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5화 (15/153)

#15.

코랄은 이미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허옇게 눈을 까뒤집었다. 뭉개지다시피 피떡이 되어버린 얼굴에서는 피가 튀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멈추지 않았다. 당장 숨통을 끊어놓을 것만 같은 살기가 폭주했다.

진짜로 죽여버릴 셈이었다. 새파란 불꽃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산채로 찢어발길 것만 같은 무자비한 힘으로.

적어도 아시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안돼! 르쉬아!”

아시카는 한달음에 달려가 드루쉬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코랄은 후작가의 적자였다. 아무리 화가 나도 마음대로 해칠 수 없는 상대. 이대로 드루쉬아의 손에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후폭풍이 따라올 것이다.

드루쉬아는 제게 매달린 아시카를 발견하고서야 주먹질을 멈췄다.

“후우.”

불똥이 떨어질 것만 같았던 푸른 눈동자가 하늘로 향했다. 채 덜어내지 못한 분노를 삭이는 양. 폭주하던 살기가 일시에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얼굴은 더없이 차게 굳어졌다.

드루쉬아는 피범벅이 되어버린 손을 털어내며 아시카를 돌아보았다.

“이성을 잃은 사내새끼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야. 레이디 이그레인.”

그러니 사람대접이 아니라 짐승 새끼로 대접해줘야지.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시카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가 기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과격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내 실수야. 이곳이 레이디에게 위협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아가씨!”

뒤늦게 소란을 듣고 달려온 쥴마가 바닥에 널브러진 코랄과 피가 튀어 엉망이 되어버린 드루쉬아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뒤이어 달려온 기사들을 보고 드루쉬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경계근무 똑바로 안 해! 쥐새끼가 숨어든 걸 어떻게 아무도 몰라!”

쩌렁쩌렁한 고함에 아시카는 화들짝 놀라 드루쉬아에게서 떨어졌다.

“아니, 어떻게… 이쪽에는 담장밖에 없는데….”

“사전 점검 철저히 하라고 했잖아!”

“어제 오후에 별장 안팎을 확인했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아마도 코랄은 그 이후에 숨어든 모양이었다. 매년 협의가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봤기에 틈을 노린 것이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아시카는 황망하게 서 있는 이그레인의 기사들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잔느, 오클레인 공자를… 데리고 가.”

“아니, 내가 데려가지. 내 손에서 시작했으니 내가 끝내야 하지 않겠어?”

드루쉬아의 제안에 아시카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뭘 끝내겠다는 말인지 등골이 다 오싹했다.

“아뇨. 오클레인 공자는….”

놀란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면서도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 어조는 분명했다.

“이그레인 소유의 별장에 무단 침입해서 저를 공격했어요. 제 기사들이 막으려다 벌어진 일이에요. 수습도 저희 쪽에서 해야 옳아요.”

아시카와 코랄의 문제이며 이그레인 공작가와 오클레인 후작가의 문제였다. 거기에 탈리온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

무슨 말인지 드루쉬아도 이해했다. 하지만 수긍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차게 굳어버린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데려가서 어쩔 셈이지? 귀족원에 고발이라도 할 건가?”

아시카의 시선이 기절한 코랄에게로 옮겨갔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위협하던 남자가 허망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 쓰러져있었다.

‘고발이라니.’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자신이 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런 일까지 벌어진 걸까.

“그냥 저는…. 모르겠어요. 아뇨. 고마워요.”

아시카는 떨리는 음색을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아가씨!”

드루쉬아는 반사적으로 아시카를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그가 내민 손이 채 닿기도 전에 잔느가 그녀를 잡아주었다.

아주 잠시 드루쉬아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허공에 멈춘 자신의 손을 보며 깨달았다.

그가 아시카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정원에 발을 들인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그렇다고 아시카의 산책을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다. 둘이 사이좋게 산책할 사이도 아니었고.

그러나 아시카의 비명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고 말았다.

가녀린 몸뚱이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다른 사내에게 깔린 것을 발견했을 때, 분노로 시야가 붉게 변해버리는 착시를 느꼈다.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코랄을 바닥에 짓뭉개고 있었다. 진심으로 죽여버리고 싶었다. 오로지 살의 외에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시카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코랄의 숨통을 끊어놓았을 것이다. 그러고도 후회하지 않았으리란 생각은 추측이 아닌 확신에 가까웠다.

피범벅이 되어버린 드루쉬아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것은 아시카의 문제였고 이그레인의 일이었다. 자신은 그런 이그레인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탈리온일 뿐이고.

