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짙은 검갈색 눈동자에 갈색 머리칼. 화려한 장식으로 시선을 빼앗고 주름진 얼굴을 화장으로 가린 덕에 황태후는 예순이 넘는 나이에도 중년으로 보일 정도였다.
황태후가 상석에 앉은 뒤 참석자들이 차례로 모여들었다. 황태후에게 인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미리 명단이 작성된 소수뿐이라서 나머지는 조용히 주위를 배회했다.
“폐하, 좋은 날인데 어찌 이리 안색이 창백하십니까.”
제일 먼저 달려와 말을 건네는 이는 쉬버티엘 후작이었다. 황태후는 화려한 의자에 몸을 기대며 얼굴을 구겼다.
“뒷방 늙은이처럼 비좁은 곳에 처박혀있으려니 답답해서 그러지.”
“태자비 전하께서 아직 미숙하여 보필이 부족했나 봅니다.”
그는 황태후 옆에서 숨죽이고 있는 자신의 딸을 보며 안타까운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어젯밤에 말 상대라도 해드렸어야 했는데….”
탁, 소리가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헙.”
황태자비는 재빨리 입을 가리며 시선을 돌렸다. 황태후가 손잡이를 움켜쥐고 부리부리한 눈동자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쉬버티엘 후작은 무슨 일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어제 또 발작하셨구나.’
이는 암암리에 퍼져있는 소문이었다. 황태후가 밤이 되면 환영을 보고 발작을 일으킨다는 소문. 선황제가 돌아가신 뒤부터 생겨난 병증이라고 했던가.
우울해하는 황태후를 달래려고 딸을 보냈지만 숫기 없고 소심한 황태자비는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쉬버티엘 후작은 눈치 없는 딸 대신 더 살갑게 다가갔다.
정치적 기반이 없는 후작가의 레이디를 황태자비로 밀어 넣은 것이 황태후였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도 그에게는 가장 강력한 후광이었다.
“기분 푸십시오, 폐하. 오랜만에 연회를 즐기시도록 제가 폐하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가 신호하자 뒤따라온 시종이 고풍스러운 양각이 새겨진 상자를 가지고 왔다.
“오, 그게 무언가?”
황태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황태자비는 재빨리 나서서 아비가 열어준 상자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황금색이 찬란하게 빛나는 잔이었다.
“내부는 독을 감별할 수 있다는 희귀 금속으로 만들어졌고 몸체는 수도 최고의 장인이 장식을 새겨넣었습니다.”
“아름답구나. 식탁이 아니라 전시실에 두어야겠어.”
흡족한 마음에 황태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황금색은 황실의 색이었다. 금이 고귀해서가 아니라 황실의 직계자손에게 내려오는 황금안 때문이다.
광택을 머금은 진한 노란색의 눈동자. 건국신화에서 신의 힘을 나눠 받은 초대 왕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던 왕들은 대부분 황금안을 지녔기에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더는 황금안이 태어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황실이 권위와 상징성을 잃었다는 풍문이 한동안 돌았었다.
황실에서는 입에 올리기 껄끄러운 문제였지만 황태후는 개의치 않았다. 평생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 없는 문제였다.
“그 안에 있는 건 또 무언고?”
상자 안에 있던 것은 황금잔만이 아니었다. 황태자비는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작은 장식을 꺼냈다. 금속을 섬세하게 세공해 꽃의 형태로 만든 부토니에였다.
쉬버티엘 후작은 이번에도 자신만만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최근에 수도의 전문 정원사가 특별한 색을 지닌 꽃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하여 그 꽃을 본떠 만든 장식이옵니다.”
“헉”
순간이었다. 눈부신 샹들리에 빛이 반사되어 시린 금속 빛이 날카롭게 황태후의 눈을 찔렀다.
“아아악!”
황태후는 제 앞에 내밀어진 부토니에를 매섭게 후려쳤다.
“그대는 나를 우롱하는 게냐!”
찢어지듯 날카로운 외침에 연회홀의 음악이 중단되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황태후는 바닥에 나뒹구는 꽃장식을 사납게 발로 으스러뜨렸다.
