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저택이라기보다는 작은 주택에 가까운 건물이었다. 멀끔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서 내부에는 먼지가 소복했다.
사용하지 않는 별장이다 보니 사용인조차 거주하지 않았다. 사실상 버려진 거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딱히 득도 실도 없는 곳이라 내버려 둔 그런 곳이었다.
수도 내에는 이런 별장이 여럿 있었고 아시카는 종종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고는 했다. 조부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말이다.
복도에 앉아 있던 사내 둘이 아시카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쿠, 아가씨 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두 사내의 덩치가 아시카보다 한참 넘어가는데도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원래대로면 서로 만날 일조차 없는 평민과 소공작의 신분. 상대가 아무리 여린 아가씨라 해도 어려운 상대인 건 분명했다.
“오랜만이야.”
아시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바로 뒤이어 나선 것은 잔느였다.
“부상은 어때?”
“피를 많이 흘리긴 했는데 상처가 깊지 않았나 봐. 의원이 화상만 조심하면 될 거라고 해서 열심히 약 발라 주고 있어.”
잔느의 질문에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대답했다.
어수선해 보이는 두 사람은 과거 잔느의 용병 동료였다. 평민 출신이었던 잔느는 검에 재능은 있었지만 돈이 없었다. 때문에 수업료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었고 그 인연은 공작가에 들어온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기사단에 대해 권한이 없는 아시카는 웨이브의 입김이 닿지 않은 수족이 필요했고, 잔느가 이어준 인연은 그렇게 요긴하게 쓰였다.
아시카는 닫혀있는 방문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식사는 어떻게 하고 있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도 잡아먹을 기세던데요?”
“야리야리하게 보이더니만 검 좀 쓰던 놈인가 봅니다. 몸이 보통이 아닙니다.”
“신분은 확인이 됐어?”
“그게….”
“아가씨 외에는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먹고 자고 치료받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협조를 안 합니다.”
“하.”
제 발로 잡혀 온 정체불명의 남자는 제법 약은 놈이었다. 당장 어쩌지 못한다는 걸 알고 최대한 회복에 집중할 모양이었다.
“내가 얘기해 볼게. 문 열어.”
“내내 온순하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당부하는 말에 아시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이 열리고 탁한 냄새가 훅 끼쳤다. 먼지 냄새와 약 냄새, 채 지우지 못한 매캐한 피비린내까지.
“와, 드디어 소공작님께서 오셨네요. 기왕 방을 주실 거면 깨끗한 곳으로 주지 그러셨어요. 어떻게 청소도 안 한 방에 손님을 밀어 넣어요?”
“이놈이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살려줘도 불만이야?”
잔느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남자는 침대에 누운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아시카와 시선을 맞췄다.
갈아입지 못한 탓에 옷차림은 피와 그을음으로 지저분했고 어깨 길이의 회색 머리칼은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지친 와중에도 청회색 눈동자만큼은 또렷했다.
“넌 은인이 왔는데 자세가 그게 뭐냐?”
“저 환자예요. 직접 의원까지 불러주고선 그새 잊으셨어요?”
잔느의 연이은 타박에 남자는 매끈하게 대꾸했다. 아시카는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당신은 뭐가 이렇게 뻔뻔해?”
“어차피 당장 절 어쩌실 건 아니잖아요. 입은 뚫려 있으니 할 말은 하고 살아야죠. 제 몰골 좀 보세요. 아무리 길바닥에서 굴렀대도 이렇게 지저분하게 살지는 않았거든요?”
남자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해냈다.
“그리고 좀 앉아주시면 안 될까요? 가뜩이나 몸도 성치 않은데 목에 힘주고 쳐다보기 힘들어요.”
“허.”
“뭐, 이런….”
잔느마저 말을 잃었다. 넉살이 좋아도 너무 좋아서 핀잔하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다소 굳어있던 아시카의 표정이 느슨해지는가 싶더니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잔느, 우리가 뭘 잘못 주워온 것 같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써먹지도 못할 쓰레기였나 봐. 처리하는 방법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사람을 처리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사람이나 폐기물이나 처리하는 건 비슷할 겁니다. 밖에 애들 부를까요?”
“불러서 치워. 흔적 안 남게 깨끗이 뒷정리하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아시카는 매정하게 발길을 돌렸다.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잠깐만. 소공작님…, 윽.”
반쯤 일으킨 상체가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부들부들 떠는 남자를 보면서 아시카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하아, 소공작님께선 저와 할 얘기가….”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채 남자는 숨을 헐떡였다.
