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세상에, 코랄의 말이 맞았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저였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글레노아는 더욱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코랄은 저를 사랑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헤어질 생각이 없다고 제게 약속했고요.”
“푸흡.”
처음으로 아시카에게서 반응이 돌아왔다. 어이가 없는 듯도 했고 이걸 어쩌면 좋을까 난감하기도 한 웃음이었다.
아시카는 글레노아가 나타난 순간부터 긴장했다. 여자가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닌지. 공개적인 장소에서 어떻게 하면 추문에 휘말리지 않을지. 혹시 제 처신이 가문에 누가 되지는 않을지.
그러나 긴장되었던 것도 잠시뿐 지금 상황이 희극처럼 느껴졌다.
‘배짱이 대단하다 했더니 고작 와서 한다는 말이 사랑 타령이라.’
아시카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바람난 남자와의 사랑을 주장하는 글레노아가 마치 희극의 여주인공 같달까.
그 적나라한 시선에 글레노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가진 것 없는 여자가 사랑을 내세우니까 우스운가요? 아니면 코랄의 약속이 거짓처럼 보여요?”
글레노아는 코랄의 이름을 강조했다. 얼마나 친밀한 사이인지 강조하고 싶어서. 그러나 자신만만한 어조와 달리 늘어뜨린 양손이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글레노아의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돌았다.
몰락한 가문 출신이지만 글레노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그녀에게 매료되어 사랑을 속삭이고 구혼하던 수많은 남자들. 수도의 부호들과 귀족 공자들을 양손에 놓고 저울질하다가 택한 것이 코랄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여자가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자신이 더없이 하찮아지는 기분이었다. 사력을 다해 매달리는 자신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서.
“할 말은 그것뿐인가요?”
아시카의 어조는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상대를 깔아보는 것도 아니었고 비웃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변함없이 꼿꼿한 태도가 무너뜨릴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글레노아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한 걸음 더 아시카에게 가까워졌다.
“레이디 이그레인께서 석녀라고 소문난 거 알아요?”
아시카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동요가 일었다. 그것이 만족스러워서 글레노아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얼마나 몸서리쳐지게 싫으면 약혼 2년 동안 그이가 내버려 뒀을까.”
가만가만 속삭이는 목소리는 여전히 아름답고도 표독스럽다. 아시카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글레노아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설마 오클레인 공자가 만났던 여자가 레이디 슈베른 하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끝내 증거를 찾지는 못했지만 추측보다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 여자 저 여자 물고 빨고 다닌 입술이 더러워서 거부했지요. 오클레인 공자의 손만 닿아도 살이 썩어들어가는 기분이던데 레이디 슈베른은 용케 참을 만했나 봅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자그마한 입술에서 독설이 쏟아져나왔다.
“그런….”
글레노아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으득, 이를 갈더니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흉하게 일그러졌던 얼굴이 거짓말처럼 사르륵 풀어졌다.
글레노아는 가볍게 숨을 다잡더니 앉아있는 아시카에게 허리를 숙이며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요. 당신은 자존심을 챙겨요. 덕분에 내 배 속의 아이가 그이의 후계자가 될 테니까.”
아시카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고 말았다. 시종일관 평정을 유지했던 아시카조차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글레노아는 상체를 일으키며 득의양양하게 아시카를 내려다보았다. 슬며시 아랫배를 감싸 안는 태도가 과시처럼 보였다.
대대로 귀족들은 혈통을 중시했고 그것은 사생아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위 귀족일수록 혈족에 대한 집착은 더욱 심했다. 다만 불명예와 추문이 따라붙기에 귀족들은 정부를 두더라도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조심했다.
그러나 오만한 코랄은 그런 문제에 서툴렀다. 글레노아가 머무는 저택과 사용인 모두 자신이 보내줬기에 방심했다.
코랄은 글레노아에게 돈을 아끼지 않았고, 그녀는 선물 받은 보석으로 제일 먼저 하녀들을 제 편으로 만들었다. 잠자리 후 의무처럼 먹어야 했던 약차를 바꿔치기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비록 몰락했다고는 하나 글레노아는 귀족의 핏줄. 작위뿐이라도 코랄은 백작위를 받을 예정이니 저라고 백작 부인이 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거기다 코랄이 침대에서 속삭인 말들이 글레노아의 자신감을 부추겼다.
“그이는 당신에게 손끝 하나 대기 싫대요. 결혼해서 당신이 후계자를 얻고 싶으면 정부를 얻어야 할 거래요. 이그레인은 사생아에서 사생아로 이어지는 가문이 될 거라던데요.”
