 잡아당겼다.

“이거면 되겠군.”

“뭐, 뭐예요?”

“당신 드레스는 멀쩡하잖아. 이건 나에게 양보해.”

“여성용 케이프를 두르고 나가겠다고요?”

“그럼 맨살을 드러내고 나갈까?”

말을 하는 드루쉬아도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아시카의 입꼬리가 실룩거리다가 파르르 떨리는 걸 보면서 그의 얼굴은 더욱 구겨졌다.

“웃지 마.”

아시카는 슬그머니 한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것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끕….”

“웃지 말라고 했어.”

험상궂은 얼굴로 으르렁댔지만 소용없었다. 아시카는 차마 드루쉬아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후, 하면서 간신히 화를 누르는 한숨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정말 이건….”

“아가씨, 안에 계십니까?”

내내 발갛던 아시카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리브?”

“네, 한참을 안 보이셔서 찾았습니다. 안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니, 잠깐만.”

하얗게 질린 아시카가 드루쉬아의 팔을 덥석 잡았다. 놀란 드루쉬아가 입을 뻐끔거렸지만 차마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거부할 틈도 주지 않고 아시카는 그를 더 안쪽으로 끌고 갔다.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한 구석, 상자가 높이 쌓여있는 뒤로 드루쉬아가 처음 숨어있던 공간이 보였다. 아시카는 떠밀다시피 그를 안으로 욱여넣었다.

황당한 나머지 드루쉬아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쉿. 입 다물어요.”

드루쉬아의 항의는 깨끗이 무시당했다.

그를 구석에 처박아두고 아시카는 황급히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순간 드루쉬아는 손을 뻗어 케이프를 확 낚아챘다. 놀라 뒤돌아보는 아시카에게 인상을 벅 쓰고 말았다.

아아, 하고 케이프를 벗어주면서 그녀의 입꼬리가 다시 바르르 떨렸다. 드루쉬아의 입에서 절로 욕설이 치밀었다. 아시카는 허물을 벗듯 케이프만 벗어준 뒤 총총 눈앞에서 사라졌다.

애당초 몰래 숨어든 것은 드루쉬아였지만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군.’

드루쉬아는 진땀이 배어나는 얼굴을 쓸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사위가 어둠에 잠기고 부산스럽던 사용인들의 기척도 잦아들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 방안의 촛불은 진작 꺼두었지만 아시카는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였다.

“진짜로 있었어.”

일명 파병 인장이라고 불리는 흔적. 그것은 파병군들이 위험지역에서 부상을 입었을 때 생기는 흉터 같은 거라고 들었다.

그의 맨살을 본 순간부터 입술이 닿기 직전까지 온몸이 겹쳐있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말 미쳤나 봐.”

아시카는 제 손에 얼굴을 묻으며 앓듯이 중얼거렸다.

약혼하기 전까지 드루쉬아를 흠모하는 레이디가 많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워낙 곁을 주지 않는 성품이라 어지간한 여자들은 말을 붙여보지도 못했다.

“성격이 좀 까칠해야 말이지.”

아무리 잘 생기고 매력적이면 뭐하나. 성격이 나쁜걸. 약혼녀나 되니까 참아주는 걸 테지.

그래, 약혼녀가 있는 남자였다.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마치 그녀가 유혹한 것처럼 보였을 터다. 만약 드루쉬아가 절제하지 못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하, 이게 문제가 아니지.”

당장 급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낮에 드루쉬아가 했던 이야기는 쉽게 흘려 버릴 일이 아니었다.

‘조부님께 말씀을 드려야 하나.’

단순한 화재라고 생각했던 사건에 탈리온이 개입했고 그 뒤에는 대공령의 문제가 얽혀있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지워버렸다.

‘아직은 아니야.’

대공령 문제에서 웨이브는 손을 뗀 지 오래였다. 확실하지 않은 문제를 들고 가 봤자 무능하다는 질책만 돌아올 터였다.

‘어디서 정보를 얻어야 할까.’

문득 이 화재를 미리 알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를 찾아와! 세인트리드 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아트샵이야. 꼭 찾아와야 해!”

‘세인트리드 거리라고 했어.’

분명히 뭔가 알고 있는 여자였다.

‘일단 그 여자부터 만나자. 그 뒤에 탈리온 공작과도 다시 이야기해야 해.’

이대로 넘어갈 문제는 아니었다. 드루쉬아와 만나서 그가 알고 있는 정보를 확인해야 한다.

그렇게 온갖 상념으로 뒤척이기를 얼마간, 설핏 잠이 들었던 것도 같다. 얼굴 위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느끼는 순간, 남자의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흡!”

“나일입니다, 소공작님. 놀라지 마세요.”

어둠 한가운데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속삭였다. 분명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였지만 놀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비명, 안 지르실 거죠?”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나일은 사정하듯 말을 덧붙였다.

“제발요, 소공작님.”

까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아시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일은 손을 떼고 물러나더니 가까이 있는 촛대를 찾아 불을 붙였다. 빛이라고는 창밖에서 스며드는 달빛밖에 없는데도 용케 방안의 물건을 찾아냈다.

충격이 가시고 방 안이 밝아지자 나일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어떻게….”

아시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일을 가둬둔 곳은 3층이었다. 거기다 밖에 지키는 사람들도 있었고. 거기서 도망쳤다는 걸까. 그럼 여기는 왜 찾아온 걸까.

아시카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줄을 이었다.

“도망갈 생각도 없고 소공작님을 해칠 의도는 더더욱 없어요. 처음 말했던 대로 저는 도움이 필요한 것뿐이에요.”

뒤늦게 아시카는 그가 제 침실에 숨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 저택 경비가 이렇게 허술했어?’

등골이 오싹해지는 깨달음이었다.

“아아, 소공작님. 겁먹지 마세요. 제가 특별한 거지 저택 경비에는 아무 문제없어요.”

오밤중에 침실까지 쳐들어온 남자는 시종일관 미안한 얼굴이었다. 재차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이 거짓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시카는 서늘한 시선으로 나일을 바라보다가 뒤쪽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숄 좀 가져다줘.”

“숄이요? 아, 네.”

아시카는 그 와중에도 얇은 침의를 이불로 가리기 위해 애쓰던 중이었다. 대화를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옷차림이었다.

나일이 숄을 찾아 건네자 아시카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기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용병처럼 보이지도 않고.’

은밀한 일을 수행하는 자객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 남자의 얼굴 어디에서도 그런 위험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저랑 얘기할 마음이 나세요?”

“그거야말로 내가 묻고 싶은 말이네. 어떻게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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