귀족들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황제의 모후께서 성난 발길질로 무언가를 짓뭉개는 모습에는 황족의 권위도 기품도 없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황태자비는 이유도 모른 채 벌벌 떨었고 선물을 가져온 쉬버티엘 후작도 사색이 되었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 둘이 황급히 달려왔다.
“폐하, 고정하세요.”
“네가 감히 이깟 것을 내게 들이밀어!”
시녀들의 만류에도 황태후는 씩씩거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폐하, 아직 날이 밝습니다.”
“그림자도 지지 않은 날입니다. 여기를 보세요.”
시녀 하나가 황태후의 상체를 이끌어 눈부신 조명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황태후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얼굴을 구겼다.
“이, 이 불손한 것들!”
“폐하, 보세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가까이 있는 귀족들은 분명히 들었다.
‘허. 소문이 진짜였나 보네.’
‘황궁에서 내보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연회를 위해 황태자비를 보내왔지만 황태자는 참석하지 않았다. 황제의 의도가 분명히 보이는 대목이었다.
시녀 둘은 조심스럽게 황태후의 양팔을 잡더니 처음 들어왔던 아치형 문으로 향했다. 살살 달래며 데려가는 모습이 제법 익숙해 보였다.
황태후와 황태자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람들은 긴 숨을 토해냈다. 누군가의 신호에 홀 안에 다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조마조마하더니 기어이 일이 터지는구만.”
“사달 나는 줄 알았어.”
“근데 갑자기 왜 그러신 거지?”
“그걸 난들 알아? 안다면 쉬버티엘 후작이나 그 시녀들이겠지.”
황태후가 짓이겨버린 부토니에는 누군가 벌써 치웠고 후작도 시종의 안내를 받아 밖으로 사라진 뒤였다.
엉망이 되어버린 분위기를 살리고자 밝고 경쾌한 춤곡이 연주되었다. 그러나 고위 귀족이 움직이지 않는 한 나머지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들 숨 좀 트여줘야지. 공작이라는 지위가 있는데.”
“허.”
드루쉬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하면서도 샤프리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홀 중앙으로 나아갔다.
키와 체구의 차이가 상당한데도 두 사람의 모습은 꼭 맞춰놓은 것처럼 잘 어울렸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드루쉬아와 금발에 청록색 눈동자를 빛내는 아름다운 약혼녀 샤프리.
드루쉬아의 몸은 오래도록 단련해온 기사답게 탄탄했다.
평균을 넘어가는 키에 큼직하게 벌어진 어깨 골격, 균형 잡힌 팔다리가 우아하게 파트너를 이끌었다. 매끈하게 맞춰 입은 연미복 아래 얇은 셔츠가 달라붙어 걸음마다 미묘한 근육의 움직임을 드러냈다.
아시카는 제 손에 닿는 감촉을 느끼고서야 드루쉬아에게 머문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허락도 없이 코랄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춤 한번 못 추고 지나갔습니다. 이번에도 거절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아무리 싫어도 현재는 그녀의 약혼자였다. 사이좋은 드루쉬아 커플을 보면서 아시카는 거절할 핑계를 찾지 못했다.
“한 곡만입니다.”
싫은 내색을 꾹 참으며 잡힌 손에서 힘을 뺐다. 한숨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아서 억지로 숨을 가다듬었다.
‘기본만 하자. 기본만.’
적당히 상황을 봐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약혼녀가 없다고 코랄이 외로워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코랄의 손길에 끌려갈 때였다.
“헉.”
앞서가던 코랄의 몸이 휘청하는 것이 보였다. 어이없게도 코랄은 계단도 없는 맨바닥에서 발을 헛디뎠다.
“오클레인 공자?”
코랄은 당황한 걸음을 멈추고 아시카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아시카는 슬며시 몸을 비켜 앞으로 나아갔다.
“어머, 레이디 이그레인. 안녕하세요.”
성량이 풍부한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콱 틀어박혔다.
“레이디 슈베른?”
놀랍게도 정면에서 다가온 상대는 글레노아였다.
아시카는 놀란 나머지 글레노아의 파트너가 드루쉬아의 보좌관 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시카와 마주치는 순간 칼프는 글레노아의 손을 놓고 슬쩍 뒤로 빠졌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어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난감했는데 이렇게 만나 뵈니 반가워요.”
