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헉.”
아시카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난 탓에 시야가 아찔했다.
“진정해. 위협하려는 게 아냐.”
“가까이 오지 마요.”
점점 가까워지는 여자를 보며 아시카는 뒷걸음질 쳤다. 혼란스러웠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 어느 것 하나 이해되지 않았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그냥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그래.”
아시카는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듣고 싶지 않았다. 이 이상한 장소와 이상한 사람들과 섞이고 싶지도 않았다.
“아가씨, 잠시만.”
아시카가 도망치려고 하자 여자의 목소리는 더욱 다급해졌다.
“한 가지만 대답해줘. 구빈원에서 불이 났니? 팜레드 거리에서.”
“무, 무슨 말을….”
“잠깐이면 되니까 내 얘기를 좀….”
아시카를 잡기 위해 다가오는 손이 보였다. 까만 장갑을 낀 손이 사신의 그것처럼 흉측하게 느껴졌다.
“악!”
아시카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잡을 수 없게 된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나를 찾아와! 세인트리드 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아트샵이야. 꼭 찾아와야 해!”
다급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등 뒤로 희미해져 간다. 거리의 소음과 정신없이 뛰는 제 발걸음 소리도 멀게만 느껴졌다.
거리 곳곳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이 지나치게 눈부시게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각. 창백하게 쏟아지는 빛이 새카만 어둠만큼이나 강렬하게 시야를 가로막았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아시카는 무작정 달렸다. 허공 속을 달리는 것처럼 막막한 두려움 한가운데로.
“아가씨!”
“악!”
누군가의 손이 아시카의 팔을 덥석 잡았다. 비명을 지르며 뿌리치려고 하자 상대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접니다. 잔느예요. 진정하세요!”
“흐윽….”
익숙한 상대의 얼굴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시카의 얼굴은 귀신을 본 것처럼 창백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잔느에게 잡힌 몸이 작게 경련을 일으켰다. 휘둥그렇게 커진 눈동자와 밭은 숨결.
아시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잔느를 밀어내고 양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쌌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에 겁에 질린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린다.
“흐윽….”
아시카는 어깨를 웅크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제자리로 돌아왔어.’
여기가 자신이 속한 곳이라는 분명한 감각. 그 사실을 깨닫자 두려움도 점차 잦아들었다.
가만히 기다려주던 잔느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뛰어가셔서 놀랐습니다.”
바로 뒤를 쫓았지만 아시카가 사람들 속에 섞여드는 바람에 놓칠뻔했다.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하고 잔느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보였어?”
“너무 빨리 달리셔서 잠깐 시야에서 놓쳤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잠깐이었습니다.”
잔느는 제 일을 소홀히 했다는 생각에 죄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아시카가 물어본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잔느가 안 보였는데.’
드루쉬아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마차에 치일 뻔하고, 온통 새카만 옷을 차려입은 여자를 만났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잔느는 그것이 찰나의 순간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환영을 본 걸까?’
하지만 온몸으로 느껴지던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저를 품에 안던 남자의 체취와 따뜻한 체온, 가슴을 울리던 심장 소리까지. 현실처럼 생생하지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건 진짜가 아니다. 적어도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니야, 잔느가 잘못한 게. 내가….”
아시카는 평정을 되찾고 어깨를 바로 세웠다.
“내가 무서운 걸… 봤어.”
그래, 정말로 무서운 걸 보았다. 어린 시절 두려워했던 침대 밑의 괴물보다 더욱 무서운 어떤 것을.
정신을 차리고 나자 제일 먼저 흐트러진 옷차림이 신경 쓰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다 문득 제 손을 들어 올렸다.
생채기 하나 없는 하얗고 깨끗한 손. 망토와 드레스 자락을 살폈지만 어디에도 흙먼지 같은 건 묻어있지 않았다.
‘분명 넘어졌는데.’