‘제기랄.’

당연한 사실이 오늘따라 미치도록 속을 긁어내린다. 그렇게 놀라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여자가 안쓰러웠다. 충격받은 순간에조차 다음에 벌어질 문제를 생각하고 드루쉬아를 막아냈다.

울화가 치밀었다. 파리하게 질린 아시카의 얼굴을 보면서, 그런 여자를 부축해주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등 돌리고 멀어지는 여자를 잡을 수 없다는 현실에 숨이 막힐 만큼 심장이 조여왔다.

* * *

어떻게 저택까지 돌아왔는지도 아득하다. 드루쉬아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정신이 없었다.

시야를 가득 점령한 웅장한 저택을 보고서야 아시카는 마차를 멈추게 했다. 아직 본채까지는 거리가 남아있었다.

“아가씨?”

“코랄에게 의원을 보내고 조부님께 상황을 말씀드려. 내가 고발할 의사가 없다는 것도 전해주고.”

코랄을 저택으로 들일 수는 없어서 감시할 기사들을 대동해 다른 곳으로 보냈다. 깨어나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지만 저지른 짓이 있으니 섣부르게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좀 더 있다가 들어갈게.”

“아가씨께서도 의원을 만나는 게 좋겠습니다.”

잔느의 시선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오는 내내 아시카는 뻣뻣하게 굳어진 채 자리를 지켰다. 앉은 채로 기절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니야. 먼저 들어가. 난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

아시카의 머리칼과 옷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대로 사용인들과 마주쳐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아시카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잔느는 뒤따라 온 기사들을 향해 지시했다.

“너희들이 아가씨를 모시고 오도록 해.”

그러나 아시카는 고개를 저으며 그마저도 거절했다. 지금은 저를 지켜주는 기사들의 시선조차 부담스러웠다.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제가 있겠습니다.”

어디선가 들려 온 묵직한 음성에 모두의 시선이 움직였다. 허름한 작업복에 모자를 쓰고 멀찌감치 서 있는 사람은 저택의 정원사였다.

그는 모자를 벗어 손에 들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부즈리입니다, 아가씨.”

초로에 가까운 정원사 부즈리는 이 저택에서 가장 오래 일한 사람 중 하나였다. 듣기로는 아시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하던가.

“괜찮으시겠습니까?”

잔느의 물음에 아시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 기사보다 연로한 정원사가 더 편하다는 아시카에게 잔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뒤 나머지 기사들을 이끌고 자리를 떠났다.

아시카는 멀어지는 기사들을 보며 멍한 얼굴이 되었다.

소원했을지언정 약혼자였고 원래대로면 남편이 될 사람이었다. 피하고 싶었던 결혼이지만 이런 식으로 끝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조심스러웠던 아시카의 태도를 이해하고 기다려줬더라면 두 사람은 별 탈 없이 부부가 되었으리라. 그러나 코랄은 경솔하게 침대로 여자를 끌어들여 아시카를 모욕하고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아니 불명예가 문제가 아니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배신감. 비록 마음을 나누지는 못했어도 서로에게 최소한의 신뢰는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착각이었다.

사랑한 것도 아닌데 심장이 욱신거리고 속이 쓰리다.

“저… 아가씨.”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아시카의 상념을 깨웠다.

“여쭤볼 것이 있는데, 지금 말씀드려도 될까요?”

부즈리의 목소리는 예의 바르면서도 친근했다. 그 느낌이 싫지 않아서 아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만 이쪽으로. 정원 구석에 덤불이 많이 올라왔길래 정리 중이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시카는 멍한 얼굴로 부즈리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산책로에서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정리되지 않은 넝쿨이 옷깃에 걸려 걷기가 불편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재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리고 부즈리가 멈춰 섰다.

“여기 좀 보십시오.”

정원사는 가슴높이 정도의 나무에 엉겨있는 덤불을 헤치고 아시카에게 손짓했다.

걸음을 내디딜 수도 없을 만큼 빡빡한 공간. 아시카는 부즈리가 가리킨 곳을 보기 위해 엉거주춤 상체를 숙였다.

“새 둥지?”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재재거리는 요란한 소리는 둥지에서 오글거리는 새끼들의 소리였다.

“이 일대의 덤불을 모두 정리할 예정이었는데, 일하다 보니 새가 둥지를 틀었지 뭡니까. 그래서 새 둥지를 옮겨야 할지, 아니면 작업을 중단해야 할지 결정을 못 하던 중이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새 둥지였다. 불과 손가락 하나 크기밖에 되지 않는 작고 여린 것들이 요란하게도 울어댄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빽빽 울며 주위를 맴도는 새가 있었다.

