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21화 (21/153)

#21.

“그건 알 수 없지만, 화재 현장에서 도망친 사람이 여럿이라 그중 하나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구빈원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한 것도, 불이 나자마자 현장에서 사람들이 도망친 것도.

드루쉬아는 미간을 좁히며 턱을 쓸었다.

“구빈원에서 치료받던 사람들이 불이 나자마자 도망쳤어. 그 사람들이 모두 방화범일 리는 없고, 도움이 필요해서 거기 있었을 텐데.”

왜 도망쳤을까.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애당초 누가, 왜 구빈원에 불을 지른 걸까.

“치안대가 다른 구빈원을 수색 중입니다. 도망친 사람들은 곧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근데 왜 하필 이그레인의 마차였을까?”

“네?”

“구빈원에서 치료받던 사람들은 대부분 오갈 데 없는 평민들이잖아? 설령 도망 중인 범죄자라 해도 감히 귀족 마차에 올라탈 생각은 하지 못할 텐데?”

“도망친 놈이 이그레인 공작가와 연결되었을 수도 있죠.”

지금 상황에서 드루쉬아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무슨 일이 또 이렇게 얽히게 되는지, 그것이 기꺼워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하군. 내가 레이디 이그레인을 만날 수밖에 없겠어.”

두 보좌관은 다소 긴장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레이디 이그레인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 내가 만남을 청한다고.”

미하일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탈리온 공작가에서 이그레인 공작가로 보내는 공식 서한이다. 그것도 만남을 요청하는.

차마 말하지는 못했지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미하일의 얼굴에 적나라했다. 고위귀족을 상대로 심문할 것도 아니고 만나봐야 신경전만 벌일 것이 틀림없다. 차라리 보좌관끼리 오가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이미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내내 가라앉아있던 얼굴에 간만에 생기가 돌았다.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예 발 뺄 구석을 만들지 못하게 해야지.”

* * *

오래된 서고는 별채에서도 가장 볕이 잘 드는 공간 대부분을 차지했다. 방대한 종류의 책이 구비 되어 있는 동시에 온갖 문서자료를 쌓아둔 보관실을 겸하는 장소였다.

그중에서 아시카가 찾은 곳은 제국에서 발행된 서적의 반 이상을 보유한 1층 도서관이었다. 벽면의 책장이 높은 천정까지 닿아 있어서 꼭대기의 책을 빼려면 사다리는 필수였다.

아시카는 드레스 자락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사다리에 몸을 기댔다. 서고 담당자가 해야 할 일이지만 혼자 있고 싶다며 진작에 밖으로 쫓아버린 터다.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사다리에 매달려 천장 가까이 있는 책들을 시선으로 훑었다.

‘어머니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어.’

아시카의 모친은 영지도 재산도 없는 한미한 백작가의 고명딸이었다. 웨이브가 직접 아들의 정략혼을 추진했는데 왜 그런 한미한 가문을 택했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수수께끼로 남았다.

‘계보에도 없는 귀족 가문이라니.’

딸을 낳고 얼마 뒤 사망한 모친이 그 가문의 마지막 자손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아시카에게는 외가의 친인척이 하나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길게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해보려 애썼지만 답을 찾는 것은 요원했다.

‘어디다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을 꺼냈다간 정신병자 취급당하기 딱 좋은 이야기였다.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가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면 어떻게 될까.

‘방계에서 득달같이 달려들어 다른 후계자를 들이밀겠지.’

아시카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웨이브도 더는 그녀를 지지해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부님께 중요한 건 가문이니까. 차라리 방계에서 양자를 들일지도 몰라.’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러니 당장은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혼자 힘으로 상황을 추정할 수밖에.

‘아버지 쪽으로 병력 같은 건 없었는데.’

이그레인 공작가는 대대로 별 특징 없이 무탈한 가문이었다. 트리델리아 토박이 출신으로 정치보다는 상재(商才)에 능해 각종 사업과 무역으로 착실하게 부를 축적해왔다.

다른 가문에는 하나쯤 있을 법한 건국 신화와 관련된 신비로운 이야기 같은 것도 없었다. 특징이 없다 못해 단조롭기까지 한 가문이었다.

‘근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초조하게 책 제목을 시선으로 훑던 끝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혼맥의 역사?”

사다리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바깥쪽 책장이다. 아시카는 책을 꺼내기 위해 팔을 뻗었다. 손끝에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좁히기 위해 발끝을 세우는 순간.