어깨를 부딪친 통증과 손바닥을 쓸던 날카로운 감각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저택을 나왔을 때 그대로 단정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에 부르르 몸이 떨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이건 그냥….’
어떤 핑계를 댄다 해도 자신이 느낀 생생한 감각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차라리 덮어두자고, 그리 마음먹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제야 아시카의 시선에 거리의 풍경이 보였다.
드문드문 빛을 내는 가로등과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 크고 작은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
“그만 돌아가자. 마차가 어디….”
걸음을 옮기려던 아시카는 바로 가까이에 있는 건물 입구를 보았다.
양각의 문양이 뚜렷하게 새겨진 나무문과 그 양 옆에 서 있는 기둥 같은 조각상이 시선을 끌었다.
「여기 란탈의 지소가 있잖아. 파병군에 합류할 기사들 명단도 확인할 겸 해서 와봤지.」
조금 전 들었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설마 하는 생각. 그것은 기대감 또는 묘한 흥분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아시카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건물의 입구로 향했다.
“아가씨, 란탈의 지소에 볼일이 있습니까?”
문득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그녀의 발길을 잡았다. 아시카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 아냐. 그게 아니라.”
“콜테른 경이 이틀 전에 이곳을 다녀갔다고 했습니다.”
잔느는 의아해하면서도 설명을 덧붙였다.
기사들의 문제는 이그레인 공작의 소관이었고, 이그레인의 기사단장인 펄번 콜테른은 이 문제로 대공령까지 다녀왔었다.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서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2층이나 3층 건물이 많은 거리 한가운데 단층으로 지어진 유백색의 건물은 유독 눈에 띄었다. 스치듯이 지나쳐간 적은 있지만 란탈의 지소에 직접 발을 들여 본 적은 없었다.
“그만 돌아가자. 마차가 어디에 있지?”
“제법 멀리까지 왔습니다. 대여소 마차라도 불러올까요?”
잔느의 대답에 아시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걸어가도 돼.”
잔느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앞장서 걸으면서도 생각에 빠진 아시카를 시야에서 놓칠까 봐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밤이 깊어지고 거리의 상점들이 하나둘 문을 닫았다. 빛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거리는 점점 더 어두워졌다.
거리의 소음도 차츰 줄어드는 시간. 멀리서 어수선한 소요가 느껴졌다. 그것은 사람들의 비명 소리였다.
“불이야!”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상점 문을 닫으려던 사람들이 놀라 거리로 나왔다.
아시카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불이… 났나 봐?”
아시카는 망연한 얼굴로 사람들이 달려가는 거리를 보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길을 돌아서 가는 게 좋겠습니다.”
괜히 휩쓸려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잔느는 화재현장을 피해 방향을 바꿨다.
“아니, 그쪽이 아니라….”
“아가씨?”
“우리도 가보자. 어디서 불이 났는지.”
“네? 불난 곳에 가보자는 말씀입니까?”
잔느는 다소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아시카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소란스러운 걸 보면 불이 크게 난 모양입니다. 아가씨가 가시기에는 위험합니다.”
아시카는 잔느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한 가지만 대답해줘. 구빈원에서 불이 났니? 팜레드 거리에서.」
온몸에 검은색을 뒤집어쓴 여자가 그렇게 물었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왜 그걸 물었을까. 그게 무슨 의미였기에.’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본능 같은 직관. 어쩌면 자신이 겪은 말도 안 되는 일이 환상이 아닌 실제라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현실과 관련된 어떤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아가씨.”
잔느는 당황한 얼굴로 아시카의 뒤를 쫓았다. 고귀한 레이디의 표본 같던 아시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이제는 거의 뛰다시피 앞서가며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거침없는 발걸음은 다급하면서도 여전히 품위를 잃지 않았다.
짧은 고민 끝에 잔느는 체념했다. 파혼의 충격이 이렇게나 컸나보다 하면서. 달라진 제 주인의 행보를 조용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