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끊임없이 제 꿈속에서 나오던 남자가 꿈속과 달리 단정한 모습으로 눈앞에 있었다. 천막 내부의 은은한 빛에 더욱 부드럽게 보이는 금발과 조금은 어둑하게 느껴지는 푸른 눈동자.
아시카는 순간 자신이 다른 꿈속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지난번에 눈을 뜬 채로 이상한 체험을 했던 것처럼.
“…르쉬아….”
속삭이듯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드루쉬아의 미간이 좁아지며 묘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그 애칭에 익숙해져야 하는 건가?”
“아….”
세상에나, 이건 현실이다!
아시카는 제가 한 말을 다시 제 입속으로 욱여넣고 싶어졌다.
“이게 무슨…. 탈리온 공작님께서 왜 여기 계신 거죠?”
아시카의 급격한 태도 변화에 드루쉬아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처음에는 놀라움, 그다음에는 반가움과 뭔지 모를 격한 감정, 그리고 당혹감. 어떤 반응을 기대했는지 자신도 모르면서 아시카의 반응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지막 봤을 때 벌어졌던 일 때문일까. 아시카가 당황에 있는 사이 드루쉬아의 시선이 빠르게 그녀를 훑어 내렸다.
내내 궁금했던 터였다. 한 번쯤 볼일이 있지 않을까 했지만, 사교계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터라 두 사람이 밖에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상냥하게 괜찮냐고 물어볼 사이도 아니었고.
‘충격이 컸을 텐데. 괜찮아진 모양이군.’
멀쩡하다 뿐인가. 천막 내부의 은은한 빛 탓인지 아시카에게서 오묘한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매끄럽고 하얀 피부와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의 극명한 대조. 머리칼을 완전히 틀어 올려서 하얗고 가느다란 목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대충 걸치고 있는 케이프 아래 얇은 드레스가 상체에 딱 달라붙어 가슴선이 유독 도드라진다. 길게 늘어진 목걸이 줄을 따라 그의 시선도 절로 그녀의 가슴골로 흘렀다.
후끈하게 열 오르는 것이 천막 안의 열기 탓인지 제 속이 타기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드루쉬아는 답답하게 조여진 목을 풀며 한층 낮아진 목소리를 내었다.
“탈리온과 이그레인은 공식적으로 협력 관계가 아니었나? 그런데 공식적인 관계까지 마음대로 묵살해도 되?”
이렇게 멀쩡했으면서 그간 얼굴 한 번 볼일이 없었다니. 왠지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아, 서신.”
“기억은 하고 있군. 한 번도 아니고 무려 세 번이나 보냈지.”
“답은 이미 받지 않으셨나요?”
아시카는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은 그저 긴장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심신이 피로해서 요양 중이라며? 이런 괴상한 짐승들 틈에서 어디 요양이 되겠어?”
빈정거리는 어조가 노골적이다. 짙어진 눈빛만 봐도 그가 얼마나 기분이 상해있는지 알만했다.
한 번도 아니고 무려 세 번이었다. 세 번째 거절 회신을 받아 든 순간 드루쉬아는 집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그다음은 순식간이었다. 이미 파악하고 있던 아시카의 동선에 사람을 보내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기를 두어 시간.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화가 치밀던 참이었다.
드루쉬아는 불쾌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이렇게까지 나를 피할 이유가 있나?”
“제 발 저리다뇨? 만날 이유가 없어서 거절한 게 아닌가요. 공작님께서 이유를 명시하지 않았으니 제 탓을 하시면 안 되죠.”
“이유? 아, 그렇지. 서신에 이유를 말했다면 곤란해지는 건 내가 아니었을 텐데. 사정 봐주지 말 걸 그랬어.”
“사정을 봐주다뇨? 무슨 말이죠?”
드루쉬아는 땀이 배어나는 얼굴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얇은 상의 소매를 걷어 올린 탓에 툭 불거진 근육질의 팔이 고스란히 보였다.
짜증스러워하는 얼굴조차 잘생겨서 아시카의 심장이 또다시 콩닥콩닥 뛰었다. 뺨에 열이 오르는 것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티가 날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더운 거야.’
더운 건 드루쉬아도 마찬가지였는지 셔츠가 몸에 달라붙는 것이 보였다. 목 아래는 길게 늘어진 러플 장식으로 가려져 있지만 가슴 부근에 얼핏 피부색이 비쳤다.
아시카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그의 가슴 언저리로 향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옷을 벗으면 정말로 있을까?’
단언컨대 아시카는 이 남자의 벗은 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저 옷을 벗기면 어깨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붉은 자국이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로 있다면? 본 적도 없는 흔적을 내가 알고 있다면?’
그녀의 시선 끝에서 건장한 남자의 체구가 움찔했다. 몸서리를 치는 것처럼 보이는 작은 움직임이었다.
“…레이디 이그레인.”
평소 차게 느껴지던 까만 눈동자에서 안광 비슷한 것이 스쳐 지나간다. 드루쉬아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네. 말씀하세요, 공작님.”
뭔가에 몰두해 있는 것처럼 아시카의 대답이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드루쉬아는 드물게 당황했다. 여자에게 이렇게 노골적인 시선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색기 하나 없는 시선에 옷이 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후…. 레이디 이그레인, 구빈원에서 불이 났을 때 현장에 있었다면서?”
