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접촉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동안 코랄은 철저히 예의를 지켜왔다.
아시카가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코랄은 몸을 더욱 밀어붙인 채 분노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선을 그어놓으셨는지.”
아시카는 그를 만나는 자리에서 한 번도 머리를 늘어뜨리거나 편한 옷차림을 한 적이 없었다.
차마 손대기 어려울 만큼 완벽한 머리 스타일과 옷차림. 그것이 아시카의 심리적인 거부감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저도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약혼녀를 2년씩이나 내버려 둔답니까?”
“놔 주세요. 할 말이 있으면 맨정신으로 하시죠.”
“저는 지금 지극히 맨정신입니다, 레이디 이그레인.”
“예의 없게 이게 무슨 짓인가요?”
“제 열정이 과해서라고 이해해주세요. 꼬박 2년 동안 마음에 품었습니다. 결혼식 날짜가 잡혀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오래 기다리지도 못했을 겁니다.”
“하, 무슨….”
“거짓말 같습니까? 제가 진심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
코랄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아시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노와 열기를 담은 눈동자가 전에 없이 사나웠다. 처음으로 그 안에 숨겨진 어둡고 질척한 감정을 마주하고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뭐, 뭐야.’
여기는 공공장소였다. 커튼 너머 문 하나만 넘어가면 수도의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는 연회장 안. 설마하니 코랄이 이런 곳에서 그녀를 어쩌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뒷덜미를 움켜쥐는 강한 힘을 느끼고 아시카는 얼어붙었다. 언제부턴가 그녀가 거부하면서 입맞춤조차 하지 않게 된 지 오래되었다.
“놔요. 밖에 사람들이 있어요.”
“그렇죠. 밖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리라도 지르시면 꽤 재미난 상황이 벌어질 겁니다. 황태후의 연회에서 레이디 이그레인과 약혼자가 엉겨 붙어 있다가 품위 없이 싸우더라면서.”
술 냄새가 섞인 습한 숨결이 다가왔다. 몸을 짓누르는 무게와 그녀를 단단히 움켜쥔 남자의 손.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코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덜컥 두려움이 몰려든다. 궁지에 몰린 아시카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나왔다.
“글레노아 슈베른은!”
뺨 언저리에 다가온 입술이 멈췄다. 아시카는 두렵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다.
“진심이라고 호소하기에는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아.”
놀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코랄의 반응은 미미했다. 아시카는 더욱 당황했다.
“아셨구나. 그래서 그 여자가 여기까지 와 있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건….”
“기분이 어떻던가요? 내내 외면했던 약혼자가 레이디 이그레인과 꼭 닮은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기분이?”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어둑한 가운데에도 까만 눈동자는 유독 빛이 났다. 불순물 하나 없는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 강렬하게 각인되는 아름다운 눈동자에 코랄의 시선이 못 박혔다.
“대용품은 대용품일 뿐입니다. 어떻게 해도 진짜가 될 수는 없지요.”
번들거리는 회색 눈동자에서 섬뜩한 안광이 스쳐 간다. 아시카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진짜야. 이 남자.’
그녀를 대신할 인형을 데리고 놀았다면서도 코랄은 당당했다. 오히려 들켰다는 사실을 기꺼워하는 느낌이랄까. 도저히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여자를 일일이 헤아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질투라도 해주신다면 기쁘겠군요.”
“나와 내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쉽게 넘어갈 거로 생각했나요?”
“그래서요? 겨우 이 정도로 저를 내치시려고요?”
피식, 비웃음 비슷한 소리가 새었다. 아아, 그랬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포기할 것 같으면 2년씩이나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허리에 감긴 팔이 등허리를 훑으며 위로 올라갔다. 아시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걸 보면서도 코랄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귓불 언저리에 닿을 듯 말듯 가까워진 숨결이 소름 끼쳤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까 봐 비명을 지를 수도 없고 제힘으로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걸 알기에 코랄은 아시카를 품에 가두고 하얗게 드러난 목 언저리에 마음껏 입술을 묻었다.
“놔… 놔아….”
가녀린 음성이 바르르 떨린다. 두려움에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토해낸 목소리. 상대를 밀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덜컹, 하고 거칠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연회홀에서 밝은 빛이 쏟아지다가 순식간에 다시 커튼에 가려졌다.
“이런 실례.”
귀에 익은 목소리가 팽팽한 긴장감을 단번에 깨버렸다. 아시카를 품에 가두고 있던 코랄이 고개를 들었다.
아시카는 놀라 숨을 헐떡이며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남자가 탈리온이라는 사실도, 이 상황이 수치스럽다는 생각도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뻣뻣하게 굳은 채 저를 바라보는 짙푸른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평소와 다르게 사나운 빛이 넘실거리는 눈동자를.
평온을 가장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오클레인 공자. 밖에서 애인이 애타게 찾던데?”
“탈리온 공작님?”
코랄은 제 등 뒤에 나타난 사람을 확인하고 얼굴을 구겼다. 다른 누구도 아닌 탈리온이 왜 여기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공자의 애인이 여기 오겠다고 내 보좌관을 무척 피곤하게 만들었어.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지 않겠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있지도 않은 애인으로 저를 모함하시는군요.”
