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예산안 산출해놓은 자료는 받아 봤겠지?”
드루쉬아는 자리에 앉자마자 칼프가 건네는 서류를 아시카에게 툭 밀었다.
“비용을 빠듯하게 잡으셨더군요. 우리 쪽 조사관 자료는 좀 달라요.”
아시카는 서류를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쪽에서 돈을 너무 많이 들이는 거야. 비용을 줄이려는 거잖아.”
“터무니없이 적게 잡아놓고 우리 쪽에서 다 부담하라는 말이죠?”
“그 정도면 이그레인에게는 새 발의 피도 안될 금액 아닌가?”
아시카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작년에 임시 주둔지의 기초 공사 비용도 저희 쪽에서 부담했어요. 벌써 잊은 건 아니죠?”
“내가 어디 날로 먹었나? 이그레인 측 고용 기사들의 수가 부족해서 우리 병력을 추가로 차출했던 건 까먹었어?”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하지만 양측의 충돌이 심해서 약속한 기간의 절반도 못 채우고 돌아갔다.
“번갈아 가면서 공동으로 사용할 건물이에요. 우리가 확장 비용을 모조리 부담할 수는 없어요.”
“대신 건물 소유권을 가져가잖아.”
“탈리온 공작님.”
드루쉬아의 뻔뻔한 대꾸에 아시카의 목소리가 차게 가라앉았다.
어차피 주둔군 거주를 위한 건물이었다. 땅의 소유권이 황명으로 동결되었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권리였다.
“그럼 이렇게 하지.”
드루쉬아가 마지못해 물러나는 기미를 보이자 아시카는 긴장했다. 언제나 이다음부터가 진짜였다.
‘또 뭘 털어먹으려고.’
드루쉬아는 꼿꼿하게 앉아있는 아시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차게 굳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긴장한 검은 눈동자는 순하디순한 느낌이었다.
진한 먹색의 머리칼에 살아있는 보석처럼 새카만 눈동자.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선명한 색채가 불현듯 드루쉬아의 시선을 점령한다.
“공작님?”
좀처럼 채근하는 법이 없던 여자가 불쑥 말을 재촉했다. 드루쉬아는 손으로 제 목깃을 당겼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서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비용산출은 양쪽 조사관이 만나서 조율한 뒤에 새로 보고를 올리라고 하지. 공사비는 그쪽 말대로 반반 부담. 대신에.”
드루쉬아가 손짓하자 칼프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어 건넸다.
“이번 동절기 보급품은 이그레인이 책임지는 거야. 어때?”
아시카는 제 앞에 내밀어진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사병을 유지하는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건물은 지으면 남는 거라도 있지만 병사들을 먹이고 입히는 비용은 사라지는 돈이었다. 그것도 제 병사들이 아닌 탈리온의 병사들을.
그러나 이그레인에게 넘쳐나는 것은 재력이었고 탈리온에게 넘쳐나는 것은 병사들이었다. 협의는 언제나 그 양쪽의 균형을 맞추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좋아요.”
아시카는 굳이 서류를 확인하지 않았다. 보급품의 물량은 이미 알고 있었고 특별히 달라진 적은 없었다.
‘두고두고 시달리느니 적당히 맞춰주는 게 낫지.’
그보다는 이 자리에 오래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대화하는 내내 끈질기게 달라붙는 푸른 눈동자가 평소보다 집요하게 느껴진 탓이다.
아시카는 테이블 옆에 벗어두었던 얇은 장갑을 손에 쥐었다. 협의를 마무리하고 싶다는 조급함이 저도 모르게 드러났다.
“이대로 협의서를 작성해서 보내주세요.”
“서류 확인 안 해?”
“주둔군 병력이 갑자기 늘어날 리는 없잖아요. 해마다 확인한 내용인걸요.”
선선히 수긍하는 아시카를 보며 드루쉬아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렸다.
‘그 똑같은 내용을 해마다, 철마다 꼬박꼬박 다 확인했으면서.’
그동안은 단어 하나, 숫자 하나까지 직접 확인하겠다며 몇 시간이고 기다리게 하지 않았나.
“또 수정사항이 생기면 어쩌려고? 날 귀찮게 오라 가라 할 셈인가? ”
“보좌관은 뒀다가 뭐에 쓰시게요? 소소한 일로 불러내지 않을 테니 염려 마세요.”
“소소하다…, 라.”
느릿하게 말꼬리를 늘이는 것이 어쩐지 불안하다. 아시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기다리죠. 쥴마, 전부 기록했지?”
“네, 아가씨.”
있는 듯 없는 듯 옆을 지키고 있던 쥴마가 그제야 목소리를 내었다.
“먼저 준비한 서류에다 조금 전 협의한 내용 추가해서 문서로 작성해.”
아시카의 지시에 협의 테이블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양쪽의 보좌관이 옆방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고 아시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류작업 하는 동안 저는 잠시 산책을 다녀오죠.”
허락이 아닌 통보였다. 드루쉬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어쩐지 못마땅한 얼굴이 되었다.
“산책로가 별로 좋지 않을 텐데?”
“길 쪽은 정리해 둔 걸 봤어요. 탈리온에서 정원사를 보낸 게 아닌가요?”
“글쎄. 내가 시킨 일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군.”