아시카의 온몸에서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조금 전까지 충격받았던 얼굴과 달리 아시카의 얼굴이 차게 경직되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하는 사실. 이는 아시카와 돌아가신 부친까지 모욕하는 발언이었다.
문득 글레노아는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내 배 속에 오클레인의 아이가 있는데 뭘 어쩌겠어.’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근거리에서 모두 들었을 잔느조차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아시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확연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뭐야, 이 여자.’
글레노아는 주춤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시카는 처음 대화를 시작했던 그대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글레노아에게 향한 시선은 기이하리만치 차고 담담했다.
아주 짧은 순간 아시카의 눈동자에 선명한 감정이 스쳐 갔다. 단숨에 상대를 낚아채는 사냥꾼의 그것처럼 흥분된 감정이.
“잔느.”
“네, 아가씨.”
“이 여자, 제압해.”
아시카의 입에서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기도 전에 잔느가 글레노아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게 무슨… 흡!”
잔느는 글레노아의 입을 틀어막고 단숨에 팔을 꺾어 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하는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같은 여자라고 잔느를 경계하지 않았던 건 글레노아의 실수였다.
“읍, 으읍!”
글레노아는 잔느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러나 잔느의 신호에 멀리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호위 기사들이 달려왔다.
아시카는 한 걸음 다가가 잔느에게 지시했다.
“손 치워봐.”
“이런 법이! …으읍!”
잔느가 입을 막았던 손을 치우자 아시카는 자신의 손수건을 거침없이 글레노아의 입에 쑤셔 넣어 다시 막아버렸다.
잔뜩 겁에 질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글레노아에게 아시카는 차게 선고했다.
“너, 고위 귀족 모독죄야.”
그 말을 내뱉을 때조차 아시카의 어조는 평이했다.
“우으… 으!”
평민이나 다를 바 없는 몰락 귀족의 딸과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 신분의 차이만 해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
글레노아가 귀족으로 제대로 교육받고 자랐다면 그 막강한 힘의 차이를 알았을 것이다. 차라리 평민으로 태어났다면 감히 넘볼 꿈조차 꾸지 못했을 테고.
그러나 어정쩡한 귀족의 지위와 후작가의 아들이라는 어정쩡한 뒷배. 그것이 부추긴 달콤한 환상은 꽤 유혹적이었으리라.
아시카는 글레노아를 내려다보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배 속의 아이가 너를 지켜주지는 않아. 귀족이면서도 귀족의 생리를 그렇게 모르겠니? 네가 조금만 주제 파악을 했더라면 너도 아이도 편했을 텐데.”
안타깝지만 글레노아는 여자로서 받을 수 있는 동정조차 스스로 내쳐버렸다. 모두 본인이 자초한 일이었다.
순찰을 돌던 궁전의 기사들이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리고 달려왔다. 덩치 큰 기사들이 다가오는데도 아시카는 움츠러드는 기색조차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레이디….”
“이그레인 공작가는 레이디 슈베른을 고위 귀족 모독죄로 고발할 것이네. 헌데 레이디 슈베른이 지금 임신 중이라 아무 데나 둘 수가 없어. 보호 차원에서 이그레인 저택으로 데려갈 테니 고발에 따른 절차는 공작저로 연락하도록.”
“이그레인 소공작님?”
상대는 아시카의 신분을 알아보고 놀랐고, 눈앞에 잡혀있는 여자가 임신 중이라는 말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불과 두 달 뒤에 결혼할 예정이었던 이그레인 소공작과 임신한 레이디와의 다툼이라니.
그러나 아시카의 서늘한 어조에 기사들 중 누구도 감히 안된다고 나서지 못했다. 막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아시카는 가문의 기사들을 향해 지시했다.
“저택으로 데리고 가. 임산부니까 조심하고.”
“으읍! 읍!”
글레노아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건장한 기사들의 힘을 귀족 레이디가 당해낼 수는 없었다.
어느새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아시카는 천천히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황궁이 아니기를 천만다행이지.’
그랬다면 이렇게 납치하듯 사람을 끌고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궁전의 기사들은 글레노아가 거의 들린 채 끌려가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이그레인 공작가의 일행들은 준비되어 있던 마차 와 함께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이날 이그레인 소공작의 약혼자에게 내연녀가 있었다는 사실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거기다 내연녀가 임신중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까지.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그레인 소공작이 처음으로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