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20화 (20/153)

#20.

저택으로 들어선 샤프리는 얇은 케이프를 벗어 집사에게 건넸다.

“드루는 어디 있어?”

“집무실에 계십니다. 공작님께 소식을 전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응접실에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기다려 달라는 말이 무색하게 샤프리는 집사를 지나쳐 집무실이 있는 이 층으로 향했다. 탈리온 저택의 구조는 훤히 꿰고 있어서 따로 안내가 필요하지 않았다.

저택에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절로 샤프리의 뒤를 쫓았다.

계절에 어울리는 화사한 살구색 드레스는 상체에 딱 달라붙어 가슴과 허리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걸을 때마다 질감 좋은 드레스 아래에 엉덩이 곡선이 도드라져 묘한 색기마저 느껴졌다.

“안 좋은 소식이 있었다던데.”

집사는 샤프리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혼자 저택을 활보해도 샤프리의 앞을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14년을 보아왔고 지난 1년간은 주인의 약혼녀인 신분. 탈리온 공작가에서는 전대 공작인 네오렌과 드루쉬아 외에 사용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상대였다.

샤프리가 집무실에 도착하기 전에 등 뒤에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레이디 마이헬러. 안녕하십니까!”

“오르카 경, 오랜만이에요.”

다급하게 뒤따라온 상대는 이제 스물 후반에 접어든 보좌관 미하일 오르카였다. 샤프리는 호감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수도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다면서요. 어딜 급하게 다녀오세요?”

“아, 예. 지시받은 게 좀 있어서요. 공작님을 뵈러 오신 겁니까?”

“경이 고해주시겠어요?”

“아, 네.”

두 사람이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미하일이 문을 두드렸다.

“각하, 저 미하일입니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미하일은 안으로 급히 발을 들였다.

“각하, 저희 기사들의 제보가 맞았나 봅니다. 그날….”

드루쉬아는 문밖에 서 있는 샤프리를 알아보고 손을 들어 미하일의 말을 잘랐다. 흠칫 놀란 미하일이 입을 닫고 멈춰 섰다.

“샤프리, 언제 왔어? 응접실에서 기다리지 않고?”

드루쉬아와 마주치자마자 샤프리의 표정이 변했다. 눈꼬리를 조금 낮췄을 뿐인데 울 것처럼 처연한 얼굴이 되었다.

“드루. 소식 못 들었어?”

“아, 맞아. 이번에 구빈원에서 난 화제로 헤네시 남작 부인이 화를 입었다지.”

뒤늦게 보고받은 내용을 기억하고 드루쉬아는 미간을 좁혔다. 건조한 반응이 돌아오자 샤프리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미하일은 슬그머니 샤프리의 눈치를 보았고 먼저 와 있던 칼프는 무심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피했다.

“시신은 아직 수습 중이라고 해. 현재까지 열 구 이상의 시신이 나왔다는데, 거기 있던 인원을 생각하면 몇 명이 더 나올지 모르겠다는군.”

위로를 바라는 여자 앞에서 드루쉬아는 사무적으로 상황을 읊어주었다. 샤프리는 체념한 듯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헤네시 남작부인과 함께 갔던 하녀 둘도 실종됐어. 혹시 신분패 같은 게 나오면 알려줘.”

“이 건은 치안대 소관이야. 아마 그쪽에서 확인되는 대로 마이헬러 저택으로 찾아가겠지.”

“그런데 드루는 어쩌다 거기 있었던 거야?”

“마침 란탈의 지소에 있었어. 이번 파병문제 때문에.”

“방화사건이라며. 치안대하고 기사들이 함께 움직인다고 들었어.”

드루쉬아는 한 손으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며 샤프리를 보았다.

“샤프리, 어쩌지? 오늘은 내가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은데. 다음에 약속을 잡고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

‘약속을 잡고’라는 말에 유난히 힘이 들어갔다. 드루쉬아는 샤프리가 제멋대로 구는 것을 나무라지 않으면서도 저렇게 종종 선을 그을 때가 있었다.

“드루, 나 물어볼 게 있어.”