“저도 여기서 레이디 슈베른을 만날 줄은 몰랐네요.”
글레노아는 아시카에게 인사를 했지만 그 시선은 코랄에게 향해 있었다.
코랄의 얼굴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어 있었다. 언제나 능수능란하던 남자가 당황하는 모습은 참으로 볼만했다.
글레노아는 천연덕스럽게 코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글레노아 슈베른이라고 합니다. 레이디 이그레인과는 며칠 전 이스나 남작 부인의 살롱에서 뵈었어요. 처음 뵙는 자리인데도 상냥하게 대해주셔서 고마웠답니다.”
아시카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내가? 언제?’
어이없다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글레노아는 뻔뻔하리만치 태연했다.
약혼녀를 두고 바람난 남자와 그 내연녀.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긴장한 내색도 없이 웃는 얼굴이라니.
“공자님께서는 말수가 별로 없으신가 봐요. 인사도 안 받아주시고….”
애교 섞인 목소리가 서운하다는 투로 핀잔했다.
기가 막혀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코랄이 얼어있는 사이 아시카는 슬며시 잡힌 손을 빼냈다.
“오클레인 공자, 사람이 너무 많이 모였어요. 저희는 조금 있다 나오는 게 좋겠네요.”
“네… 네?”
코랄이 얼빠져 있는 사이 아시카는 얼른 몸을 돌렸다.
‘지지든 볶든 둘이 알아서 하라고 해.’
아시카는 둘 사이에 낄 생각이 없었다. 수도 귀족들이 모인 연회홀 한복판에서 치정문제라니.
‘이쯤 되면 코랄도 저 여자가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겠지.’
무슨 사달을 내든 둘이 알아서 하기를 바랐다. 기왕이면 그 사달이 크게 터졌으면 더 좋겠고.
발코니를 향해 멀어지는 아시카를 보고 코랄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창백했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레이디 슈베른. 즐거운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아시카의 바람과 달리 코랄은 내연녀를 두고 아시카의 뒤를 쫓았다. 지나가는 길에 테이블에 멈춰 서서 술잔을 연거푸 들이켜기까지 했다.
제발 누군가 코랄을 잡아주기를 바라면서 아시카는 황급히 발코니로 나가 문을 닫았다. 서늘한 밤공기에도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치정문제라니.’
차마 치부를 드러내기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묻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코랄이 이 문제에서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조금만 등 떠밀면 될 것 같은데.’
감히 황태후의 연회에 얼굴을 들이밀 만큼 대범한 여자였다.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더 큰 분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아시카가 생각에 골몰해 있는 동안 발코니의 문이 열렸다. 기어이 코랄이 쫓아온 것이다.
“오클레인 공자.”
“뭐가 그리 급해서 사라지셨습니까?”
코랄은 발코니로 들어서면서 거칠게 커튼을 당겼다.
연회홀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가려지며 발코니가 어둑해졌다. 차단된 공간이 더욱 은밀해지는 느낌에 아시카의 가슴에 불편한 감정이 일었다.
“언제까지 저를 외면하실 겁니까?”
코랄이 성큼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아시카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이내 난간에 등이 부딪혔다.
“외면이라니요. 그저 조심하는 것뿐이에요.”
“하. 그 조심을 언제까지 하시려고요? 우리가 약혼한 게 벌써 2년입니다. 알고는 계십니까?”
조금은 원망 어린 어조였다. 아시카는 늘어뜨린 손을 움켜쥐었다. 불과 며칠 전이라면 동요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가 낯을 가리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요.”
“제가 약혼자입니다!”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아시카의 어깨가 움찔했다.
“술 드셨어요?”
“하, 술. 연회가 아닙니까, 당연히 술이 빠질 리 없지요.”
아시카의 머릿속에서 경고신호를 보내온다. 코랄의 태도가 평소와 달랐다. 화가 난 것도 같고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오늘은 일찍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공자께서도 피로해 보여요. 저는….”
아시카는 조심스럽게 그를 피해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코랄은 단숨에 거리를 좁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오클레인 공자!”
코랄은 아시카의 허리를 한 팔로 감고 그대로 난간으로 밀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