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지상에서 올라온 빛으로 밤하늘이 환하게 밝아졌다. 어둠을 뚫고 넘실거리는 불꽃이 멀리서부터 보일 만큼 큰 불이었다.
“누구든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나와요!”
“물, 물이 부족해!”
치안대원들이 달려와 화재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놀라 모여든 행인들과 건물에서 뛰쳐나온 사람, 우물에서부터 길게 이어져 물을 퍼 나르는 사람들까지. 불이 난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불길이 본관 건물로 가지 않게 해!”
허리께까지 오는 얕은 담장 너머 네 채의 건물이 줄지어 늘어선 곳이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건물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치안대는 불을 진압하는 동시에 주변으로 옮겨붙지 않도록 모래와 흙을 퍼서 뿌리고 있었다.
아시카는 구경꾼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사람의 장벽을 뚫고 앞쪽으로 나가자 뜨거운 열기가 훅 끼친다.
시뻘겋게 넘실거리는 불꽃이 거대한 괴수처럼 어둠을 가르며 하늘로 솟구쳤다. 본관 건물 뒤쪽으로 반쯤 드러난 화재 현장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야를 뜨겁게 달궜다.
“여기가 어디야?”
“구빈원입니다.”
잔느의 대답에 아시카는 헛숨을 들이켰다.
‘구빈원에서 정말로 불이 났어.’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미래를 예견한 걸까. 그게 아니면….’
비슷하지만 다른 장소, 다른 상황. 혹시 그 여자는 이 화제를 이미 겪은 것이 아닐까.
‘세인트리드 거리의 아트샵.’
거기에 가면 그 여자가 있을까. 아니 분명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이성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확신이었다.
아시카는 바로 옆에 서 있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불이 왜 났는지 혹시 아는가?”
무심결에 뒤돌아보던 중년 여자는 아시카와 잔느를 훑어보고 툭 답을 뱉었다.
“글쎄요. 당장은 불을 끄는 게 급해서. 방화라는 말도 있고.”
바로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중환자들만 모인 곳에 뭐 하러 불을 질러?”
“그게 아니면 왜 불이 났겠어? 요즘 날씨에 불을 피웠을 리도 없고. 주방 건물은 반대쪽이잖아.”
“환자들이 모인 곳이라고?”
아시카의 의문에 대답한 것은 옆에 있던 다른 사내였다.
“저쪽이 치료소가 있는 곳이잖아요. 어차피 내버려 둬도 죽을 사람들뿐인데 불을 왜 질렀겠어요.”
구빈원의 치료소는 의원을 부를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다.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다 보니 규모가 상당했다.
개중에 중병이 있거나 죽음이 임박한 환자들을 따로 격리해서 수용했는데, 불길에 완전히 휩싸인 건물이 그곳이었다.
“불이 커지기 전에 나온 사람이 없다지?”
“마지막 길이 험하게 됐구먼. 안됐네 그려.”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말들이 아시카에게는 와 닿지 않았다. 아까 보았던 환영이 지금도 이어지는 것처럼 멍한 기분이었다. 안타깝게 발을 구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아시카는 발길을 돌렸다.
“아가씨,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잔느가 뒤를 따르며 말을 걸었다. 아시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고 다소 지쳐 보이기도 했다.
“내일 치안대에 사람을 보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
“네. 저택에 돌아가는 대로 지시해두겠습니다. 그런데…. 어?”
“왜?”
잔느가 멈춰 선 것을 보고 아시카도 걸음을 멈췄다. 잔느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치안대원들과 함께 기사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탈리온의 기사들이 아닙니까?”
기사들은 속해있는 가문마다 다른 형태의 정복을 입는다. 그것만으로도 알아보기는 충분했다.
“치안대를 돕고 있는 모양인데.”
“탈리온이 왜 여기에 개입했을까요?”
“아마….”
아시카는 갸웃하다가 중얼거렸다.
“만약에 말이야.”
설마 하면서도 기막힌 우연이 우연같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우연히 탈리온 공작이 이 근처에 있었다면, 손이 부족한 치안대를 위해 기사를 지원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탈리온 공작이 팜레드 거리에 올 일이 있겠습니까?”
아시카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란탈의 지소가 떠올랐다. 정말로 드루쉬아가 그곳에 있었던 건 아닐까.
“근처에 란탈의 지소가 있었지?”
“아. 그렇군요.”