“제대로 얘기해 볼 생각이 있긴 해?”
“네, 네. 그럼요.”
그녀가 또 저를 팽개쳐버릴까 봐 남자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처음 마차에서 마주쳤을 때 아시카는 그의 상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남자는 그때 알았다. 아시카의 창백한 얼굴은 겁에 질려서가 아니라 피에 흠뻑 젖은 그를 보고 놀랐기 때문이라는 걸.
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마음이 여린 여자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이그레인 소공작이었다.
아시카는 표정 없는 얼굴로 차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꺼낸 말의 무게를 알고 있겠지. 그것 때문에 이유를 묻기보다 조용히 입을 막는 것이 더 간단하다는 것도 알 거야.”
“그건 좀…."
더듬거리면서도 남자는 반박하지 않았다.
“기어오르려고 하지 마. 이 일에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게 당신이라는 착각도 하지 마.”
“…네에.”
조곤조곤 말하는 어조가 차분한데도 그 단호함 때문에 힘이 있었다. 남자는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통증 때문인지 얼굴에 땀이 배어 나왔지만 더는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뭐 이렇게 제멋대로인 사람이 다 있어.’
소공작이라는 신분은 절대 가볍지 않다. 감히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상대를 앞에 두고도 남자의 태도는 처음부터 거리낌이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시카의 시선은 피가 배어 나오는 어깨에 머물렀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환자를 괴롭히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
아시카의 손짓에 잔느가 의자를 가져왔다.
“잔느, 잠깐 자리를 비켜줘.”
“아가씨?”
“저 발목에 있는 사슬, 여기까지는 안 닿잖아.”
남자의 발목에는 길게 늘어진 사슬이 침대 기둥에 연결되어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별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취해진 조치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잔느.”
단호한 목소리에 잔느는 입을 다물었다. 더는 반박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어쩔 수 없이 잔느는 조용히 방에서 물러났다.
단둘만 남은 방에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넉살 좋게 떠들어대던 남자가 입을 다물자 아까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지저분하기는 했지만 뽀얀 피부에 반듯하게 생긴 이목구비가 단정하다.
‘길바닥에서 나뒹굴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저기… 소공작님.”
아시카의 매서운 시선에 다소 긴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 신분부터 밝혀야 하지 않겠어?”
남자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깨끗했던 청회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나일이라고 합니다.”
“성은?”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소공작님께서 저를 못 믿는 만큼, 저도 소공작님을 믿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아직은요.”
차분한 대답에서 가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시카는 선선히 수긍했다. 그보다는 당장 벌어진 일들에 주목했다.
“그날 구빈원 화재 현장에 있었던 거지?”
“…네.”
“정말 불을 지른 게 당신이 아니야?”
“하, 돌았습니까? 살자고 거기까지 온 사람들을…. 방화범은 아직 안 잡힌 겁니까?”
구빈원 이야기가 나오자 나일의 표정이 돌변했다. 생략된 말끝에서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다.
“그 날 구빈원에서 도망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들었어. 이미 몇 명이 잡혀서 치안대로 넘겨진 모양이야. 덕분에 치안대가 애를 먹고 있지.”
“치안대요? 환자들을 왜 치안대로 보냅니까?”
“그 사람들이 환자인지, 환자를 빙자한 방화범인지 모르잖아. 아니, 애당초 환자라면 왜 도망쳤는데? 이번 일은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야. 당신 같은 사람이 왜 거기 있었는지도 의문이고.”
아무리 봐도 나일은 구빈원에 몸을 의탁해야 할 만큼 곤궁해 보이지 않았다.
“저는….”
차분한 어조 속에서도 날 선 기세가 느껴졌다.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란 생각에 나일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치료가 필요해서 거기 있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곳이 제국 내에서 무료로 고급치료를 해주는 유일한 치료소였습니다.”
아시카의 표정에는 알듯 모를 듯 의문이 어렸다.
“무슨 치료?”
“말씀드려도 잘 모르실 겁니다. 희귀한 불치병이라서.”
“수도의 구빈원이 희귀병 치료를 하고 있었다고?”
“네.”
나일은 짤막한 대답으로 말을 아꼈다. 지금은 그가 쥔 사소한 정보조차 아껴야 할 때였다. 사람들이 치안대에 잡혀갔다면 곧 알게 될 일이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희귀병 환자들이 치료지원을 해주겠다는 말에 그곳에 입소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왜 도망간 거야?”
