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23화 (23/153)

#23.

마릴린과 하녀들은 아시카의 머리를 만지느라 바쁘게 손을 놀렸다.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도록 꼼꼼하게 걷어 올리고 단단하게 틀어서 정리했다.

하녀들에게 머리를 맡긴 채, 아시카는 제 손에 들어온 서신을 보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 이게 세 번째지?”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쥴마는 하녀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두어 걸음 뒤에서 물었다.

가문에 대한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탈리온가의 공작이었다. 그런 남자가 싫다는 데도 세 번째로 만남을 청해온 것이다.

“어떻게 하긴, 내가 탈리온 공작을 만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러면서 아시카는 서신을 조심스럽게 접어서 챙겼다.

그 모습을 보는 쥴마의 시선이 묘해졌다. 저 서신을 가져다 뭐에 쓰려는 걸까. 그런 의문이 어린 표정이었다.

아시카는 자신의 행동을 인지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진짜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 아니면 지난번에 도와준 데 대한 감사 인사라도 받고 싶은 건가.’

협의장에서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피차 다시 꺼내기에는 껄끄러운 이야기였다. 그래서 모른 척해준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불안한데.’

이렇게까지 나온 적은 처음이라 거절하면서도 슬금슬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지난번에 구해놓으라고 한 것 말입니다.”

“그게 왜?”

쥴마는 하녀들을 의식해서 말을 아꼈다.

“심부름꾼이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답니다. 너무 비싸서 값을 치를 수 없었답니다.”

“넉넉하게 들려서 보내라고 하지 않았어?”

“네, 그랬는데도 부족했답니다.”

“아니 그게 얼마나 한다고….”

문득 아시카는 약만 구해주면 뭐든지 하겠다던 나일의 말이 떠올랐다. 구빈원이 무료로 고급 치료를 해준다는 말에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도.

‘그 정도로 고가의 약재가 사용되는 병을 구빈원에서 치료했다고?’

과연 나일이 알고 있는 정보가 뭘까. 이쯤 되면 단순히 수상한 차원을 넘어선다.

‘일단 살려놓고 따져 물어야겠네.’

제 목숨줄을 내놓은 셈이니 섣불리 도망가지는 않을 테고.

“필요한 만큼 지원하도록 해. 관리인에게 거기 청소도 좀 하라고 일러두고.”

나일이 엉망이 된 스스로의 몰골에 불쾌감을 드러냈던 것이 떠올랐다.

‘별게 다 신경 쓰이네.’

시작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쩐지 길 잃은 짐승을 주워 돌보는 기분이었다.

“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쥴마는 가볍게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간만의 외출인데 아시카는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연이어 벌어지는 기묘하고도 수상한 사건들. 어느 것 하나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기에 더욱 그러했다.

* * *

이스나 남작 부인의 저택 앞이 어수선했다. 정문이 활짝 열린 채 인부들이 안팎을 오가고 담장 밖에서도 몰려든 사람들이 안을 기웃거렸다.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이렇게 정신없는 줄 알았으면 호위 인원을 더 데려올 걸 그랬습니다.”

잔느 대신 아시카를 따라온 리브론이 걱정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작 부인이 가끔 특별한 행사를 하거든. 그게 꽤 흥미로워서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도 궁금해하지. 자체 경비 인원은 충분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시카는 새삼스럽지 않은 듯 여유롭게 정원에 발을 들였다.

정원 한복판에는 원래 설치되어 있던 장식품들이 모두 사라지고 짐승 우리가 반을 차지했다. 크기도 제각각, 들어있는 짐승도 제각각인 우리가 족히 수십 개는 되어 보였다.

눈이 현란할 정도로 화려한 새들이나 인형처럼 작고 귀엽게 생긴 네발짐승, 도마뱀처럼 긴 몸체로 기어 다니는데 털이 보송한 짐승 등. 아까부터 요란하게 들리던 온갖 소음은 짐승들이 내는 소리였다.

“보다시피 오늘 주제가 희귀동물 전시와 경매거든.”

“이스나 남작 부인은 정말 괴짜군요.”

아시카의 말에 리브론은 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귀족가의 저택 한복판에 산짐승을 떼로 가져다 두고 경매를 벌이는 사람은 제국 내에서 이스나 남작 부인 외엔 없을 터였다.

“부인보다는 이스나 남작이 별종이지. 저걸 수입해 온 게 남작 아니겠어?”