잔느는 다소 갸웃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탈리온 공작은 본래 기사들의 일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들었다. 어쩌면 콜테른 경처럼 파병군 문제 때문에 직접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는 아닌 모양이야.”
그 말에 잔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끄는 것만 해도 인력이 부족한 판에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사방팔방으로 수색 인원이 뛰어다녔다.
수도에서 가장 큰 구빈원이 불타고 있었다. 그곳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연줄도 뒷배도 없는 이들뿐. 어쩐지 미심쩍은 예감이 든다.
두 사람은 꽤 먼 거리를 걸어서 마차가 있는 곳까지 돌아왔다.
“파드로,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어이쿠, 오셨습니까?”
잔느의 목소리를 듣고 마부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탓에 마부는 근처 나무 아래에 자리를 깔고 쉬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뱃대를 바닥에 털며 황급히 불을 껐다.
“저택으로 돌아가십니까?”
“그래.”
아시카는 무심히 대답하며 마차 문고리를 잡았다.
“아가씨, 제가….”
잔느가 놀라서 손을 내밀었지만 아시카는 이미 마차의 문을 열고 있었다. 아시카는 잔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왜?”
“안 하시던 행동을 하셔서 놀랐습니다.”
“아.”
귀족가의 레이디는 시중을 받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시카는 자꾸만 혼자 앞서나갔다. 마치 혼자인 것이 익숙한 사람처럼.
“그러게, 내가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반쯤 열린 문으로 잔느가 손을 내밀 때였다. 캄캄한 안쪽에서 무언가가 아시카를 확 잡아끌었다.
“헉.”
“아가씨!”
아시카는 거의 들리듯이 안으로 끌려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잔느가 잡으려고 했을 땐 이미 늦었다. 잔느가 재빨리 검을 움켜쥐자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쪽이 검을 뽑는 것보다 내 검이 움직이는 게 더 빨라요.”
“흐읍.”
단단한 손이 등 뒤에서 아시카의 입을 틀어막고 서늘한 칼날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얗게 질린 잔느의 얼굴은 똑똑히 보였다.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어서 타시죠. 베르트 경.”
잔느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검날이 아시카의 목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이그레인 소공작님. 도움이 필요한 백성일 뿐이죠.”
상대는 이미 아시카와 잔느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이 마차에 숨어든 것이 의도적이라는 말이었다.
남자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호흡이 떨리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문득 마차 안에 진동하는 매캐한 냄새와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베르트 경, 일을 크게 키우실 생각인가요?”
“아가씨의 지시가 없는 한 나는 움직이지 않아.”
“아, 그렇군요. 소공작님, 이 손을 풀어드리죠. 그렇다고 비명을 지르시면 곤란해요.”
아시카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확인하고 입을 틀어막은 손이 거둬졌다.
“하, 이게 대체….”
“일단 마차부터 출발시키고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난폭하게 행동한 것치곤 남자의 어조는 시종일관 정중했다. 놀란 가운데에도 아시카는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잔느, 시키는 대로 해.”
마차 안에 퍼진 피비린내가 심상치 않았다. 이대로라면 저택에 도착하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제풀에 쓰러질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잔느도 순순히 대답했다.
잔느는 아까부터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마부에게 신호했다.마부가 도움을 청하려고 주변을 흘긋거리는 걸 보고 잔느가 고개를 저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남자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아시카에게 들이밀었던 단검도 힘을 잃어 자꾸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시카는 손끝으로 검을 슬쩍 밀었다.
“나쁜 사람 아니라며. 이 칼, 치우면 안 될까?”
그런다고 말을 들을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남자는 아시카의 말에 단검을 내렸다.
“소공작께선 생각보다 대범하시군요.”
아시카는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제 심장 뛰는 소리에 온몸이 울릴 지경인데 남자는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부상 때문인 것 같았다.
남자가 아시카를 놓아주자마자 잔느가 그녀를 당겨 반대편 자리에 앉혔다. 이제 아시카와 남자 사이를 잔느가 가로막게 되었다.
“아가씨가 누군지 알면서도 감히 검을 들이밀어?”
“급해서 그랬어요. 아니면 당장 저를 치안대에 넘겼겠죠.”
“지금이라고 못할 것도 없지.”
잔느가 화를 삭이며 말을 씹어뱉었다. 찰나의 방심으로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상대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가씨께서 왜 네놈을 도와야 하는데? 다짜고짜 칼부터 들이미는 놈을?”
“베르트 경은 좀 가만히 계시죠. 저는 소공작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요.”
