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어두운 밤인데도 온 집안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침실도 마찬가지였다. 실내의 빛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벽면 전체를 커튼으로 가려놓았다.
글레노아는 제게 등 돌려 앉은 남자의 허리를 친근하게 감싸 안았다. 땀에 젖은 끈적한 피부가 달라붙자 코랄이 그녀의 팔을 툭 건드렸다. 그만 놓아달라는 의미였다.
조금 전까지 그녀와 뒤엉켜 신음하던 남자의 태도가 너무 차다. 글레노아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코랄, 정말 이러기예요?”
“보채지 마.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알아요. 나도 아는데….”
글레노아는 나 좀 봐주지, 하는 투정을 이내 삼켰다. 오늘 예정되었던 약혼녀와의 만남을 취소하고 왔다고 했던가.
살롱에서 만났던 차디찬 검은 눈동자를 떠올리며 새삼 불쾌한 감정이 치밀었다.
글레노아보다 어린 불과 스물두 살. 이그레인 소공작이라는 위치가 있지만 온실 안의 화초처럼 귀하게 자란 여인이었다. 흔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게 식은 아시카의 얼굴에서는 가면보다도 견고한 벽이 느껴졌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먹색 머리칼과 새까만 눈동자가 모든 감정을 집어삼킨 것처럼.
‘멍청한 건지 둔한 건지.’
아니면 까마득히 높은 신분이라 오페라 가수쯤은 우습다는 걸까.
한껏 긴장하고 살롱에 참석했다가 동요하지 않는 아시카의 낯빛에 비참한 기분을 느끼며 돌아섰다.
몰락 귀족 출신으로 혈혈단신 수도에 온 지 불과 1년여. 친척이 관리하는 신사 클럽에 갔다가 코랄을 만난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망해버린 지방 귀족 처지에는 감히 만나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고위 귀족. 약혼녀가 있다지만 어차피 글레노아에게는 지켜야 할 명예 같은 건 없었다.
허울뿐인 귀족의 신분보다 정부 자리라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돈과 권력을 원했다.
처음 코랄을 만났을 때만 해도 그녀가 바란 것은 그 정도였다. 이그레인 소공작이라는 약혼녀의 지위가 워낙 대단해서 감히 넘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만남이 계속될수록 생각이 바뀌었다. 코랄과 이그레인 소공작의 관계는 생각보다 나빴고 코랄이 약혼녀에게 가지고 있는 반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 얼음장 같은 얼굴을 보면 그럴 만도 하지. 까마귀처럼 생겨서는.’
글레노아는 아시카를 떠올리며 코웃음 쳤다. 제 머리를 까마귀처럼 새카맣게 물들였다는 사실은 그새 잊었다. 그걸 원한 것이 코랄이었다는 사실도.
코랄은 글레노아의 손을 밀어내며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참, 내 커프스 버튼 하나가 안 보이던데. 혹시 하녀들이 무슨 말 없었어?”
글레노아는 흐트러진 이불로 알몸을 가리며 시선을 돌렸다.
“주웠다면 말을 해줬겠죠. 다 당신 집안사람들이잖아요.”
“못 봤다는 거야?”
“직접 청소를 하는 것도 아닌데 제가 어떻게 알아요?”
글레노아의 목소리 끝이 절로 뾰족해졌다.
‘그걸 이제 와서 왜 찾아?’
꼴 보기 싫다고 팽개쳐둔 게 아니었나. 아니면 이그레인 소공작이 어디 뒀냐고 물어보기라도 한 걸까.
‘관심 없는 척하더니 그게 아니었단 말이지.’
뒤늦게 약혼자를 단속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2년씩이나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면서.’
제가 갖기는 싫고 남 주긴 아깝고. 뭐 그런 심보인가. 심술궂은 생각이 들었다.
“자고 가는 거 아니었어요?”
코랄이 외투로 손을 뻗는 걸 보고 글레노아는 몸을 일으켰다.
“형님이 오셨어. 아침 인사는 해야지.”
“소후작님께서 오셨어요? 계속 영지에 계신다면서요.”
글레노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코랄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는 걸 보고 글레노아는 아차 싶었다.
“아버지께서 부르셨으니까. 소후작씩이나 돼서 사교계를 너무 멀리한다고 한 소리 하셨어.”
그나마 남아있던 상냥한 태도마저 사라졌다. 코랄은 외투를 집어 거칠게 몸에 걸쳤다.