“저는 도망간 게 아니라 방화범을 쫓으려던 겁니다. 구빈원 입소자처럼 위장했지만 분명 무장한 놈들이었어요. 연기를 심하게 마시는 바람에 결국 당하고 말았지만.”
아시카의 의문은 더욱 커졌다. 굳이 위장까지 해가면서 구빈원에 불을 지른 이유가 뭘까.
수도 최고의 구빈원이자 치료시설에서 발생한 화재. 도망친 의문의 사람들과 방화범. 그들을 찾기 위해 거리 곳곳을 들쑤시는 치안대. 이 화재로 팜레드 거리 한복판이 지금까지도 떠들썩했다.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어.’
이 사건이 뭘 의미하는지, 뭐가 이렇게 수상쩍은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대공성에서 왔다고 했지?”
“네, 소공작님.”
나일은 긴장된 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설명해 봐. 수십 년 전에 폐쇄된 대공성에서 왔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기사들이 철저히 봉쇄하고 있는 그곳에서 왔다고 감히 말하는 이유를.”
“그전에.”
나일은 슬그머니 아시카의 눈치를 보았다. 또 무슨 핑계를 댈까 싶어서 아시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제가 약이 필요합니다. 그걸 먼저 구해주시면 안 될까요?”
“나와 말장난을 하겠다는 거야?”
“핑계가 아니라 제게는 목숨이 달린 중요한 문제예요. 치료소가 불타서 당장 약을 구할 방법이 없어졌단 말이죠.”
“그래서 약을 구해줘야 입을 열겠다?”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일단 저도 살고 봐야 하니까요.”
기가 꺾이는가 싶었지만 끝내 나일은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려 들었다.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아시카는 이 기막힌 대화가 어디까지 갈지 궁금했다.
“내가 거절하면 어쩔 건데?”
“어차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죽고, 약을 못 구해도 죽고. 이러나저러나 죽을 처지니까 저는 어쩔 수 없죠.”
“그렇게 약이 급해? 당장 못 먹으면 죽는 병이야?”
“물론 그런 건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빠르게 악화되거든요.”
뻔뻔하게 말하고 있지만 나일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상처 입은 짐승이 구원자를 알아보고 매달리는 느낌이랄까.
아시카의 가슴 밑바닥에서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아무래도 아주 이상한 놈을 주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왕 살린 거 끝까지 책임지고 살려 달라, 그렇게 들리는 데 맞아?”
나일은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카의 입에서 하, 하고 기가 찬 웃음이 나왔다.
만약 나일의 말이 사실이라면 시종일관 뻔뻔했던 태도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몸이라면 겁날 것도 없을 테지.
“약을 구해 주신다면….”
“구해준다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뭐?”
아시카는 나일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미간을 좁혔다. 그깟 약이 뭐 대수라고 저렇게까지 말을 할까 싶었다. 그러나 말을 하는 나일의 표정은 진지했다.
“진심입니다.”
“내가 당신의 뭘 믿고?”
“이제 곧 제가 필요하게 될걸요?”
보면 볼수록 재미난 남자였다. 허옇게 들뜬 얼굴로 제 목숨줄을 쥐고 흥정하면서도 참으로 당당했다.
“난 당신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당장은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소공작님께서 모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도움이 필요해질 거란 사실이죠.”
아시카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속내를 파악하려는 시선도 깔아보는 시선도 아니었다. 그 차분한 침묵이 오히려 나일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당신은 나의 뭘 믿고 이러는 거야?”
나일은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심신이 밑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제 목숨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던 참이었다. 그런데 마차에서 제 상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여자를 봤을 때, 한 가닥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시카가 느끼는 본능이 맞았다. 나일은 저도 모르게 저를 살려줄 상대를 알아보고 매달리고 있었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 저를 좀 살려달라고.
원래 그가 원래 만나려던 상대는 이그레인 소공작이 아니었다. 하지만 급한 가운데 눈에 띄는 마차가 하필 이그레인이었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탈리온 공작에게 갔다면 그는 나일의 쓸모를 계산하고 살릴지 말지를 결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일단 살려놓고 난 다음에 쓸모를 계산할 사람이었다.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 대답도 약을 구해주시면 그때 할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일은 자신의 품속을 뒤적였다. 손바닥 반만 하게 접힌 종이를 꺼내더니 아시카의 앞쪽으로 툭 던졌다. 나일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아시카는 종이를 주워 들었다.
“처방전?”
아시카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정말 놀라우리만치 뻔뻔한 남자였다. 하지만 나일의 목소리는 정중하고도 절박했다.
“부탁드릴게요, 소공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