“이게 피 질질 흘리면서 꼬장꼬장하게 따지고 싶어?”
“그러니까요. 기절하기 전에 한마디라도 제대로 나눠봐야 하지 않겠어요?”
“허.”
남자는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감히 공작가의 마차에 뛰어든 배짱은 뭘까. 놀란 마음이 가시고 나자 아시카의 얼굴에는 의문이 어렸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소공작님. 그래도 제 말을 좀… 윽.”
덜컹, 하고 마차가 들썩이자 남자는 벽에 얼굴을 기댄 채 몸을 웅크렸다.
남자의 부상이 깊어 보였다. 어깨를 가르는 긴 자상에서 피가 흘러 마차 바닥을 흥건히 적셨고, 한쪽 팔꿈치와 옆구리 부근은 불에 그슬려 옷이 눌어붙었다.
시뻘겋게 드러난 속살은 쳐다만 봐도 아파 보였다. 위협은커녕 내버려 두면 그대로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몰골이었다.
“화재 현장에서 방화범을 찾는 모양이던데.”
아시카는 눈으로 상처를 살피면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하, 방화범이요? 설마 저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런 몰골을 하고 아니라고 주장하면 설득력이 없지 않아?”
“저 아닙니다. 애꿎은 사람 잡지 마세요.”
“그럼 왜 이런 몰골로 여기 숨어들었는데?”
“그건….”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망설였다. 눈이 가물가물한 것이 당장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마차는 이대로 치안대로 향하게 될 거야.”
“하, 소공작님.”
“날 만나려고 마차에 탄 거 아냐?”
아시카의 재촉에도 남자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초조해하는 것도 같고 눈치를 보는 것도 같았다. 참지 못하고 잔느가 일어나려고 하자 그제야 남자가 말을 뱉었다. 상대가 절대 흘려들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저는… 대공성에서 왔습니다.”
순간 마차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시카와 잔느 모두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대공령에서 왔다고?”
아시카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낮아져 있었다. 남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아니오. 대공령이 아니라 대공성… 이요.”
“이 새끼가 지금 누구 앞에서 사기를 쳐!”
잔느가 버럭 소리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기라뇨. 하….”
“거기가 봉쇄된 게 언제 적 일인데. 지금 황명을 어겼다고 자백하는 거야?”
아시카가 잡지 않았다면 당장 달려들 기세였다. 그러나 남자는 가물가물해지는 목소리로 끝까지 제 할 말을 뱉었다.
“그러니까… 저를… 숨겨주셔야….”
남자의 상체가 벽에 쓸리며 천천히 무너지다 끝내 고꾸라지고 말았다. 잔느가 재빨리 어깨를 잡아 일으켰지만 상대는 이미 의식을 잃은 뒤였다.
“이 새끼 뭡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고 혼자 나자빠지는 건 대체가!”
아시카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남자가 뱉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것은 이그레인과 탈리온 단둘뿐. 알고 꺼낸 말이라면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안이었다.
‘돕는 건 둘째 치고 이대로 놔줄 수는 없겠구나.’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아시카는 마부석 쪽에 있는 창문을 열었다.
“파드로, 저택으로 가지 말고 가까운 별장, 아니 아마노이아에 있는 별장으로 가줘.”
“네? 아가씨, 거긴….”
“알아. 그래도 일단은 거기로 가자.”
아마노이아 거리에 있는 별장은 진작에 폐쇄해서 사용인이 한 명도 없는 곳이었다. 공작가에서 오래 일해 온 마부조차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장소였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리고 잔느.”
잔느는 아시카를 돌아보며 왠지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여기서 내려줄 테니까, 바로 의원을 찾아서 별장으로 데려와.”
“아가씨를 저놈과 단둘이 놔두고 가란 말입니까?”
“잔느가 보기에 저 사람이 일어나서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아가씨만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 그럼. 잔느가 마차를 몰고 파드로에게 의원을 불러오라고 해. 그건 괜찮겠지?”
아시카의 빠른 태세전환에 잔느는 말을 잃었다. 안전에 관해서 만큼은 양보하지 않는 잔느였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는 별수 없었다.
얼마 뒤 마부가 내리고 잔느가 마부석에 앉았다. 마부석 쪽 창문을 열어놓고 잔느는 수시로 마차 안을 살폈다.
남자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였고 아시카는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어둠 속에서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또렷이 보이는데 아시카는 시종일관 꼿꼿했다.
‘아가씨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아시카의 무모한 행보가 이것이 끝이 아닐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