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하얀 천으로 뒤덮힌 응접실 안.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아 먼지 쌓인 선반 위에 이질적인 물건이 있었다.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빛이 바랜 초상화와 둥근 액자 상단에 박힌 기이한 보석 하나.
그것은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진한 청보라빛의 투명한 보석은 생경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당장 바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홀린 듯이 손을 내밀었을 때 보석에 닿았던 시린 감촉을 기억한다. 서늘한 방 안보다 더욱 낮은 온도. 한겨울 얼어붙은 호수처럼 몸서리쳐지는 한기가 느껴지는 순간 그녀의 시야도 암전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기억들이 스쳐 갔다.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끌어안고 울부짖던 한 남자가. 사방에 적밖에 없던 사지에서조차 끝끝내 그녀를 놓지 않고 아득바득 살아남으려던 남자가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따져 묻는 것조차 사치였다. 그저 살아남는 것만이 최우선 과제였던 시간이었다.
두 사람의 도피는 그리 먼 곳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간신히 치료를 받고 몸을 숨긴 곳은 트리델리아 제국과 인접한 국경 마을이었다. 거기서 또 한참을 숲으로 들어가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는 곳이 두 사람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스쳐 가는 기억 속에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던 일상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잠시뿐이지만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을 잃고 마지막 남은 행복이 소중해서 그래도 아시카는 웃었더랬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 남자도 웃었다. 채 지우지 못한 근심을 안고도 퍽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마지막 순간 온몸을 파고드는 격한 통증. 제 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며 풍기는 진한 피비린내.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절망 어린 공포.
그러나 그 모든 감각을 넘어서는 고통은 그녀를 바라보던 눈동자였다. 그 남자의 짙푸른 눈동자가 고통보다 절망을, 절망보다 사랑을, 그리하여 채 놓지 못할 진득한 미련을 남긴다.
채 하지 못한 말들이 남아있던 눈동자.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다정하게 바라보던 시선, 애정 어린 눈인사, 걸음조차 쉽지 않은 그녀를 보며 때때로 미안함에 떨구었던, 그런데도 넘치던 사랑으로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가.
“…르쉬아….”
숨을 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치려는 시도도 벗어나려는 몸부림도.
“흐윽….”
시야에서 어둠이 사라지고 희미한 빛이 들어온다.
눈을 뜨고 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쿵, 쿵 뛰는 심장 소리에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뿐.
그렇게 있기를 얼마간, 익숙한 천장의 장식을 확인하고 몸에서 떨림이 잦아들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다시 눈을 떴다. 제 현재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시카는 맥없는 손으로 침대를 집고 몸을 일으켰다. 마치 꿈속이 현재인 양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하아….”
지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마를 쓸어 올리는 손에서 흥건한 땀이 묻어난다. 물에 흠뻑 젖은 것처럼 온몸이 땀에 젖어 묵직했다.
“또 그 꿈이구나.”
황궁 연회에서 돌아온 뒤부터 시시각각 반복되는 꿈이 아시카를 괴롭혔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무엇인 양. 애써 밀어내면 더 지독한 악몽이 되어 밤마다 그녀에게 찾아들었다.
“꿈일 뿐이야. 지독한 악몽일 뿐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도 악몽은 뇌리에 깊숙이 뿌리박혀 희석되지 않았다.
아시카는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녀를 부르기에는 이른 시간. 당장 뭘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숄을 찾아 걸치려는데 무언가가 숄의 끝자락에 쓸려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응?”
발치에 떨어진 것은 목걸이였다. 순도 높은 백금 세공에 푸른 사파이어가 박혀있는.
문득 보석을 중심으로 빙 둘러진 작은 알갱이가 시선을 끌었다. 익숙한 목걸이를 보면서 이것과 전혀 닮지 않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른 탓이다.
“…아!”
악몽이 지나치게 강렬해서 흘려 넘기고 말았다. 황궁에서 기절하기 직전 봤다고 생각했던 보석. 액자 속의 깨진 보석과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게 이제야 생각나다니.”
아시카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아직은 모두가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 벽등이 켜져 있어도 복도는 어두웠다. 혹시 누군가 깰까 봐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그녀의 집무실이었다.
“금고가 아니었어.”
금고보다도 더 비밀스러운 장소. 비밀을 아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찾지 못할 그런 곳.