코랄은 오클레인 후작가의 차남으로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였다. 하지만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후계자로 선택된 것은 코랄이 아닌 그의 형님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주어진 기회가 이그레인 소공작과의 결혼이었다. 이 결혼으로 코랄은 이그레인 공작가의 영지 일부를 받기로 했다.
물론, 이그레인 공작가에 충성을 맹세한 가신으로서 받는 영지였다.
‘아내에게 충성맹세라니.’
콧대 높은 코랄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글레노아가 채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코랄은 설렁줄을 당겼다.
노크 소리와 함께 침실로 들어온 하녀는 벌거벗은 글레노아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익숙하게 테이블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올려둘 뿐.
자리에서 일어나며 글레노아의 시선이 하녀와 마주쳤다. 하녀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방에서 물러났다.
비릿한 정사의 향기와 향긋한 차향이 지독히 어울리지 않았다. 코랄은 하녀가 가져다 둔 약차를 글레노아에게 건넸다.
“왜, 내 형님에게 관심 있어?”
“코랄,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빈정거리는 어조에 글레노아의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답답해서 그래요. 온 집안에 커튼을 쳐놓는 것도 그렇고.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러죠.”
“결혼식이 끝나면 더는 숨기지 않아도 돼. 조금만 참아, 응?”
결혼식까지 올리고 나면 무를 수 없게 된다. 코랄은 결혼 계약에만 충실하면 될 테고. 그때가 되면 2년이나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든 아시카에게 그만큼 되돌려줄 생각이었다.
코랄은 그렇게 생각하며 글레노아의 검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빛이 바랜 듯 탁한 검은 색. 글레노아의 검은 눈동자 또한 자세히 보면 검갈색에 가까웠다. 아무리 닮았다고 생각해도 코랄이 기억하는 여자의 검은색과는 달랐다.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았기에 빛이 나는 새카만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지닌 여자. 그 짙은 색채만큼이나 제게는 강렬한 여자.
‘아시카 이그레인.’
시선은 글레노아에게 향해 있지만 코랄의 머릿속을 차지한 것은 다른 여자의 얼굴이었다.
가만가만 쓰다듬는 손길에 글레노아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찻잔을 입에 대었다. 코랄은 토라진 연인을 달래면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글레노아는 서둘러 찻잔을 비웠다.
‘지독하기도 해라.’
코랄이 사준 저택과 오클레인 후작가에서 보내온 사용인. 잠자리 후에 반드시 마셔야만 하는 차 한잔. 글레노아는 그 의미를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저 혼자만 잘난 줄 알지.’
그래 봐야 세상 물정 모르는 공자님일 뿐. 글레노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녀도 그렇게 호락호락 몸만 내어주고 끝나지는 않을 터였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두 남녀가 서로를 보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 * *
하얗고 가녀린 손에서 서류가 버석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덜컹.
급하게 일어난 탓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정원 구석에 마련된 자그마한 테이블을 하얀 손이 움켜쥐었다.
표정과 행동이 어그러지는 부산스러움. 차분한 얼굴과 달리 아시카는 당황해 있었다. 아시카는 테이블을 뒤로하고 서둘러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가씨.”
그녀만큼이나 다급한 발걸음이 뒤따라온다. 조금 전 보고서류를 올린 보좌관 쥴마였다.
그러나 아시카의 귀에는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가는 사용인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느라. 조금 전 전달받은 충격적인 소식을 애써 받아들이느라.
결혼을 불과 두 달 앞두고 약혼자가 바람이 났다.
어쩌면 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사실을 확인하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코랄을 사랑한다거나 어떤 감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어차피 조부 웨이브가 정해준 정략혼.
상대가 누가 되든 권력으로는 저를 누를 수 없을 테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가문에 충성하고 신체 건강한 자손을 만들어줄 상대면 족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결혼 전부터 정부를 끼고 있는 것도 모자라 집까지 내줘?’
이는 자신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이그레인 가문의 명예를 바닥으로 팽개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사람을 가신으로 들여 영지를 내줄 수는 없는 노릇.
‘그런 남자와 아이를 갖기 위해 살을 맞대야 한다고?’
생각만 해도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몸서리가 쳐졌다.
언제나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입안의 혀처럼 굴던 남자. 그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멀리했다. 왠지 모르게 질척이는 느낌도 싫었고.
그러면서도 내내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남자를 가까이해 본 적이 없으니 두렵고 꺼림칙한 마음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건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알겠다. 본능이 이성보다 먼저 약혼자의 기만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아가씨, 잠시만요.”
제 보좌관의 다급한 부름에 아시카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왜? 보고할 게 더 남았어?”