드루쉬아가 아니라 그의 조부 네오렌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죽은 반느가 네오렌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고 아시카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오만하게 앉아있는 남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별장은 아시카가 유일하게 혼자가 될 수 있는 장소였다. 양쪽 기사들 누구도 별장 안에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다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라서 언제부턴가 협의장에 대동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별장 주변을 구역을 나눠서 지켰다.
이제 막 정오가 지난 시간. 아시카는 정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드루쉬아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정리된 곳은 건물 앞쪽뿐. 뒤쪽의 정원은 제멋대로 자란 잡목들이 정원수와 뒤엉켜 정글처럼 변해있었다. 아시카는 잠시 망설이다 걸음을 재촉했다.
‘응접실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제 모습이 어찌 보일까. 내내 그것이 신경 쓰였다.
“소문… 들었겠지.”
아시카가 약혼자와 파혼하기 위해 저지른 행각으로 온 수도가 들썩였다. 임산부를 강제로 억류한 무자비한 여자라는 비난과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동정여론.
아시카는 어느 쪽도 달갑지 않았다. 드루쉬아에게서는 더더욱 동정도 비난도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처럼 모른 척해 주는 것이 차라리 감사했다.
‘잠깐만?’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급하게 파혼을 밀어붙이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 하나.
‘레이디 슈베른을 연회에 데려온 사람이 탈리온의 보좌관이잖아?’
드루쉬아의 보좌관인 칼프 크라우니 남작. 당시에는 놀란 나머지 글레노아와 동행한 남자가 칼프라는 사실도 지나치고 말았다.
‘둘이 무슨 사이라도 돼?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양철 인형이라는 소문이 돌 만큼 인간미가 없기로 유명한 보좌관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렇다고 이유를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드루쉬아나 그 보좌관에게서 제 파혼과 관련된 어떤 말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아시카는 생각에 빠져있느라 옆에서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갑자기 오싹한 기분을 느꼈을 때 시야가 확 뒤집혔다.
“악!”
반사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커다란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동시에 떠밀리다시피 뒤로 팽개쳐졌다.
바닥에 어깨가 부딪히며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느끼고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상대는 호락호락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강한 힘이 드레스 자락을 확 잡아채면서 몸이 뒤로 끌려갔다.
“아악! 놔!”
아시카는 상대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몸이 획 돌아가며 나무 기둥에 부딪혔다.
양팔을 꽉 잡힌 채 상대의 얼굴을 마주하자 두려움과 분노가 함께 치솟았다.
“오클레인 공자!”
“네, 접니다. 레이디 이그레인.”
팍 쉬어버린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흘러나왔다.
“내가 몇 번이나 서신을 보냈는지 압니까? 내가 당신을 만나려고 몇 번이나 공작님께 사정했는지 아십니까?”
“이미 제 손을 떠난 문제예요. 왜 이렇게 됐는지는 공자께서 더 잘 알잖아요.”
“누구 마음대로!”
새빨갛게 핏발 선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흉흉했다.
코랄의 머리칼은 이슬에 젖었고 언제나 단정했던 옷차림은 흐트러진 채 낙엽과 풀 잎사귀가 붙어 있었다. 여기에서 머문 시간이 짧지 않았다는 말이다.
“파혼이라니요? 당사자인 나와는 일언반구 의논도 없이 파혼이라니 말이 됩니까?”
“우리가 이제 와서 얼굴 맞대고 작별 인사할 사이인가요? 어차피 정략도 파혼도 계약으로 시작해서 계약으로 끝나는 관계잖아요. 양쪽 가문의 합의도 거의 끝났다고 들었어요.”
“2년씩이나 사람을 농락해 놓고 발을 빼시겠다?”
코랄은 흉흉한 적의를 드러내며 비아냥거렸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적반하장인 태도에 아시카는 두려움보다 분노가 일었다.
“저를 농락한 건 오클레인 공자예요. 약혼녀를 두고 정부를 만든 것도 모자라 내가 후계자를 얻으려면 따로 정부를 얻어야 한다고 했다죠?”
코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갔다. 순간 어깨를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아시카는 코랄의 팔을 잡아채면서 있는 힘껏 물어뜯었다.
“으아악!”
아시카는 온몸으로 코랄을 밀어내며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시야가 뒤집히고 어디가 어딘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신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무작정 몸을 일으켰다.
저도 모르게 쏟아낸 분노 뒤에는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핏발선 눈으로 달려드는 상대는 그녀가 알던 귀족 공자가 아니었다.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겁에 질려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만 남았다.
‘어떻게 해. 어떻게….’
채 세 걸음도 내딛기 전에 우악스럽게 달려드는 손이 아시카의 팔을 낚아챘다.
“놔!”
그녀가 코랄에게 잡혀 끌려가는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코랄을 덮쳤다.
“커헉!”
격한 충돌음과 함께 코랄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를 잡고 있던 힘이 떨어져 나가면서 그대로 다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아시카는 쓰러진 상태에서도 도망치기 위해 팔다리를 휘저었다.
퍽, 퍽.
문득 등 뒤에서 울리는 둔탁한 소음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뭐….”
뒤를 돌아보자 조금 전까지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던 코랄이 바닥에 깔려 정신없이 얻어터지고 있었다. 코랄을 깔아뭉갠 남자는 인정사정없이 맨주먹을 휘둘렀다.
아시카는 경악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탈리온… 공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