아시카는 망설임 없이 바닥에 엎드렸다. 푹신한 카펫을 끝자락부터 들어 올리자 촘촘히 깔린 대리석 바닥재가 보였다. 그냥 봐서는 아무런 차이를 느낄 수 없는 바닥이었다.
문서 한 장 크기로 칸칸이 이어진 바닥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하나하나 확인했다. 둔탁한 충격음이 계속되다가 어느 지점에선가 미세한 울림이 느껴졌다.
“찾았다.”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서랍장을 뒤져 종이칼을 찾아냈다. 맞물려 있는 대리석판 모서리를 긁어내고 들어 올리기까지는 꽤 수고가 필요했다.
마침내 대리석판 아래로 주먹 두 개가 들어갈 정도의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 속에 검은 벨벳 주머니가 들어있었다.
지난 14년 동안 꺼내 보지 않았다. 아니, 여기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던 물건이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부친은 자장가를 불러주는 대신 그녀를 안고 이곳을 찾았다.
‘내 어머니의 유품이란다. 이것을 내게 주실 때 절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하셨지. 아버지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무슨 예감이 들어서였는지, 그런 물건을 부친이 아시카에게 보여주었다. 아시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돌아가신 조모의 유품이라고 했던가.
선대 공작 부부의 반대로 끝내 가문에 발을 들이지 못했던 웨이브의 연인. 그래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여자. 때문에 아시카의 부친은 평생 사생아라는 불명예를 감수하고 살아야 했다.
두근, 두근. 단단히 묶여있는 끈을 풀고 벨벳 주머니를 여는 동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찰그락, 하며 손바닥에 시린 한기가 쏟아진다.
“아….”
그녀가 기억하던 것과 꼭 같은 목걸이였다. 백금 재질의 줄에 마름모꼴의 펜던트가 연결되어 있는데 오래된 물건인 양 세공이 다소 투박해 보였다.
펜던트의 중심에는 뒤집힌 물방울 형태의 보석이 박혀 있고, 마름모 형태의 백금 세공 좌우에는 작은 보석이 두 개씩 총 다섯 개가 박혀있었다.
다섯 개 모두 동일한 보석으로 어둠 속에서도 색을 잃지 않는 뚜렷한 청보라빛이었다.
“같은 종류야.”
그날, 황궁에서 발견한 액자에도 꼭 같은 보석이 박혀있었다. 그보다는 작지만 깨지지 않은 온전한 형태의 보석이었다.
“이게 무슨 보석일까.”
사파이어라고 하기에는 보라색이 진하고, 자수정이라고 하기에는 청색이 짙다. 미묘한 금속성의 빛은 투명하면서도 시야를 찌를 듯이 강렬했다. 그냥 봐서는 평범하지만 어디서도 본적 없기에 의문이 드는 보석이었다.
어째서일까. 몸서리치게 차가운 감촉에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부친이 제게 남겨준 부적처럼 느껴진다면 망상일까.
어쩐지 이것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아시카는 망설임 없이 목걸이를 제 목에 걸었다.
긴 줄이 아래로 늘어져서 펜던트가 깊게 파인 가슴골 사이로 숨겨졌다.
“당분간만 하고 다니자.”
이 불안이 가라앉을 때까지.
아시카는 차분한 숨을 토해내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다음날 오후 저택을 나가려던 아시카는 트레이 한가득 쌓여있는 서신을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이게 다 뭐야?”
“안부를 여쭙는 서신입니다.”
“이걸 다 가져오면 어떻게 해?”
아시카의 핀잔에 쥴마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제 선에서 한차례 걸러낸 것들입니다. 수도의 고위귀족들과 연합 상단의 지분율이 높은 가문들만 모아 왔습니다.”
파혼한 지 불과 열흘밖에 되지 않았다. 수도에 파혼 소식이 전해진 뒤부터 밀려드는 서신으로 쥴마는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시카의 이마가 미묘하게 구겨졌다 제자리를 찾는다. 또 시작이구나 하는 체념 섞인 불쾌감이었다.
“전시장에 내놓은 상품이 된 기분이네. 지금은 안부 서신이지만 얼마 뒤면 이게 전부 초대장으로 바뀌겠지.”
시기가 시기인 만큼 당장 본색을 드러내기는 민망할 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수도 최고의 미혼 여성이 혼맥 시장에 나오는데 그냥 두고 볼 리가 있나.
잊고 있었다. 몰려드는 면담 요청과 구혼서, 무도회와 티파티 초대장. 2년 전 겪었던 난리를 다시 치러야 할 걸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시카는 손을 내저으며 서신을 외면했다.