오늘 탈리온 저택을 방문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것이 본래 목적이라는 걸 깨닫고 드루쉬아가 두 명의 보좌관에게 신호했다. 둘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 밖으로 나가 대기했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도 전에 샤프리는 본론을 꺼냈다.

“우리 얼마 만에 만나는 건지 알아?”

“그러고 보니 연회 이후 계속 바빴군.”

드루쉬아는 이제야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그 무심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투정을 부릴 수도 없었다. 약혼 전이나 후나 그의 태도는 언제나 한결같았기에.

약속 없이 찾아와도 만날 수 있는 오랜 친우. 드루쉬아 쪽에서 먼저 보고 싶어 하는 일 따위는 없는 그런 사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눈앞에 빤히 보이는 마지막 선을 넘지 못한다.

“근데 뭘 물어보려고?”

샤프리는 심란한 마음을 다독이며 저택에 방문한 목적을 상기했다.

“그날 연회에서, 드루 네가 한 거야?”

“무슨 말이지?”

“연회에서 사달이 벌어졌잖아. 오클레인 공자의 내연녀가 거기 참석하는 바람에. 근데 그 여자를 데려간 게 크라우니 남작이라며?”

그것이 우연일 리 없었다. 이그레인과 탈리온은 서로에 대해 끊임없이 정보를 탐색해왔다. 드루쉬아는 진작에 내연녀의 존재를 알았을 것이다.

“아아.”

뒤늦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드루쉬아가 반응했다.

“칼프가 레이디 슈베른을 연회에 데려간 거 말이군.”

그 기억을 떠올리며 드루쉬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내내 건조하던 남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깃들었다.

샤프리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네가 지시한 거야? 대체 왜?”

“레이디 이그레인은.”

드루쉬아는 생각에 잠기며 가만히 턱을 쓸었다. 기억을 더듬는 것도 같고 모호한 제 감정을 더듬는 것도 같은 표정. 샤프리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악우잖아. 그 정도 배려쯤은 받을만한.”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서로 으르렁대며 보낸 세월이 얼만데. 그런 놈에게 발목 잡혀 망가지는 걸 보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았단 말이지.”

미운 정도 정이라고 해야 하나. 자신이 욕하고 괴롭히는 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당하는 꼴은 보기 싫었다. 그래서 판을 깨고자 나선 것이었는데.

아시카의 약혼자는 파렴치한일 뿐 아니라 미친놈이기까지 했다. 파혼 요구하는 여자를 급습하는 개새끼라니. 협의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드루쉬아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샤프리의 눈꼬리가 획 치켜 올라갔다.

“그걸 말이라고 해? 그 여자 약혼자가 바람을 피우든 사생아를 만들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잘못되면 오히려 좋아해야 하는 거 아냐? 차라리 부부 사이가 나빠서 애가 없으면, 그래서 이그레인의 대가 끊기면 더 통쾌한 게 아니냐고.”

“샤프리!”

드루쉬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러나 샤프리는 멈추지 않았다.

“왜 네가 기분 나빠하는데? 너도, 가문의 기사들도 모두 이그레인이라면 이를 갈잖아.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고, 기사들끼리는 마주치기만 하면 주먹다짐하려고 길길이 날뛰고. 철천지원수처럼 굴면서 왜? 이그레인 공작 때문에 시신도 못 찾고 텅 빈 관으로 장례를 치렀던 사람들을 잊었어?”

“샤프리, 그만해!”

쾅, 하고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드루쉬아가 내리친 주먹에 잉크병이 들썩여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시는, 그 얘기 꺼내지 마.”

간신히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 샤프리가 말한 ‘텅 빈 관으로 장례를 치렀던 사람’ 중에는 드루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드루쉬아는 열두 살에 부모를 잃었고 끝내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미안해.”

샤프리는 사과하면서도 별로 미안한 얼굴이 아니었다.

되짚어 생각해보면 드루쉬아의 시선은 자주 아시카에게 향해 있었다. 사교모임에서, 황궁 행사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칠 때면 드루쉬아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어느새 아시카를 보고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불쾌감 또는 분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의심이 들었다.