“구빈원이요?”
“기사들이 거기서 레이디 이그레인을 봤다고 하더군.”
“공작님도 거기 계셨어요? 왜요?”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로 제 추측이 맞았던 걸까.
“혹시 란탈의 지소에 가셨어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그날 탈리온의 기사들이 구빈원 근처에서 뛰어다니는 걸 봤거든요. 혹시나 했죠.”
그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아시카가 환상 속에서 봤던 드루쉬아처럼 현실에서도 란탈의 지소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서 불과 몇 걸음만 더 가면 되는 그곳에서.
아시카가 또다시 생각에 빠져드는 걸 보고 드루쉬아는 기가 막혔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그날 이그레인의 마차에 수상한 사람이 올라타는 걸 본 목격자가 있어.”
잠시 멍해 있던 아시카의 표정이 빠른 속도로 경직되었다. 잠시나마 말랑했던 태도가 사라지고 얼굴에는 가면 같은 냉랭한 표정이 덧씌워졌다. 공식 석상에서 보여주던 아시카의 얼굴이었다.
그 변화가 너무 급격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런가요?”
“내 말 못 들었나? 방화범을 쫓던 현장에서 이그레인의 마차가 누군가를 태워 가는 걸 봤다고.”
“그게 세 번씩이나 서신을 보낸 이유인가요?”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이 필요해.”
“왜요? 언제부터 우리가 사이좋게 손잡고 서로 도움을 줬다고?”
조곤조곤 말하고 있지만 거부 의사가 명백했다. 이제 드루쉬아의 머릿속도 차게 식었다.
“그날 화재로 죽은 사람이 열 명이 넘어. 그런데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현장에서 도망쳤지.”
아시카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드루쉬아의 이야기를 들었다. 단단히 다물어진 입술은 좀처럼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협의 때마다 신경전을 벌였지만 적당한 시점에서 한발 물러나 주는 여자였다. 그래서 더 아득바득 괴롭혔던 것도 있었다. 은근히 드러내는 여유가 못마땅해서.
그러나 지금은 평소 협의 때처럼 물러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상대가 정보를 드러내기 전까진 자신의 정보를 내주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에게 성큼 다가가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레이디 이그레인, 나를 상대로 머리 굴리지 마.”
검은 눈동자가 일순 동요했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당신은 나를 상대하려면 아직 멀었어. 감추려는 게 뭐지?”
“원하는 게 있으면 빙빙 돌리지 말고 먼저 말해요. 저는 아쉬울 게 없으니 윽박질러도 소용없답니다. 세 번씩이나 서신을 보낼 만큼 급한 것은 탈리온이 아니었나요?”
“많이 발전했네, 이그레인 소공작.”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4년 전 처음 협의 테이블에서 마주쳤을 때 만해도 적잖게 그에게 끌려다녔던 걸 기억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시카는 갓 성년이 된 열여덟 살의 레이디였고 드루쉬아는 사지나 다름없는 파병지역에서 귀환한 현직 공작이었다.
물러나지 않는 여자를 보면서 드루쉬아는 더 거리를 좁혔다. 불과 한 걸음 앞까지 다가가 여유롭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된 게 겁도 안 먹어.”
아시카보다 머리 하나 이상은 더 큰 데다 떡 벌어진 어깨와 큼직한 골격, 기사로서 다져진 탄탄한 몸은 여자들에게 위협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아시카의 눈동자에는 그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생각해보면 퍽 이상한 일이었다.
여전히 시선 한번 돌리지 않는 까만 눈동자에 긴장하는 것은 오히려 드루쉬아였다. 그 뻐근한 긴장감에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좋아. 이게 탈리온만의 문제는 아니니까.”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아시카는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그날 우리 쪽 기사들이 현장에서 도망친 사람 중 하나를 잡았거든. 원래대로면 치안대에 넘길 생각이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드루쉬아는 여전히 한발 앞의 거리에서 말을 이었다.
“대공령에서 왔다고 주장하더군.”
아시카의 냉정이 깨졌다. 나일은 치료를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더 있다고 했었다. 설마 그들도 같은 곳에서 온 걸까.
“구빈원에서 치료받던 사람이 아니었나요?”
“맞아. 치료소에 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야. 그중 상당수가 대공령에서 왔다고 하더군.”
“이동 허가를 받은 사람들인가요?”
아닐 거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더기로 도망친 걸 봐. 허가 없이 대공령을 벗어난 사람들이란 말이지.”
도망치던 사람은 저를 잡은 상대가 탈리온의 기사라는 걸 알고 매달렸다. 치안대에는 보내지 말아 달라고.
“다른 사람들이 더 잡혀서 이 사실이 드러나면….”
“대공령 관리에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
드루쉬아는 골치가 아픈 듯 눈살을 찡그렸다.
오랜 세월 봉쇄되어 있었으니 암암리에 도망치거나 왕래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문제는 적지 않은 수가 수도 한복판에 몰려왔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협조해줬으면 해. 이그레인의 마차에 탄 그놈, 내게 넘겼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