“악!”

가느다란 사다리의 발판에서 주륵 미끄러지고 말았다. 중심을 잃은 몸은 그대로 사다리와 부딪히며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높지 않아서 충격이 크지는 않았지만 바닥에 엎어진 모양이 볼썽사나웠다.

“아흑, 아파라.”

아시카는 바닥에 부딪힌 팔꿈치를 쓸며 눈물을 삼켰다.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직접 사다리에 매달려 있는 것도, 그 사다리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구는 것도. 아시카는 변해버린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다.

‘서고 담당자를 진작에 내보내기를 잘했지.’

그렇게 생각하며 상체를 일으키던 참이었다. 차르륵 소리를 내며 목걸이가 쏟아져 나왔다. 한 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아 잊고 있던 목걸이였다.

무의식중에 목걸이를 잡아 옷 속으로 밀어 넣다가 멈칫했다.

“이게 왜 이래?”

마름모 형태의 펜던트에는 청보라빛 보석이 박혀있었다. 정 중앙에 하나와 좌우로 마주 보고 두 개씩 해서 총 다섯 개가. 그러나 처음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언제 깨진 거지?”

마주 보고 있는 작은 보석 중 한 개가 완전히 깨져서 바스러질 것처럼 보였다. 황궁에서 보았던 그 보석처럼. 손끝에 닿는 감촉은 매끄러웠지만 거미줄처럼 균열이 가득한 보석은 이미 빛을 잃었다.

“이렇게 약한 보석이 아니었는데.”

궁금한 나머지 다이아몬드 귀걸이로 박박 문질러보기까지 했었다. 그때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던 보석이 어떻게 깨졌을까.

아슬아슬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단서가 머릿속에서 가물거린다.

“목걸이, 희귀보석. 희귀한 원석….”

아시카는 아픔도 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걸이를 옷 속에 숨긴 뒤 서고의 책장을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기 시작했다.

“신비한 힘의 기원, 건국 신화, 전설과 보물, 저주받은 보석들…. 이쪽일까?”

새로운 단서에 몰두해 있는 사이 서고의 문이 열렸다. 진작부터 노크 소리가 울렸지만 책장에서 문까지의 거리가 먼 탓에 듣지 못했다.

“아가씨.”

“아, 쥴마.”

“집무실에 안 계셔서 찾았습니다.”

아시카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책장에 도로 꽂아 넣었다. 어쩐지 자신이 찾는 정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필요한 책이 있으시면 서고 담당자에게 가져다 달라고 하지 그러셨습니까.”

“내가 직접 찾아야 할 게 있어서 그래.”

근처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한 손으로 들기에도 버거운 장서들이 켜켜이 놓여있었다. 쥴마의 시선이 무심결에 쌓여있는 책들로 향했다.

“수도의 대가문, 귀족의 계보, 제국을 대표하는 영지의 역사, 귀족 가문의 역사와 전설…. 이게 다 뭡니까? 귀족 가문에 대한 정보를 건국 초기부터 다 확인하려는 겁니까?”

“미리 알아두면 좋지 않을까? 이번에는 제대로 된 가문을 골라보려고.”

“정혼자를 역사책 보면서 고르신다는 말입니까?”

쥴마의 어이없는 얼굴을 보고 아시카는 자신이 보던 책들을 슬며시 몸으로 가렸다.

“조부님께만 맡겨둘 문제는 아니잖아. 잘 알려지지 않은 가문의 특성이나 지병 같은 게 있을 수도 있고.”

진지한 설명이 어설프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쥴마는 제 주인의 뜻을 헤아려보려고 신중을 기했다.

‘연애 경험이 없으셔서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다음 정혼 상대를 물색하려고 귀족들의 가계도를 뒤지는 레이디라니. 쥴마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요즘 부쩍 초대장이 늘었습니다. 차라리 무도회에 참석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직 파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어. 최소 석 달은 자숙해야지.”

아시카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고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봐.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어.”

쥴마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져서 은근히 화제를 돌렸다. 왠지 핑계처럼 느껴졌지만 쥴마는 가만히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서면서 서고 담당자에게 정리를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시카는 별채를 나와 정원 산책로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묵은 책 냄새에 둘러싸여 답답했던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근데 뭐가 급해서 서고까지 온 거야?”

“아, 그렇죠.”

쥴마는 그제야 잊고 있던 목적을 상기했다.

