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모든 일이 순식간에 진행되어서 글레노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억지로 입에 물렸던 재갈이 풀리고 기사들이 그녀를 놓아줬을 때는 이미 낯선 방으로 끌려온 뒤였다.
한 무리의 여자들이 들어와 그녀를 제압하고 진료한 뒤에 또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 뒤에 하녀가 식사를 가져왔지만 글레노아는 손대지 않았다. 약이라고 하면서 건네준 새카만 액체를 확인했을 때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글레노아는 제 앞에 내밀어진 잔을 단숨에 팽개쳤다.
챙그랑.
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검은 액체가 쏟아졌다. 약을 가져왔던 마릴린의 얼굴이 구겨졌다.
“세상에, 저택에서 관리하는 약재를 쓴 건데. 이게 얼마짜리 약인 줄 알아요?”
“거짓말하지 마! 배 속 아이를 해치려는 거잖아!”
“무슨 소리예요? 이건 공작가 주치의가 임산부용으로 직접 처방해서 내린 안정제에 보신용 약이라고요!”
“안 믿어! 이그레인인지 소공작인지 나하고 아기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아, 진짜.”
마릴린은 욕설이 튀어나오는 걸 참으며 잔을 줍고 면포로 바닥을 닦아냈다. 매섭게 구는 글레노아에게 화가 나지만 그녀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최측근 하녀인 마릴린조차 아시카가 무슨 생각으로 이 여자를 데려왔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내연녀가 약혼자의 애를 임신했는데 데려와서 보신약까지 해 먹여? 당장 경을 치지는 못할망정. 아휴.’
평소에도 속을 알기 어렵던 주인이지만 이번에는 특히나 심했다.
“퍽 요란하구나.”
문득 등 뒤에서 들려 온 목소리에 마릴린이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제가 약을 쏟은 게 아니라….”
“들었어. 설명하지 않아도 돼.”
“저, 약은 어떻게 할까요? 다시 올릴까요?”
아시카는 마릴린의 손에 들려있는 잔을 내려다보았다. 값비싼 은잔은 바닥에 부딪혀 모서리가 찌그러졌고 그 너머에는 성난 들고양이처럼 발톱을 곤두세운 여자가 있었다.
‘저렇게 예민하게 굴면 안 좋을 텐데.’
글레노아를 걱정해서는 아니었다. 아시카는 그녀보다 배 속의 아이가 더 걱정되었다.
‘이게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성난 여자를 다독일 필요가 있었다. 아시카는 글레노아를 자극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약은 내일 다시 들여오고. 지금은 자리를 비켜주면 좋겠구나.”
아시카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녀에게 조곤조곤 축객령을 내렸다.
마릴린이 방에서 나간 뒤 글레노아는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났다. 등 뒤에 있는 것은 화려한 침대였다. 이 방 전체가 그녀가 살면서 머물렀던 그 어떤 공간보다 크고 값비싼 장식으로 채워져 있었다.
“여긴 손님용 방이야. 휴식보다는 공작가의 위세를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진 방이지. 아마 가만히 있어도 짓눌리는 기분이 들 거야.”
“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네 주제를 알라고.”
차디찬 독설이 비수가 되어 날아든다. 글레노아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아시카의 표정은 시종일관 평온했다. 처음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평정이 깨어지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어요. 귀족의 처벌은 개인이 함부로 할 수 없잖아요.”
“개인이 아니라 이그레인 공작가지. 네가 감히 온몸으로 뛰어들지 않았니?”
“나, 난 아무것도 안 했어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글레노아는 불안한 얼굴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발뺌할 줄 알았다는 듯 아시카는 그저 말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모욕을 당했다는데 누가 아니라고 할까. 누가 감히 이그레인의 주장에 토를 달 수 있겠어. 안 그러니? ”
“그, 그런….”
글레노아는 만만하게 생각했다. 저보다 작은 체구의 여자는 소공작이라는 신분보다 그저 가녀린 귀족 레이디로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야 알겠다.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라는 위치가 얼마나 막강한 것인지를.
“내가 너를 해코지하려고 여기 끌고 왔다고 생각하지?”
“그럼 아닌가요?”
겁에 질린 상태에서도 목소리는 앙칼졌다.
참으로 어리석은 여자였다. 그러니 이런 엄청난 짓을 벌였을 테지만.
생각같아서는 글레노아가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게 내버려 두고 싶었다.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될 때까지. 그러나 배 속의 아이는 글레노아뿐 아니라 아시카에게도 중요했다.
‘겁에 질려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곤란해.’
그것이 불과 며칠뿐이라 해도.
“나는 진작부터 파혼하고 싶었어. 하지만 별문제가 없는 한 가문 간의 결합은 깨기가 쉽지 않아.”
놀란 글레노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아무리 그래도 2년이나 이어온 약혼이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겁에 질린 얼굴에 슬금슬금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레이디 슈베른. 지금 상황이 너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해?”
“네?”
글레노아는 바보처럼 되물었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시카의 기분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굳이 제 입으로 말하자니 입안에 쓴맛이 돈다.
‘이건 뭐, 적이라고 할 만해야 미워하든 적의를 불태우든 하지.’
상대는 탐욕에 눈이 멀어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할 어리석은 여자일 뿐이었다.