“아아, 발뺌하시겠다? 칼프가 들은 내용은 그게 아니라던데?”
“그리고 공작님께서 왜….”
코랄이 드루쉬아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아시카는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
“레이디 이그레인!”
코랄이 아시카를 잡으려고 했지만 단단한 팔이 불쑥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드루쉬아였다.
“탈리온 공작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코랄은 성난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러나 드루쉬아의 시선은 아시카를 좇고 있었다.
드루쉬아가 가로막는 사이 아시카는 그대로 발코니에서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드루쉬아가 그녀보다 먼저 문고리를 잡았다. 코랄을 막아주었지만 아시카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아시카는 당황한 얼굴로 물러났다. 코랄의 반대편, 드루쉬아에게서 떨어진 구석으로.
덫에 걸린 사슴처럼 새까만 눈동자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시카의 어깨가 빠르게 들썩이고 있었다. 드루쉬아의 얼굴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숨 좀 가다듬고.”
그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가까이 다가갈 의사가 없음을 알렸다.
“옷하고 머리도 가다듬고.”
전혀 친절하지 않은 퉁명스러운 어조였다. 짧게 내뱉은 몇 마디가 아시카의 정신을 환기했다.
“아.”
제 상태가 몹시 불안정하다는 걸 아시카는 뒤늦게 깨달았다.
하마터면 이대로 뛰쳐나가 엉망이 되어버린 모습을 연회홀 한복판에서 드러낼 뻔했다. 하지만 차마 고맙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시카는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고 흘러나온 머리칼이 없는지 꼼꼼히 매만졌다.
드루쉬아의 시선이 덜덜 떨리면서도 끈질기게 옷차림을 정리하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쩌자고 끼어들었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수습하고 아시카는 간신히 발코니를 나갈 수 있었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이어질 것이다.
아시카는 연회홀 출구를 향해 움직였다. 홀을 가득 채운 사람들과 번쩍이는 조명, 경쾌한 음악 소리, 그 무엇도 그녀의 발길을 잡아두지는 못했다.
문을 막 나섰을 때 아시카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당장 이곳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가씨?”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잔느는 평소와 다른 아시카의 모습에 놀란 얼굴이 되었다.
“마차, 불러와. 그만 돌아가자.”
짧은 몇 마디를 내뱉는데도 아시카의 숨이 차올랐다. 잔느는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지만 궁금한 마음을 꾹 눌렀다.
“외투는 어쩌셨습니까?”
아시카는 그제야 맡겨둔 옷도 찾지 않고 뛰쳐나왔다는 걸 알았다. 차게 굳어진 얼굴을 보고 잔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보내서 찾아오겠습니다. 마차가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잠시 쉬는 게 좋겠습니다.”
잔느는 아시카를 정원 한쪽에 있는 벤치로 안내했다.
“…고마워.”
아무것도 묻지 않아 줘서. 평온을 가장했지만 벤치에 앉는 순간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아시카는 오늘 처음으로 코랄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예의를 벗어던진 남자의 민낯이 그토록 위협적이라는 사실도 처음 깨달았다.
‘그 얼굴을 어떻게 다시 보지? 또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서늘한 밤공기에 머릿속도 차게 식어갔다. 생각이 명료해질수록 상황에 대한 답은 더욱 모호해졌다.
“레이디 이그레인.”
아시카의 상념을 깬 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한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그런 목소리.
“레이디 슈베른, 무슨 일인가요?”
적잖이 놀랐지만 아시카의 표정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어쩌면 저를 따라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글레노아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글레노아의 시선은 가까이 있는 잔느에게 향했다.
“잔느는 내 호위 기사예요. 무슨 얘기를 하든 제 기사와 함께 있는 자리여야 합니다.”
잔느는 아시카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몇 걸음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호위 기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말에 글레노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들어주는 사람이 많으면 더 좋지.’
그런 자신만만한 얼굴로 한 걸음 더 아시카에게 가까워졌다. 낯선 사람의 접근에 잔느도 아시카와의 거리를 좁혔다.
글레노아는 잔느를 신경 쓰지 않았다. 호위 기사라고는 하지만 가벼운 정복 차림의 여자였다.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코랄과 정말로 결혼하실 생각인가요?”
“이 무슨 무례한….”
잔느가 나서려고 하자 아시카가 손을 들어 막았다. 아시카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글레노아를 보았다.
같은 레이디라고 불리지만 공작가의 후계자인 아시카와 몰락 귀족인 글레노아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 원래대로면 글레노아는 아시카에게 감히 만남을 요청할 수조차 없는 위치였다.
“내가 왜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하죠?”
아시카의 목소리는 여전히 서늘했다. 글레노아를 바라보는 표정에는 조금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요? 물론 코랄이 제 얘기를 하지는 않았겠지만.”
글레노아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마침내 진실을 토해냈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애써 억누르면서.
“1년이에요. 제가 코랄과 함께한 시간이. 약혼하신 지 2년이 다 되었다고 들었는데, 코랄은 그 기간 중 반을 저와 함께 있었어요.”
“그래서요?”
글레노아의 등줄기에 싸한 냉기가 돌았다. 갑자기 벽을 마주한 기분. 뭔가 반응해야 이야기를 끌어갈 텐데 아시카는 감정 없는 조각상처럼 가만히 되물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