“탈리온 공작가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아시카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놀라움과 의문이 뒤섞인 얼굴이 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쥴마는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 내밀었다.

“조금 전에 심부름꾼이 다녀갔습니다. 탈리온 공작가에서 온 서신이 맞습니다.”

아시카는 바로 받아들지 않고 쥴마가 내민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탈리온의 인장이 찍힌 봉투와 유려한 필체로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는 기분이 묘했다.

‘직접 적었어.’

한눈에 알아보았다. 기껏해야 협의 문서에 적힌 서명밖에 본 적이 없는 데도 제 이름을 적은 필체가 드루쉬아의 것임을 알았다.

“확인 안 하십니까?”

협의장에서 있었던 일 이후 처음 온 연락이었다. 단지 서신일 뿐인데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아시카는 긴장된 표정으로 서신을 받아들었다.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혼자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치 혼자만의 비밀인 것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자신의 바람이 우스워서 아시카는 바로 인장을 뜯어 서신을 펼쳤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직접 대면을 제안한다고?”

“만나자는 말 아닙니까?”

쥴마의 목소리가 커졌다. 탈리온 공작이 이그레인 소공작에게 직접 만나자는 공식 서신을 보냈다. 흔한 일은 아니었다.

“쥴마, 대공령에 건물 짓는 문제는 마무리되지 않았어?”

“네. 새로 산출된 비용에 대해 저쪽도 동의했습니다.”

“겨울 예산 집행 문제까지 해결했으니까 공식 협의는 내년 봄이나 되어야 할 거고.”

“맞습니다. 따로 대공령에서 연락 온 것도 없습니다.”

무슨 일일까 싶어 쥴마의 얼굴에도 의아한 기색이 가득했다.

아시카가 대공령 관리를 맡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웨이브가 전대 탈리온 공작과 만난 것은 14년 전 사고 직후가 마지막이었다. 그가 탈리온과 마주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이후 대공령 관리는 양쪽의 보좌관이 협의를 대신했고 주둔군과 보급, 관리 문제 등은 관성적으로 처리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5년 전, 협의 테이블에 탈리온의 보좌관이 아닌 드루쉬아가 직접 나오면서부터였다. 드루쉬아는 이그레인 공작의 보좌관을 사정없이 몰아붙였고 권한이 없는 보좌관은 매번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협의 과정에서 번번이 일방적으로 휘둘리게 되자 결국 아시카가 직접 나섰다. 그녀가 성년이 되던 해부터니까,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이었다.

협의 때마다 어찌나 세세하게 따져대는지, 아시카는 날짜가 돌아오기 한 달 전부터 밤잠을 설치며 대공령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비해야 했다.

‘징글징글하게 집요한 남자였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지나치게 쉽게 넘어갔다. 그것이 이상하다 싶더니만.

“용건도 적혀있지 않고 다짜고짜 만나자는 건 탈리온 공작답지 않습니다.”

쥴마의 의견에 아시카 역시 수긍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폭 나왔다.

‘왜 이렇게 빚이 늘어가는 기분이지.’

황궁에서 저지른 실수부터 치안대의 일을 독단으로 처리한 것, 코랄의 문제로 도움받은 것까지. 거기다 협의장에서는 차마 못 보일 꼴을 보이고 말았다.

그래서였다. 만나자는 요청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뒤늦게 그 문제를 들고 나오면 어떻게 해.’

언제나 허를 찌르는 남자라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그냥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자신이 안 만나겠다는데 그 남자라고 별수 있을까.

“회신할까요?”

“공식적인 서신이니까 거절도 공식적으로 해야겠지. 거절 사유는… 일련의 사태로 인해 심신이 피로하여 요양 중이라고 해.”

불쾌한 듯 말하면서도 서신을 쥔 손이 조심스럽다. 쥴마가 필요 없어진 서신을 다시 가져가려고 했지만 아시카는 서신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쥴마는 머쓱해진 손을 거두었다.

쥴마가 자리를 떠나고 얼마 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정문 쪽에서 다가오는 사람은 잔느였다.

“아가씨.”

아시카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까이 다른 사용인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

“깨어났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직접 만나봐야지. 준비하고 내려올 테니까 마차를 대기시켜. 가문의 문양이 없는 걸로.”

“네, 알겠습니다.”

아시카는 지시를 내린 뒤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저택을 나섰을 때는 정오를 막 넘겼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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