설령 그것이 단순한 흥미일 뿐이라 해도 샤프리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니 가끔은 상기시켜줘야 한다. 두 가문의 관계가 어떠한지, 드루쉬아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조만간 헤네시 남작 부인의 장례식이 있을 거야. 가족이 없어서 우리 쪽에서 약식으로 치러주기로 했어. 그래도 명색이 약혼자인데 그날은 와줬으면 해.”

“서신, 보내도록 하지.”

딱딱하게 날을 세운 대답이 돌아왔다. 샤프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드루쉬아를 보았지만 그 이상의 위로나 다정한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를 억누른 눈동자가 더는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며 무시무시한 푸른빛을 내었다. 마음이 상한 샤프리는 인사 없이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레이디 마이헬러.”

“아, 안녕히 가세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칼프와 미하일은 민망하게 인사를 건넸다.

우아하게 저택을 찾아온 샤프리는 그렇게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탈리온 저택을 떠났다.

칼프와 미하일은 눈치를 보며 다시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샤프리의 방문으로 중단되었던 보고를 계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저어, 각하.”

굳은 표정으로 서있는 드루쉬아를 향해 미하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헤네시 남작 부인이 사고를 당해 상심이 크지 않겠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마이헬러 저택에서 머물렀다던데요.”

그러니 따뜻한 위로 한마디 건네주지 그랬냐며, 지나치게 무심한 주인에게 보내는 충언이었다. 그러나 드루쉬아의 대답은 단호했다.

“안 친했어.”

“네?”

“놀라기는 했겠지. 하지만 남작 부인의 죽음을 슬퍼할 만큼 친하지는 않았다고.”

“아무리 그래도….”

드루쉬아가 입을 다무는 것을 보고 미하일도 말을 삼켰다.

샤프리가 이럴 때마다 드루쉬아는 곤혹스러웠다. 감정 기복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때때로 앞뒤가 맞지 않는 감정을 드러내며 공감을 요구할 때는 대처하기가 난감했다.

‘그래도 샤프리니까.’

그때마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샤프리라 해도 오늘은 지나쳤다.

드루쉬아는 바닥에 엎어져 흥건하게 번진 잉크를 보며 욕설을 뱉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라앉아있던 기분이 샤프리의 방문으로 더욱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아까 하려던 보고가 뭐였지?”

“아, 예. 방화가 맞는 것 같습니다.”

미하일이 화들짝 놀라 즉답했다. 드루쉬아는 묵묵히 다음에 이어질 보고를 기다렸다.

“발화지점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곳이고 기름 흔적도 발견되었답니다. 거기다 중환자 격리실에서 꺼내지 못한 시신이 상당한 모양입니다. 근무자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날 서른 명 넘는 인원이 거기 있었답니다.”

“그렇게나 많았다고? 그게 보통인 건가?”

“그게 좀 이상합니다. 거기는 중환자 격리실이라서 원래는 수용인원이 많지 않았답니다. 그날따라 유난했다고 하더군요.”

드루쉬아는 미하일의 보고를 가만히 곱씹어보았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거슬리는 구석이 있었다.

“우리 기사들이 목격한 내용은?”

“그게…, 이그레인 공작가의 마차를 봤다는 기사들 이야기가 사실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미하일은 이그레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조심스러워졌다. 드루쉬아는 속을 알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화재 현장에서 이그레인 소공작으로 추정되는 여자를 봤답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젊은 여자가 기사를 대동하고 있었는데, 기사가 여자였답니다. 아마 베르트 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레이디 이그레인이 화재 현장에 있었다고?”

이번에는 드루쉬아도 놀랐다.

“그리고 이건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주저하는 미하일을 보고 드루쉬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뜸 들이지 말지?”

“아, 네. 이그레인 공작가의 마차에 수상한 사람이 올라탄 것 같다는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이그레인의 마차에? 레이디 이그레인이 연관되었다는 말인가?”

드루쉬아의 얼굴이 확연하게 굳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