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모주의 궁전이 지어진 이래 가장 크게 열린 연회였다.
황태후의 궁을 본떠 지어진 건물 주변에는 환한 불빛이 대낮처럼 밝혀졌다. 귀족들의 마차가 끊임없이 도착하고 황궁에서 지원 나온 기사단이 궁전 안과 밖을 수시로 오갔다.
연회홀 정문 앞에서 아시카는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보고 멈칫했다. 손의 주인은 평소처럼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보았다.
“손이 민망해지려고 합니다.”
남자치고는 살짝 톤이 높은 목소리였다. 등줄기를 긁는 듯한 느낌에 아시카는 티 나지 않게 입술에 힘을 주었다.
‘어쩌면 이렇게 뻔뻔할까.’
조금의 거리낌이나 가책도 없는 태도에 탄성이 나올 지경이었다. 작정하고 캐지 않았다면 의심하지도 못했을 테지.
더는 기다리기 어려웠는지 장갑을 낀 손이 아시카의 손을 잡아 올렸다. 차마 그것까지 거부하지는 못하고 코랄에게 끌리듯이 연회홀 안으로 들어섰다.
“이그레인 공작가의 아시카 이그레인 소공작과 오클레인 후작가의 코랄로드 오클레인 공자께서 입장합니다.”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에 연회홀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아시카는 언제나처럼 시린 표정을 하고 무심하게 사람들을 지나쳤다. 사락사락 다리에 닿는 차가운 실크의 감촉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귀족들은 대화하면서도 슬쩍 아시카를 곁눈질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이그레인 소공작의 출현에 다들 말을 붙이고 싶어 근질거리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는 또 한 사람의 존재가 컸던 탓이다.
아시카의 등장을 확인한 사람들의 시선이 미리 도착해 있던 드루쉬아에게 옮겨갔다.
‘저 두 사람, 오늘은 조용할까?’
‘지난번에 치안대에서도 한바탕했다며?’
‘이거 원, 사방이 살얼음판이야.’
연회홀에 모인 귀족들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황태후의 연회. 거기다 앙숙으로 소문난 두 가문의 조우까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가슴 졸이면서도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드루쉬아의 시선이 스치듯이 아시카에게 닿았다. 옅은 갈색이나 금발, 다채로운 색을 지닌 사람들 틈에서 아시카는 단연 눈에 띄었다.
‘여전히 차군.’
흑요석처럼 빛이 나지만 싸늘한 검은 눈동자.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칼은 하나로 틀어 올려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았다.
백금 액세서리로 장식한 머리는 단아해 보이면서도 찬 표정을 더욱 차게 느껴지게 했다. 심지어 어깨를 드러낸 은회색과 흰색이 조화된 드레스조차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았다.
‘저게 원래의 레이디 이그레인이지.’
지난번 연회에서 봤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울며 매달리는 레이디 이그레인이라니.
애써 덮어두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목이 타는 느낌이었다. 드루쉬아는 무심한 눈길로 연회장을 한 바퀴 휘 훑었다.
“사람들 표정이 볼만하군.”
“황태후 폐하께서 주최하신 연회잖아. 계륵이 아닐까 싶어.”
청량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샤프리였다. 마이헬러 후작가의 적녀이자 그의 오랜 친우로, 두 사람은 꽤 살갑다고 소문난 한 쌍이었다.
드루쉬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를 상대로 눈치를 봐야 하니 힘든 거겠지.”
“신나 있는 건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레이디와 공자들뿐이네.”
갓 성년이 된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그나마 연회 분위기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어디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드루, 그러지 말고 좀 즐겨봐. 연회에 자주 오는 것도 아니잖아.”
“내 옆에 붙어 있을 필요 없어. 놀고 싶으면 가서 놀아도 돼.”
“이렇게 잘생긴 약혼자를 혼자 두고 다니면 어떻게 하니? 누가 채가면 어쩌려고.”
“그러길 바란 거 아니었나?”
드루쉬아는 피식 웃으며 샤프리를 내려다보았다.
진한 금발에 봄빛을 담은 청록색 눈동자. 늘씬하게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는 선이 가늘면서도 유려했다. 샤프리는 아름다운 눈을 반짝이며 친근하게 몸을 붙였다.
“아무나 채가게 둘 순 없지. 누가 됐든 네 신붓감은 내가 꼭 확인해 볼 거라고.”
“아예 나서서 구해줄 기세로군.”
“내가 진작부터 말했잖아. 관심 가는 레이디가 있으면 말하라니까. 내가 자리를 만들어줄게.”
그렇게 말하면서 샤프리는 홀 안에 있는 여자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드루쉬아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약혼한 지 1년이 넘었지, 아마?‘
“벌써 그렇게 됐어?”
“그러게. 생각보다 길어졌는데 이제 슬슬….”
“앗, 저기 저 레이디는 어때? 지난달부터 혼처를 찾으려고 연회에 나온다더라. 몸에 두른 보석들 보이지? 가문에서 보유한 보석 광산이 황실에서 노릴 정도로 규모가 크대.”
샤프리는 드루쉬아의 말을 자르고 홀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드루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옮겨갔다.
“안탈로스 지역에 있는 가문이군. 돈은 많지만 대부분이 부동 자산이라서 외부 상단을 끌어들여 관리하고 있지. 유통이 약해서 나에겐 도움이 안 돼.”
탈리온은 기사의 가문이다. 변경을 지키는 막강한 기사단이 가문의 주축이었다. 그런데 대공령의 절반을 책임지게 되면서 관리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대공령에 출입을 통제하는 황제의 명령과 그로 인해 어려워진 물자유통이었다.
“주요 유통망을 꽉 쥐고 있는 가문이나 대규모 상단을 보유한 쪽이 낫지.”