“아가씨께서 이런 걸 좋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걸 보여주는 남작 부인을 좋아하는 거지. 리브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에 리브론을 대기시키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짐승 우리가 늘어선 반대편 공간에는 가제보와 휴식을 위한 테이블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어머, 레이디 이그레인. 어서 오세요.”

바쁘게 행사장을 오가던 남작 부인이 아시카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다가왔다.

“오늘은 정말 대단한 걸 보여주시네요, 부인.”

아시카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제 남편이 최근에는 희귀동물 수집에 빠져서요. 종류는 제각각이지만 모두 온순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남작 부인은 살갑게 웃으며 아시카에게 손짓했다.

“레이디 이그레인도 이쪽으로 와보세요. 여기 정말 귀여운 녀석이 있답니다.”

귀부인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 한가운데 새장 크기의 우리가 있었다. 참석자들은 움찔움찔 놀라면서도 새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머, 이것 봐. 얼굴이 꼭 웃는 것 같아.”

“목소리가 예쁘네.”

“이게 도대체 뭐죠? 원숭이?”

손바닥 두 개를 합쳐놓은 크기의 원숭이였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보송보송한 하얀 털이 뒤덮여 있어 품에 안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이제 갓 성년이 됐을 법한 레이디가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온순한 것 같은데 한번 꺼내 보면 안 될까요?”

“레이디,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아요. 이놈이 보기보다 영리하다고 들었거든요. 경매를 진행할 예정이니까 참석하시면 더 좋고요.”

남작 부인의 설명에 상대는 아쉬운 얼굴이 되었다.

“고양이 키우는 것도 허락받지 못했는걸요.”

애완동물을 키우는 귀족들이 많다지만 반대로 질색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 오늘 눈요기라도 충분히 하고 가세요, 레이디.”

호호 웃으며 남작 부인은 토라진 레이디를 달랬다.

아시카가 적당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자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차와 다과를 가져왔다. 북적북적하는 정원을 보고 있자니 잡다한 생각이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남작 부인은 오가는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경매가 시작하기 전까지 전시물을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다.

“오길 잘했네.”

파혼이라는 홍역을 치르면서 저도 모르게 지쳐 있었나 보다. 사람들 속에 있는데도 주목받지 않는 것이 마음이 놓였다. 전시장을 오가는 이들을 보며 아시카는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찻잔을 채 반도 비우기 전에 옆 테이블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어머, 어머!”

“어떻게 해.”

아시카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하얀 덩어리가 눈앞으로 불쑥 날아들었다.

“헉!”

“꺄아아악!”

비명은 바로 옆에 있던 귀부인의 목소리였다.

아시카는 얼굴에 사뿐히 달라붙는 촉감을 느끼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기처럼 보드라운 원숭이의 네 발이 그녀의 얼굴을 찍고 머리칼을 쥐더니 폴짝 뛰어 정원 한복판으로 달아났다.

“레이디 이그레인!”

아시카가 들고 있던 찻잔은 진작에 나동그라졌고 옷은 엉망이 되었다. 그나마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이 그녀가 품위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소란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저놈, 저거 누가 잡아요!”

“다른 우리가 열렸어!”

“경비, 그물 가져와!”

손바닥 두 개만 한 작은 원숭이가 몇몇 우리의 잠금 고리를 들어 올린 것이다. 새 몇 마리가 날아간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도마뱀처럼 생긴 길쭉한 짐승이 기어 나오자 정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레이디 이그레인. 괜찮으신가요?”

아시카는 까만 눈동자를 깜박이다 더 이상의 위협이 없다는 걸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괜찮…. 네. 괜찮아요.”

간신히 대답했지만 놀라 숨을 할딱이느라 어깨가 오르내렸다.

“앉은 채로 기절하신 줄 알았어요.”

당황한 귀부인 몇 명이 아시카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시중들던 하녀도 다가와 그녀의 옷을 살폈다.

“이걸 어쩌죠? 옷을 다 버렸어요.”

하필 오늘 입고 나온 드레스가 연한 하늘빛이었다. 진한 갈색의 찻물이 가슴 위로 흉하게 번져버렸다.