“저게 어미 새야?”

“그런 모양입니다. 제 새끼들을 해코지할까 봐 겁먹은 게지요.”

“아아… 그래….”

아시카의 대답은 어딘지 모르게 맥이 빠져있었다.

살아있는 공예품처럼 섬세하고 여린 새들이었다. 저 작은 것들조차 요란하게 울어대며 자기 존재를 주장한다.

아시카의 목에서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찌를 듯이 요란하게 울어대는 어미 새도, 둥지 안에서 버둥거리는 어린 새들도 시야에서 흐려졌다.

투둑, 툭.

덤불 잎사귀 위로 짙은 얼룩이 번져간다. 왈칵 쏟아져나온 눈물은 이제야 때를 만난 양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부즈리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 덤불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바삭, 파사삭. 천연덕스러운 일상의 소리가 잔뜩 경직되어 있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무도 찾지 않을 장소에서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아시카는 마음껏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주변이 제법 휑해진 것을 느꼈다.

부즈리는 평소처럼 차곡차곡 덤불을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아시카는 눈물 젖은 얼굴을 닦아내고 목을 가다듬었다.

“큼, 음. 부즈리.”

“네, 아가씨.”

“여기.”

가다듬어도 막 울음을 그친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아시카는 자신이 헤집어둔 덤불을 슬쩍 올리며 둥지를 가렸다.

“내버려 둬. 제집이랑 새끼를 누가 가져가면 어미 새가 얼마나 놀라겠어.”

“그럼 이 나무만 두고 나머지는 정리하겠습니다.”

“혹시 고양이가 들어오지 못하게 가시울타리 같은 거라도 쳐두면 더 좋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즈리는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수고해.”

“들어가십시오.”

아시카는 민망한 얼굴을 감추며 걸음을 서둘렀다. 언제 흔들렸냐는 듯 나붓한 걸음으로 산책로를 걸었다.

부즈리는 멀어지는 아시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어깨가 안쓰러운 사람. 부친의 품에서 어리광 부리던 여덟 살 소녀는 어느 날 갑자기 혼자가 되었다.

아시카는 부친을 잃어버리고 슬퍼할 틈도 없이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막중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채찍질 당하며 가신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조부의 곁을 지키며 가신들을 이끌고 저택을 나서던 소녀를 기억한다. 하얗게 질려 당장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어느 귀족 레이디보다 더 꼿꼿한 걸음으로 나아가던 소녀를.

“언제나 마음 편히 울어보실까.”

부즈리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너무 올곧게 자라서 안쓰럽기만 하던 소녀가 이제는 부디 편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파혼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두 가문이 맞물려 있던 사업 대부분을 정리하고, 위자료를 받는 대신 사업계약 파기의 손실을 오클레인 후작가에 넘기는 것으로 합의를 마쳤다. 이건 아시카가 조부에게 요구한 일이었고 웨이브도 동의했다.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는데 열흘이 걸렸다.

마침내 감금에서 풀려나 저택을 떠나는 날, 글레노아는 어떤 감사의 말이나 사과도 전하지 않았다.

얼마나 정성 들여 보살펴 줬든지 간에 글레노아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잡혀있었다. 그러니 인사 따윈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저택을 나서면서 불편한 마음은 불안감이 되었다. 분명 코랄에게 오늘 떠난다는 말을 전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마중 나온 이도 없고 마차도 보내주지 않았다.

글레노아는 다시금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아닐 거라고. 저 못된 여자가 코랄에게 아무것도 전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녀는 공작저에서 빌려주는 마차를 타고 저택을 떠났다.

아시카는 글레노아가 떠나는 것을 보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간의 일을 생각하면 몸서리쳐지도록 싫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앞으로 글레노아의 삶이 녹록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미움조차 부질없게 느껴졌다.

얼마 뒤 후작가에서 글레노아에게 집과 하녀를 제공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중심가에서 떨어진 곳이지만 제법 괜찮은 저택이었다.

하지만 코랄이 그 집을 드나든다는 소문은 없었다. 과연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남자였다. 후작가 또한 아들이 저지른 일을 뒷수습하느라 마지못해 머물 곳을 마련해 준 모양이었다.

불과 한 달이 지나기 전에 글레노아 슈베른은 제 발로 수도를 떠났다. 아이가 유산되어 요양한다는 핑계를 대고.

코랄 역시 쫓겨나다시피 수도를 떠나 오클레인 영지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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