당연한 일이었다. 쥴마는 서류를 건넸을 뿐 아무런 설명도 더하지 못했다. 평소와 다른 아시카의 모습에 쥴마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얼른 수습했다.
“확실하지 않아서 보고서에는 기재하지 않았습니다만. 글레노아 슈베른이 모주의 궁전 연회에 참석한다고 했답니다.”
“뭐? 그 여자가 어떻게? 어디서 나온 얘기야?”
작위는 고사하고 수도에 저택 하나 없는 몰락 귀족의 딸이었다. 그런데 무슨 수로 황태후가 주관하는 모주의 궁전 연회에 참석하게 됐을까.
“신사 클럽에서 들었습니다. 친척이 관리자로 있어서 레이디 슈베른이 주기적으로 드나드는 곳입니다. 친한 사람 몇 명에게만 살짝 귀띔해줬다고 합니다.”
아시카는 크게 뜬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당황한 나머지 아득한 기분마저 들었다.
‘설마 코랄이 데려가는 건 아닐 텐데.’
코랄은 아시카의 파트너로 참석한다. 그걸 위해 얼마 전 연미복까지 세트로 맞추지 않았나.
‘이 여자, 대체 무슨 꿍꿍이야.’
감히 제 앞에서 알짱거리는 것도 모자라 코랄과 같은 연회에서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보통 배짱이 아니었다.
“누구와 동행하는지 알아볼까요?”
“아니, 됐어. 어차피 연회에서 마주치면 알게 되겠지.”
오페라 가수라고 했으니 어울리는 사람이 적지는 않을 터다. 그중에 작위가 있는 귀족 한둘쯤은 있을 것이고. 내연녀의 사생활을 캐는 것보다는 코랄의 문제에 집중하는 편이 나았다.
“그럼, 지금 바로 공작님을 만나실 겁니까?”
“아.”
그제야 아시카는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조부 웨이브의 집무실로 가는 길이었다.
“공작님께 보고하길 원하신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당사자보다는 제삼자가 나서는 편이 낫다. 아무리 평정을 유지한들 바람난 약혼자의 이야기를 제 입으로 알리는 건 치욕이지 않은가.
순간 아시카는 정신이 확 들었다.
“아니야.”
“아가씨?”
“아마도 이게 처음은 아니었을 거야.”
과거에도 몇 번 소문이 들려 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코랄은 강력히 부인했고 증거도 증인도 없는 풍문일 뿐이었다.
코랄과 도저히 친해지지 못했던 아시카는 그걸 기회 삼아 웨이브에게 파혼 이야기를 꺼냈던 적이 있었다.
‘그 얘기를 전했을 때 조부님은 별로 놀라지도 않으셨지.’
그래 봤자 한때의 바람일 뿐이라며, 감정에 휘둘려 본래의 목적을 잃지 말라는 따끔한 충고까지 들었다.
웨이브에게 진중하지 못하다는 훈계를 들은 뒤 다시는 코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리 코랄이 싫어도 묵묵히 이 관계를 감수해왔다.
하지만 2년 동안 참아온 거부감이 이제는 목 끝까지 차올랐다.
‘이 결혼… 하고 싶지 않아. 이런 남자와 어떻게 결혼을 해.’
그렇다고 웨이브의 뜻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까마득한 벽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단 둘뿐인 가족. 이그레인 가문의 직계라고는 조부인 웨이브와 아시카뿐이었다.
웨이브가 공작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가문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아시카의 몫이 된다. 오로지 그걸 위해 엄격한 통제와 교육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렇게 치열하게 인내하며 버텨온 후계자의 자리. 어떻게 하면 제 위치를 흔들지 않으면서 이 결혼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아직 소문이 나지는 않은 거지?”
“네. 두 사람은 팜레드 거리에서만 움직였던 모양입니다. 고위 귀족의 얼굴을 평민들이 알아보긴 어려울 테니까요.”
하지만 소문이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살롱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해보면 글레노아는 코랄과의 밀애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소문이 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지.’
그 여자도 목적이 있다. 아시카와 마주친 두 번 모두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 분명했다.
아시카는 긴 숨을 토해내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후들거리던 몸이 진정되고 아득했던 머릿속이 차게 식는다.
“이걸로는 부족해.”
웨이브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필요하다.
‘방법을 찾아야 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2층으로 가는 계단참에서 아시카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열려있는 창문 너머에서 훈훈한 미풍이 불어온다. 정원에 만발한 꽃향기가 은은하게 코끝에 스며들었다.
어수선한 아시카의 마음과 달리 화사하고 아름다운 계절이었다.