“간단하게라도 얼룩을 지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녀는 아시카의 손에 손수건을 건네며 안내를 자청했다. 아시카는 잠시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친 짐승들을 잡느라 경비들이 쫓아오고 정원은 한바탕 난리를 치르는 중이었다.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어디로 가면 되지?”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오늘 행사를 위해 정원의 배치가 바뀌었다. 가까이에는 참석자들을 위한 가제보가 여러 개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시카는 하녀의 안내에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보통의 에티켓룸과 다르게 온갖 잡동사니가 천장 높이까지 쌓여있는 곳이었다. 아마도 행사 진행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보였다.

‘무슨 창고 같은데.’

아시카의 얼굴에 의문이 어리자 하녀가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소란스러운 행사장보다는 이쪽이 나을 것 같아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하녀는 그렇게 말하고 천막을 나갔다. 밖으로 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얇은 케이프를 들고 돌아왔다.

“겉옷을 벗어주시면 얼룩을 지워서 가져올게요. 그동안 이걸 걸치고 계시고요.”

말간 갈색 눈동자를 지닌 하녀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앳된 얼굴의 소녀였다. 머뭇거리기를 잠시, 아시카는 하녀에게 손짓했다.

“위에만 좀 도와줄래?”

드레스 위에 덧입은 건 끝단을 은은한 레이스로 장식한 칸주였다. 허리길이의 장식 겉옷을 벗기는데 하녀의 손놀림이 부자연스러웠다.

“죄송해요. 제가 이런 옷을 다루는 데는 서툴러서요.”

손에 굳은살이 잔뜩 박여있는 것이 아무래도 시중드는 하녀는 아닌 모양이었다.

‘남작 부인이 오늘은 정신이 없나 보네. 이렇게 준비가 소홀한 사람이 아닌데.’

저택까지 거리가 멀어서 천막으로 데려온 것 같지만 뭔가 엉성한 느낌이었다. 다소 의아해하면서도 오늘 행사가 워낙 독특하다 보니 흘려 넘겼다.

“서둘러줬으면 좋겠구나.”

“네, 알겠습니다. 번개처럼 다녀올게요.”

하녀는 천막 안을 둘러보더니 둥근 의자를 찾아 아시카에게 내밀었다.

“그동안 쉬고 계세요!”

생긋 미소를 남기고 하녀가 밖으로 달려나갔다. 나가면서 천막 입구를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천막 내부는 환하지만 다소 답답했다. 나무 그늘에 있는데도 한낮의 열기 탓에 공기가 후덥지근하다.

아시카는 하녀가 꺼내준 의자에 살포시 엉덩이를 걸쳤다. 둥근 나무의자가 딱딱하고 불편해서 몇 번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한숨이 폭 나온다.

“그냥 돌아갈 걸 그랬나.”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간만의 외출인데 이렇게 맥없이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애완동물이나 키워볼까? 귀여웠는데.”

제 얼굴을 밟고 지나간 발칙한 짐승인데도 무럭무럭 호감이 자랐다. 생각만으로도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오른다.

“품에 안으면 쏙 들어올 것도 같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흠칫 놀라 허리에 힘을 주었다.

“안 되지, 안 돼.”

애정 어린 대상을 가까이 두면 저도 모르게 감정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의도치 않게 속내를 보일 수도 있고. 아쉽지만 그런 사소한 일로 빈틈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허리에 힘을 주고 꼿꼿하게 앉아있는 것이 기분이 묘했다. 멀리 행사장의 소음과 분리된 채 온전히 혼자만 있는 공간. 사방이 차단되어서 그녀를 지켜보는 시선도 없었다.

슬금슬금 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천막 내부로 시선이 옮겨갔다. 아시카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쌓여있는 물건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둥근 채망과 차곡차곡 접혀있는 커다란 그물, 굵은 밧줄과 용도를 알 수 없는 각종 쇠막대까지.

“아까 그물 찾느라고 난리더니, 잡긴 했을까.”

막일꾼이나 쓰는 허름한 도구는 분명 처음 보는 물건인데도 낯설지가 않았다. 그것이 퍽 이상했다.

“낫이 왜 이런 곳에 있어? 정원사가 쓰는 도구인가?”

“낫이 뭐에 쓰는 물건인지도 아나 보군.”

“악…!”

아시카는 비명이 나오는 자신의 입을 반사적으로 틀어막았다. 뒤를 돌아보는 동시에 상대가 누군지 알아봤기 때문이다.

“후, 천막 안이 이렇게 더울 줄이야. 사람 골탕 먹이는데 일가견이 있어, 레이디 이그레인.”

아시카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두 눈은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휘둥그렇게 뜬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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