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잔느, 어디 갔어?”
눈 한번 깜박일 정도의 시간일 뿐이었다. 제 호위 기사가 말도 없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덜컥 두려움이 몰려든다.
“잔느!”
아시카는 주위를 둘러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혹시 잔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아니면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했는데 저가 못 들었던 걸까.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빠르게 뛰고 걸음도 빨라졌다.
아시카는 어느새 사람들 속에 섞여들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옷차림 덕에 누구도 그녀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어둑한 거리의 조명등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덜컹거리며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
‘뭔가 이상해.’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등골이 오싹한 것이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하지만 팜레드 거리는 본래 다니던 곳이 아니라서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다.
서늘한 공기에도 식은땀이 배어났다. 정처 없이 헤매느라 아시카는 점점 더 번화가를 벗어나는 중이었다. 그렇게 방향 없이 걷던 걸음을 멈췄을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시카!”
처음에 든 생각은 ‘설마’였다. 제 이름을 부를 리 없는 목소리가 저를 부르다니.
아시카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뻣뻣하게 굳어진 몸을 돌렸다.
“세상에, 여기서 혼자 뭐 하는 거야?”
상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사소한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거부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시카는 완전히 얼어버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상대의 얼굴도 굳어졌다.
짧은 금발에 깊게 그늘진 푸른 눈동자. 걱정스럽게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동자에는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묻어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무슨 일 있었어?”
“…르쉬아….”
가까스로 흘러나온 이름에 드루쉬아는 긴 숨을 토해냈다.
“선 채로 기절한 줄 알았잖아. 몸은 또 왜 이렇게 차? 옷차림은 왜 이렇게 가볍고?”
드루쉬아는 서늘하게 식은 가녀린 팔을 손으로 쓸다가 덥석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아시카는 저항할 틈도 없이 너른 가슴에 폭 파묻히고 말았다.
격하게 들이켜는 숨에 남자의 체향이 느껴졌다. 묵직한 나무향과 옅은 허브향이 섞인 편안한 체향. 시야를 가린 넓은 어깨와 생생하게 울리는 심장 박동이 아시카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밖에 나올 일이 있으면 미리 말을 하지. 그럼 내가 데리러 갔을 텐데.”
드루쉬아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그녀를 품에 안고 가만가만 등을 쓸어내렸다.
낮은 목소리가 둥, 둥, 진동하는 것처럼 아시카의 전신을 울린다. 남자의 손길이 몸에 닿는 데도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저를 품어주는 단단한 가슴이 눈물 나도록 따뜻했다.
“르쉬아….”
“그래, 나 여기 있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드루쉬아는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품에 안고 다독여주었다.
그러기를 얼마간, 문득 아시카는 이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각하자마자 몸이 절로 굳어졌다.
“아시카, 내 얼굴 좀 봐.”
변화를 알아차리고 드루쉬아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쓸며 들어 올렸다. 아시카는 피하지도 못하고 짙푸른 눈동자를 고스란히 마주하게 되었다.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었지? 내가 살펴주지 못해서 미안해.”
“…결…혼?”
“그래 우리 결혼식. 준비할 것도 많은데 공작님께 업무를 줄여달라고 하지 그랬어.”
아시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던 코랄과의 결혼식이 어째서 탈리온 공작과의 결혼식으로 둔갑했는지, 저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남자가 왜 이렇게 애정이 넘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지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뭐야? 이건 꿈이 아니잖아.’
거리 한복판에서 선 채로 기절한 게 아니라면 이건 꿈일 수가 없었다.
“왜 그래? 너무 오랜만이라 놀란 거야? 하긴, 일주일이 길긴 길었어.”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다정하다. 이 남자가 이렇게 다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싶을 만큼, 저를 보는 푸른 눈동자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그 느낌이 좋아서 이대로 계속 안겨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르쉬아, 왜 여기 있어…?”
“여기 란탈의 지소가 있잖아. 파병군에 합류할 기사들 명단도 확인할 겸 해서 와봤지.”