영지가 확장될 가능성도 생각해야 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내뱉는 내용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문득 두 사람의 관심을 받은 여자가 드루쉬아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더니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드루쉬아의 시선은 차가웠다.
“도움 되지 않는 혼맥은 사양이야. 연애라면 모를까. 결혼이 우선인 레이디는 안돼.”
드루쉬아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상대에 대한 계산이 끝난 뒤였다.
“내가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었네, 뭐.”
이것저것 따질 거 다 따지고 그러고도 성에 차는 여자가 없다는 말이었다. 샤프리는 혀를 찼다.
“그래, 그럼 차라리 연애라도 하던가. 저기 저 여자분 보이지? 첫눈에 반해 구혼하는 남자가 제법 된다고 해.”
샤프리는 홀 한가운데서 다른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결이 좋은 갈색 머리칼을 땋아 올려 꽃과 액세서리로 장식한 여자는 오밀조밀한 얼굴과 늘씬한 몸매가 매력적이었다.
“난 은발이 좋아. 화사하고 밝은 분위기에 키도 적당히 크고 빼빼 마른 것보다는 풍만하고 육감적인 쪽이 취향이라고.”
열기가 전혀 담기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였다. 샤프리는 미묘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가 말을 삼켰다.
구체적인 설명과 달리 실제로 드루쉬아가 만났던 이들 중에 그런 외모를 지닌 여자는 없었다.
샤프리의 시선은 드루쉬아의 뒤쪽 발코니 근처로 향했다. 거기에는 드루쉬아가 말하는 이상형에 정확히 반대되는 여자가 있었다.
새카만 먹색 머리칼에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 호리호리한 체형에 단단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시카 이그레인이.
어째서일까. 드루쉬아가 정반대의 취향을 말하고 있는데도 자꾸만 아시카가 신경 쓰였다.
샤프리는 불안한 마음을 밀어내며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요즘 레이디들은 마른 쪽을 선호하는데, 남자들은 참 이상해.”
“이 많은 여자들 중에 설마 내 취향에 맞는 여자가 없을까. 너무 오래 끌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말라는 드루쉬아의 말에 샤프리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드루쉬아와 샤프리, 두 사람의 약혼은 가문의 압박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이그레인과 마찬가지로 탈리온의 직계 중 남아있는 사람은 그의 조부이자 전대 공작인 네오렌과 드루쉬아 단둘뿐이었다.
그래서 가신들은 드루쉬아가 파병군으로 나가는 데 극렬히 반대했었다. 귀족의 의무였지만 하나 남은 후계자를 위험천만한 파병지역에 보낼 수는 없다고.
대부분의 귀족 가문은 차남이나 삼남을 보냈다. 후계자만 남은 경우에는 기사를 고용해 대리파병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탈리온 공작가는 한 번도 대리파병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제국의 검이라는 위명에 걸맞지 않은 불명예였기 때문이다.
파병군으로 복무하고 돌아온 5년 전, 드루쉬아가 공작의 작위를 받은 뒤부터 가신들은 본격적으로 그에게 결혼을 종용했다. 어찌어찌 버텨오기는 했지만 꽤 피곤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오랜 친우인 샤프리가 강제 결혼을 할 상황에 직면했다. 샤프리는 서로의 방패가 되어주자며 임시 약혼을 제안했고 드루쉬아는 기꺼이 승낙했다.
그러니 이 약혼은 둘 중 하나에게 결혼 상대가 생기면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시한부 관계였다.
‘잘생긴 얼굴이 아깝지. 어찌나 건조하고 무심한지.’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 남자. 샤프리는 불쑥 튀어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드루쉬아가 이렇게까지 곁을 내주는 것도 샤프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이 그 장례식장이었기 때문일 터다.
가족을 잃어버리고 망연해하던 소년에게 다가갔던 날. 완전히 무너져버린 소년은 말없이 손수건을 건네오던 소녀에게 자신의 울타리를 허용했다. 그렇게 14년을 이어온 인연이었다.
“그런데 칼프는 왜 안 보여? 뒤따라온다고 하지 않았어?”
샤프리는 어깨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주위를 살폈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보좌관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내가 지시한 일이 있어서. 늦더라도 오긴 올 거야.”
내내 건조하던 드루쉬아의 얼굴에 미묘한 생기가 돌았다.
칼프에게는 조금 늦게 오라고 일러두었다. 혹시 연회 초반에 마주쳤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분명 재미난 변수가 될 거야.’
혹시 과한 참견은 아닐까 짧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금세 지워버렸다.
코랄의 내연녀인 글레노아 슈베른. 신사 클럽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덕에 뒤를 캐기가 쉬웠다.
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초대장을 받은 귀족들을 은밀히 수소문한다는 걸 알았다. 거기에 남작의 작위가 있는 칼프를 밀어 넣었다.
‘칼프가 누군지 알고도 덥석 제안을 받아들이다니. 뭐 의도야 몰랐겠지만.’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연극을 원하는 이에게 무대를 제공했을 뿐. 직접 움직이는 것은 레이디 슈베른이고 의도를 갖고 일을 벌이는 것도 그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커다란 목소리에 의해 중단되었다.
“만백성의 모체이신 일레르나 아크펠라 콘틸리아 황태후 폐하와 아사로아 쉬버티엘 콘틸리아 황태자비께서 드십니다.”
잔잔하게 흐르던 음악이 멈추고 홀 안쪽에서 아치 형태의 문이 열렸다. 양쪽에서 문을 연 시종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고 연회홀에 있는 귀족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걸음마다 드레스 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사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들라.”
황태후의 목소리에 간신히 굳어있던 연회홀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