“그냥 쥴마가 알아서 처리해.”
“네? 하나도 안 보십니까?”
“약간의 여지만 남기고 적당히 회신하도록 해. 정말 특이 건이 아니면 내게 알릴 필요도 없고.”
쥴마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시카는 직접 대면을 최소한으로 하면서도 귀족들과의 교류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최소한 어떤 사람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서신을 읽으며 확인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시카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사소하게 느껴졌다.
“나는 볼일이 있어서 나가니까, 쥴마가 수고 좀 해줘.”
그렇게 간단한 지시만 남기고 잔느를 불렀다. 당장 외출하겠다며 아시카가 앞장서자 잔느는 당혹스러워했다.
“호위 인원이 부족합니다. 둘 정도는 더 데려가겠습니다.”
“아니야, 잔느 하나로 충분해.”
아시카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툭 뱉었다. 이그레인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가 외출하는데 달랑 호위 기사 하나라니.
“아니면 리브론이라도 데려가시죠.”
“그럴 거면 그냥 혼자 나갈게.”
“아가씨!”
전에 없는 강경한 태도에 잔느는 더욱 난감해졌다.
아시카는 아랫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정해진 틀을 벗어나지 않아서 모시기 편한 주인이었다. 그런 아시카가 변했다.
잠시 침묵하던 잔느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마차, 준비하겠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바이리드 거리로 가자.”
바이리드 거리는 고가의 사치품을 취급하는 상점들이 밀집된 곳이다. 그러나 공작가와 같은 고위귀족은 판매상들이 저택으로 방문하기 때문에 아시카가 직접 갈 이유가 없었다.
의문 어린 표정도 잠시, 잔느는 묵묵히 아시카의 뒤를 따랐다.
* * *
늦은 오후, 아시카는 수도에서 가장 큰 보석상에 들어섰다. 3층 규모의 건물 전체가 보석 전시장과 세공사의 작업실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아시카는 잔느에게 기다리라고 한 뒤 점원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습니까?”
“좀 특이한 보석을 찾고 있어. 청보라색 원석으로 가공된 것이 있을까?”
아시카의 옷차림은 수수했지만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품위와 하대가 익숙했다. 점원은 상대의 신분을 가늠하다가 고개를 조아렸다.
“물론이죠.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점원은 아시카를 전시실로 안내해 이런저런 보석들을 꺼내 보였다.
청보라색을 지닌 원석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다양한 재질에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그녀가 지닌 것과 비슷한 종류는 없었다.
내심 기대하고 왔던 아시카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원석의 종류는 이게 다인가?”
“보석으로 사용하는 것 중 저희 상점에 없는 종류는 없습니다. 그게 아니면 그저 돌멩이에 불과한 희귀 원석이겠지요. 말씀하신 색 말고 다른 특징은 없습니까?”
“음, 투명하긴 한데 금속성 빛이 나.”
“금속성 빛이요?”
“은색의 느낌이지만 섞여 있지는 않아.”
점원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 얼굴이었다.
“어디서 보셨습니까? 혹시 견본이 있다면 제가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만.”
아시카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부친이 신신당부한 물건을 아무 데서나 꺼내 보일 수는 없는 노릇. 아시카가 말을 삼키자 점원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더는 얻을 정보가 없다고 판단하고 아시카는 상점에서 나왔다. 그 뒤로 거리에 있는 보석 상점을 모두 돌아다니며 자신의 것과 유사한 보석이 있는지 확인하고 다녔다.
바이리드 거리에서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자 마차를 타고 다시 팜레드 거리까지 이동했다. 해가 진 뒤 한참이 흘렀지만 아시카는 지치지도 않고 거리 곳곳을 누볐다.
묵묵히 뒤따르던 잔느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잔느의 시선을 따라 아시카도 어두워진 하늘을 보았다.
묵직하게 깔린 구름 사이로 붓으로 그려 넣은 것처럼 곱게 휘어진 그믐달이 보였다. 회색 구름은 희미한 달빛을 집어삼킬 것처럼 달을 에워싸고 천천히 흘렀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서늘한 한기가 느껴진다. 등골이 오싹할 만큼 전신을 휘감는 감각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코끝에 스치는 향기는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아시카는 화드득 놀라 망토를 움켜쥐었다. 뭐에 놀랐는지도 모른 채.
“잔느?”
아시카는 제 뒤를 확인하고 황망한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