다섯 개의 기둥이라 불리는 란탈. 왕도 귀족도 없다는 기사들의 나라 란탈은 대륙 곳곳에 있는 위험지역을 관리하며 이를 위해 협정을 맺고 파병군을 받는다. 란탈의 지소는 이런 파병군을 관리하기 위해 각 나라에 몇 개씩 지소가 있었다.
트리델리아 제국은 란탈의 요청에 따라 매년 두 번 파병군을 보냈는데, 고위귀족일수록 가신 가문에서 빠지는 기사들이 적지 않았다. 기사의 가문인 탈리온에서는 특히나 예민하게 신경 쓰는 사안이었다.
“그걸 직접 관리… 해?”
아시카는 자신의 말투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그 미묘한 간극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되도록 위험지역으로 보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거지. 물론 그놈들이 뇌물을 받거나 부탁을 들어주지는 않지만, 마냥 손 놓을 수는 없잖아.”
보좌관을 보내도 될 일을 드루쉬아가 직접 챙기고 있었다. 기사들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기 때문이다.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혼자 다니지 말라니까. 팜레드 거리에서 볼일이 뭐가 있다고.”
“아….”
아시카는 지레 놀라서 그를 확 밀어냈다. 불현듯 떨어져 나간 그녀를 보고 드루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시카?”
거부당했다는 사실에 놀라다 못해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이 남자하고 뭘 하는 거야?’
진짜 연인인 양 다정하게 몸을 맞대고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말도 안 돼.’
탈리온이라면 이를 가는 웨이브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모와 가족을 잃고 분노하던 기사들과 배상을 요구하라는 가신들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나중에, 르쉬아….”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저를 보고 달콤하게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도, 거기에 반응해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도, 따뜻하고 너른 품에 더 안겨 있고 싶다는 자신의 마음도 잘못되었다.
“갑자기 왜 그래? 아시카!”
다급한 외침을 외면한 채 아시카는 발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달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거리의 사람들과 어깨가 부딪히고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면서도 정신없이 달렸다. 무작정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려 발이 확 꺾였다.
“헉.”
몸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지는 순간 사람들의 비명이 귓가를 때렸다.
“아가씨, 멈춰!”
“아악!”
말이 울부짖는 소리와 무언가 부딪히는 둔탁한 충격음. 급하게 방향을 꺾은 마차가 거리의 가로수와 부딪히고 말았다.
“아가씨, 미쳤어! 죽으려고 마차에 뛰어들어!”
가까스로 마차를 멈추고 성난 마부가 길길이 날뛰었다.
아시카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한 얼굴로 상대를 보았다.
마부석에 앉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노한 목소리와 일그러진 상대의 얼굴이 실감 나지 않았다.
“이 아가씨가 미쳤나. 아가씨 때문에 마차가 어떻게 됐나 보라고!”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상대는 더욱 화를 냈다. 도통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차의 문이 열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아이쿠, 손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웬 정신 나간 여자가 마차에 뛰어드는 바람에 그만.”
마부는 뒤늦게 마차 안에 있던 손님을 기억하고 얼른 마부석에서 내려왔다.
검은색 드레스에 검은색 베일을 드리운 모자. 마차에서 나온 상대는 온통 검은색을 뒤집어쓴 여자였다.
“이런, 젊은 아가씨가 어쩌자고 그랬어?”
살짝 쉰 듯한 목소리의 여자가 느린 걸음으로 아시카에게 다가왔다.
“어디 다친 건가, 아니면 놀라서 그런 건가.”
“다치긴요! 저 여자가 멋대로 달려들어 제풀에 넘어졌습니다. 말들은 여자분 옷자락도 스치지 않았단 말입니다.”
옆에 있던 마부가 여전히 씩씩거리며 역정을 냈다. 여자는 성을 내는 마부보다 아시카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아가씨?”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아시카의 시선이 마부에게서 검은 옷을 입은 여자에게로 옮겨갔다.
새카만 눈동자가 거리의 가로등 빛을 받아 차게 반들거린다. 아시카의 시선이 베일 너머 여자와 마주치는 순간 상대가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너…”
놀라움은 이내 더 큰 충격으로 번져갔다.
“기이하구나. 너는….”
여자의 망연한 시선은 아시카가 아닌 다른 무엇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시카의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가 돌았다.
충격을 갈무리한 여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이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구나.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