“지금 너에게 위험한 건 파혼을 원하는 내가 아니라 다른 쪽일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거짓말! 귀족들이 자기 혈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어요.”
아시카는 이제 안쓰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이 순진한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싶은 얼굴이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그것도 후계자의 아이일 때나 해당하는 얘기지. 이미 사생아가 있는 미혼 귀족을 어디에 써먹겠니? 혼맥 시장에서조차 쓸모가 없어지는데. 아니면 설마 네가 정부인이 될 거라고 믿은 거야?”
글레노아가 움찔하며 아시카의 시선을 피했다.
“오클레인 공자에게 내려질 작위를 기대했나 보구나.”
백작의 작위라면 퍽 대단하게 여겨질 만하다. 글레노아가 어떤 계산으로 코랄의 정부가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시카는 다소 지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클레인 후작가는 차남에게 작위 외에 아무것도 내주지 않겠다고 공언했어. 그러니 오클레인 공자가 받을 거라고는 영지도 없는 이름뿐인 작위야.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어? 변방에 영지를 가진 남작보다도 못한 작위라고.”
그래서 코랄은 영지를 받는 조건으로 이그레인에게 충성맹세를 하기로 했었다. 물론 그것도 대리인의 자격일 뿐 결국은 이그레인 공작가에 귀속되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네게는 꽤 괜찮은 결혼 상대로 보였겠지. 그런데 반대로 오클레인 공자가 보기에는 어떨까? 이름뿐이라도 백작위를 가지고 비싼 혼처를 구할 수 있었던 오클레인 공자는 하루아침에 혼맥 시장에서 가치를 잃어버렸어. 너 하나 때문에.”
글레노아가 뺏으려던 남자는 허울 좋은 껍데기였을 뿐이다. 이그레인을 등에 업었을 때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네가 사랑 운운하는 남자가 그런 놈이었어. 이그레인 공작가도 손에 쥐고 연애는 연애대로 하고. 참 욕심 많은 쓰레기였지. 그런데 이 결혼이 깨지면 그놈이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해?”
글레노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아시카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지금 걱정해야 할 건 너와 네 배 속의 아이라고.”
현실을 일깨우는 차디찬 선고.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글레노아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살갑게 제 비위를 맞춰주던 남자의 얼굴과 잠자리 후 꼬박꼬박 약을 먹이던 차가운 표정이 머릿속에서 교차한다.
“이제 알겠지? 나는 파혼을 진행하려면 너와 네 아이가 필요해. 그때까지 어떻게든 널 보호할 거고.”
“그런 식으로 꾀어내봤자….”
글레노아는 끝까지 아시카의 말을 부정하려고 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아시카는 재차 못 박았다.
“시위하겠답시고 식사를 거른다거나 패악질 부릴 생각은 하지 마. 네가 가진 유일한 패가 배 속의 아이야. 아이가 잘못되면 끈 떨어진 연이라는 거 알지? 잘 먹고 잘 쉬고 있으렴.”
글레노아의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자신의 판단 착오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가늠하느라.
그것은 글레노아가 온전히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다. 아시카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 호의도 분에 넘치지.’
글레노아가 내뱉었던 망발을 생각하면 홀랑 벗겨 알몸으로 쫓아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동정할만한 가치도 없지만 아무리 부모가 쓰레기라도 배 속의 아이에게는 죄가 없지 않은가.
아시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나섰다.
* * *
공작의 집무실 밖에서 아시카는 몇 차례 숨을 가다듬었다. 긴장하지 않으려고 애써도 움켜쥔 손에서는 땀이 배어 나왔다.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조부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은.
‘설마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결혼하라고 하실까.’
언제나 가문의 명예를 우선으로 하던 아시카가 공개적으로 일을 벌인 이유였다. 조용히 수습할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안돼.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어.’
자신이 문을 두드리면서도 그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긴장되었다.
“들어와.”
긴장된 와중에도 조부 웨이브의 목소리만큼은 뚜렷하게 귀에 박혔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환한 실내등 불빛이 아시카의 눈을 찔렀다. 어둠이 내려앉은 창문 앞에는 은회색 머리칼이 눈에 띄는 초로의 신사가 서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기둥처럼 단단해 보이는 노신사. 그가 아시카의 조부이자 제국의 네 개뿐인 공작가 중 하나인 이그레인의 주인이었다.
웨이브는 아시카를 보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침묵으로 압박해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내도록 종용하는 것이 그가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었다.
“조부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할 말이 있으니 여기까지 왔겠지.”
말 한마디 편하게 받아주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시카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몸에 바짝 힘을 주었다.
“이미 보고를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허, 하며 웨이브가 헛웃음을 흘렸다. 감정의 변화를 거의 드러내지 않던 그에게는 그조차 꽤 큰 반응이었다.
“보고를 받지 않아도 모를 수가 없겠더구나. 수도 귀족들이 아주 난리가 났어.”
웨이브의 목소리는 그가 내보이는 분노만큼이나 고요하고 차가웠다.
“이 결혼을 강행하는 것은 가문의 불명예입니다, 조부님.”
“가문의 불명예를 막고자 그리 큰 추문을 만들었느냐?”
모주의 궁전에서 공개적으로 일을 벌인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아시카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